365일 한시-이백李白 밤에 우저산에 정박하고 고사를 떠올리며夜泊牛渚懷古

밤에 우저산에 정박하고 고사를 떠올리며 夜泊牛渚懷古/당唐 이백李白

牛渚西江夜 우저산 밑 정박한 서강의 밤
青天無片雲 푸른 하늘 구름 한 점 없네
登舟望秋月 배에 올라 가을 달 바라보며
空憶謝將軍 공연히 사상 장군 떠올리네
余亦能高詠 나도 좋은 시 지을 수 있지만
斯人不可聞 그 사람이 들을 수가 없구나
明朝掛帆席 내일 아침 돛을 달고 떠나면
楓葉落紛紛 단풍잎이 분분히 떨어지리라

이 시는 지음(知音)이나 백락(伯樂)을 만나지 못한 탄식을 드러낸 시이다. 이백(701~762)은 스스로 시의 백아(伯牙)이고 말의 천리마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자신의 시를 알아주는 종자기(鍾子期)와 말 감정가 백락을 만나지 못한 것이다. 연구자들은 이 시를 727년 이백이 27살 때에 쓴 시로 추정한다. 7구의 마지막 3글자가 어떤 판본에 ‘동정거(洞庭去)’로 되어 있어 친구 오지남(吳指南)의 장례를 치르러 갔다는 것이다

이 시는 반드시 알아야 할 고사가 있다. 그래서 시인 스스로 원래 제목 옆에 주석을 달아 “이 곳은 사상이 원굉의 영사시를 들은 곳이다.[此地, 卽謝尙聞袁宏詠史處.]”라고 하였다. 먼저 시에 나오는 우저(牛渚)는 산 이름으로 남경 근처의 선주(宣州) 당도현(當途縣)에 있는데 달리 채석기(采石磯)라고도 하는 곳으로 나중에 이백이 죽은 곳이기도 하니 공교롭다. 이곳을 흐르는 장강을 달리 서강이라고 한다.

이 우저산 아래 진(晉)나라 사상(謝尙)이 군대를 주둔하여 지키고 있었다. 그런데 당시 군량미 운반선에서 잡부로 알하고 있던 고아 출신 원굉(袁宏)이라고 하는 사람이 밤에 영사시 한 편을 낭랑하게 읊었다. 시 내용도 좋고 소리도 청아하여 사상이 원굉의 시를 크게 칭찬하여 이 사람이 나중에 태수의 관직을 지내게 된다. 그러니 여기서 이백이 이 사상과 원굉의 고사를 떠올린 것은 앞에서 말한 대로 지음과 백락을 만나지 못한 회재불우의 탄식이라 할 수 있다.

이 시에 대해 고인들의 감상과 평가가 일치하는 한 가지가 있다. 보통 율시는 3, 4구와 5, 6구에 대구를 쓰는데 이 시는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그런데 평자들은 율시에 맞지 않는다고 그 점을 비난하기는커녕 오히려, 이것이 당나라 율시의 한 형식이며, 너무도 작위적인 흔적이 없이 자연스럽게 되어 있는 뛰어난 작품이라고 한다. 특히 청나라 왕사정(王士禎) 같은 사람은 송나라 엄우(嚴羽)의 《창랑시화(滄浪詩話)》에 나오는 ‘영양이 뿔을 걸어 놓은 것 같다.[羚羊掛角]’는 말을 인용하기까지 했다. 영양은 밤에 잘 때 포식자의 공격을 피하기 위해 자신의 뿔을 나무에 걸고 자므로 포식자가 영양의 발자국을 찾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한시가 정해진 율격을 엄밀히 꼭 지키는 것은 아니다. 규칙에는 금기라고 하지만 실제 작품에는 많이 보인다. 법이라는 것이 사람들이 조화롭게 살기 위해 만든 것인데 그 법으로 사람들의 행위를 모두 규제한다면 사람들이 어떻게 손발을 움직이고 말을 하며 숨을 쉬고 살겠는가. 한시도 이와 같은 것이다. 특히 당나라 시인들은 시의 흥취를 중시하기 때문에 이백의 이 시를 대구를 다 맞추지 않았다고 비난하지 않고 오히려 자연스럽다고 칭찬한 것이다.

시인은 자신도 고영(高詠), 즉 수준이 높은 시를 지을 수 있지만 그 시를 들어줄 사상 장군이 없다고 말한다. 사인(斯人)은 사상 장군을 가리킨다. 그래서 시인이 사상 장군을 떠올리는 것을 공억(空憶), 즉 부질없는 추억이라 한 것이다. 범석(帆席)은 돛을 말한다. 석(席) 자를 돛의 의미로 쓰는 것은 예전에 돛을 자리로도 썼기 때문이다.

내일 아침 떠나갈 때 단풍잎이 여기저기 분분히 흩날린다고 한 데에는 자신을 알아주는 사람이 없다는 시인의 마음이 투영되어 있다. 동정호의 가을 하늘에 날리는 단풍처럼 시의 여운이 길게 남는다.

安徽 馬鞍山 採石磯

365일 한시 28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