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이징의 남원(南苑)

南海 (《圖畫日報》 제12호)

《도화일보》 제12호에 실린 장소는 ‘남해(南海)’, 난하이입니다. 캉유웨이(康有爲)의 고향 광둥성 난하이인가요? 아니면 자금성 서쪽 서원(西苑)의 일부인 남해일까요? 그림에 그려진 경물이 그다지 뚜렷하지 않아 지표가 될 만한 건물을 분별하기도 힘듭니다.

《圖畫日報》 제12호 1면, ‘大陸之景物’(十二) ‘南海’ / 宣統1년 7월 12일 / 1909년 8월 27일.

서술된 내용을 참작해 보니 그려진 곳은 베이징 성 남쪽에 조성되어 있던 황실의 사냥터, 남원(南苑), 또는 남해자(南海子)입니다. 습지로 유명한 곳인데, 화면 전경이 이를 보여주는 것 같네요.



베이징 성과 남원, 그리고 북쪽과 서쪽의 산악지대를 보여주는 지도
南園, 南海子 등의 명칭이 보인다. 남원은 오늘날 베이징시 다싱구(大興區)에 해당하는 땅의 상당 부분을 점하고 있었다.

1886년경에 제작된 것으로 알려진 베이징 근교 지도입니다. 성 북서쪽에 표시된 녹지가 1856년 소위 애로호 사건에 의해 촉발된 제2차 아편전쟁 때 영프 연합군에 의해 철저하게 파괴된 원명원(圓明園) 자리입니다. 성 남쪽에 널찍하게 자리한 곳이 바로 남원입니다. 요나라와 금나라 때부터 조성되기 시작한 이곳을 명대에는 남해자, 청대에는 남원이라고 불렀습니다. 명대의 《제경경물략(帝京景物略)》에는 이렇게 적혀 있습니다. “성 남쪽으로 이십리 떨어진 곳에 커다란 구역이 있다. 남해자라고 하는데, 방형 둘레가 160리이다.(城南二十里有囿. 曰南海子, 方一百六十里.)” “사방에 문이 있으며 갖은 종류의 동식물이 서식한다. 사슴과 노루, 꿩과 토끼 등이다. 백성들이 취하지 못하도록 금하여 해호(海戶) 천 명을 두어 지키도록 했다.(四達為門, 庶類蕃殖, 鹿獐雉兔, 禁民無取, 設海戶千人守視.)” 청대에도 형편은 비슷했습니다. 사방에 문이 있었다는 얘기는 구역을 벽으로 둘러쳤다는 말입니다.

베이징 주위를 흐르던 물길이 여럿 교차하고 습지가 널리 퍼져 있던 곳이라 ‘해자(海子)’라 불렀으며 곳곳에 샘이 많았는데, 청대 도성에 대해 기록한 《일하구문고(日下舊聞考)》에 따르면 샘이 백 여 개가 있었다고 합니다.



이곳은 1900년 가을, 의화단의 난의 여파로 팔국연합군이 베이징에 진격했을 때 크게 파괴되었고, 이듬해 체결된 신축조약(辛丑條約)에 따라 열강에 배상하기 위해 여기저기에 매각함에 따라 황실 수렵원으로서의 역사는 끝나게 됩니다. 그리고서 10년 세월이면 옛 면모를 찾아보기 힘들어졌겠지만 《도화일보》에서는 아마도 옛 명성을 이렇게 환기했던 것 같습니다.

현재 옛 남원 터 일부에는 남오환로 남쪽에 면해 난하이쯔(남해자) 공원이 들어서 있습니다.


난하이쯔 공원 입구의 패루


원래 장강 중류의 습한 땅에 주로 살던 동물로 예전에 이곳에 풀어 키우던 사불상(四不像), 즉 미록(麋鹿)은 서방세계에 알려진 뒤 얼마지 않아 자연 상태에서 멸종되었는데, 현재 난하이쯔 공원에서 서양 국가들로부터 기증받아 키우고 있다고 합니다.


2018년 12월 8일에는 제1회 베이징 남해자 문화 포럼(首屆北京南海子文化論壇)이 베이징 다싱구(大興區) 룽시웨이징 회의 센터(龍熙維景會議中心)에서 개최되었습니다. 아래 링크로 들어가시면 난하이쯔 관련 동영상과 회의 소식 등을 보실 수 있습니다.

http://topics.gmw.cn/2018-12/05/content_32109564.htm

(민정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