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유기》 다시 읽기-맺음말

맺음말

객관적으로 말하자면, 『서유기』는 그 내용을 어느 하나의 성향으로 개괄할 수 없는 복합적인 작품이다. 실제로 명나라 이후 현대까지 많은 연구자들이 각자 나름대로 이 작품의 상징과 ‘미언대의微言大義’를 설명해보려 했지만, 어느 누구의 설명도 이 작품의 전모를 명확하게 규정하지 못했다. 이것은 역으로 이 작품에 그간의 많은 연구자들이 착안했던 다양한 의미들이 뒤섞여 있음을 의미한다. 이런 이유로 이른바 ‘전문성’이라는 미명 아래 주입된 사고의 틀로 인해 문학과 역사, 철학의 경계를 나누어 분석하는 데에 익숙한 현대의 독자들에게 『서유기』는 동양적 인문학의 사유 본질을 새롭게 일깨워주는 훌륭한 촉매제라고도 할 수 있다.

이 작품은 기본적으로 삼장법사가 서역으로 불경을 가지러 갔다 왔다는 사실을 기반으로 하여 민중의 제도와 안녕을 추구하는 대승불교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불로장생을 추구하는 도가의 수련 방법을 암시하기도 하면서, 또 어떤 경우에는 불교와 도교의 해탈이나 우화등선羽化登仙의 논리를 일체의 미신으로 치부하고 그들의 위선적 측면을 폭로하기도 한다. 그것은 관점에 따라서 어느 특정한 종교의 우월성을 강조하기도 하고, 모든 종교의 특성을 포괄하기도 한다. 심지어 이 작품이 전통적인 중국의 대표적인 종교 사상인 유가와 불가, 도가를 합일시킨 새로운 사상을 지향하고 있다고 해도 잘못된 설명이 아니다. 나아가 이 작품은 이런 종교적 성격을 벗어나 부패한 봉건 사회의 모순을 풍자하기도 하면서, 지배와 피지배의 관계를 벗어나 개인들 스스로 각성을 통해 온갖 세속적인 욕망에서 벗어남으로써 이상적인 사회에 이를 수 있다는 계몽서의 역할까지 수행하고 있다.

그러나 현대적 문학 비평의 기준에서 보면, 신나는 환상 세계의 모험 이야기에 대단히 심각한 철학적 상징을 담으려고 시도했음에도 불구하고 『서유기』에는—전통 시기 중국의 특별한 소설 관념을 고려한다 할지라도—예술적 완성도의 측면에서 눈에 띄는 몇 가지 결함들이 발견된다.

우선, ‘이탁오비평본’만 놓고 본다면, 가장 대표적인 것이 지루할 정도로 중언부언重言復言이 많다는 것이다. 앞에서 기술된 사건들 가운데 상당수는 뒷부분에서 주인공들의 대화 속에서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거의 그대로 재현되는데, 이것은 일차적으로 이 작품을 구성한 작자(혹은 편찬자)가 공연 현장에서 청중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던 이야기꾼의 관행을 수정 없이 답습한 결과이다. 현장에서 즉각적으로 전달되어 사라지는 말의 특성 때문에 이야기꾼은 필요할 때마다 지나간 이야기나 대사를 반복하여 청중의 기억을 환기시키곤 했는데, 문자로 정착된 『서유기』 텍스트에도 그런 관행이 별로 여과되지 않은 상태로 보존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사실 이런 현상의 이면에는 책의 권수를 늘려서 판매 이익을 올리려는 출판업자들의 속셈과 현대적 의미에서 작가 의식이라고 할 만한 것이 아직 미숙했던 작자(혹은 편찬자)들의 무신경함이 뒤엉켜 있다. 그들은 분명히 ‘독서’ 행위의 특징과 장점을 소홀히 여기고 있었다. 문자로 고정된 텍스트는 일회성의 기억을 중시하는 공연 현장과는 기억의 보존성이라는 측면에서 확연히 다르고, 그에 따라 독서에 익숙한 독자들은 공연 현장의 감성적 청중들보다 훨씬 차분하고 이성적이다. 읽기에 익숙한 독자들은 축적된 정보를 나름대로 분석하고 정리하여 다음 페이지의 내용을 추측하는 훈련을 본능적으로 진행하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또한 이 작품에 삽입된 사사詩詞들은 문학적 완성도의 측면에서 편차가 많고, 심지어 그저 단순히 글자 수만 시사처럼 맞추었거나 간단한 압운押韻만 구사하여 시사의 흉내를 낸 데에 지나지 않는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정도로 조잡한 작품들도 적지 않다. 물론 전통 시기 중국의 시사를 감상하는 훈련이 되어 있지 않은 독자들에게는 이런 부분이 크게 문제로 여겨지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조금이라도 절구絶句나 율시律詩를 읽어본 이들이라면 이런 결함을 근거로 자칫 『서유기』 전체를 조잡한 통속소설로 취급해버릴 수도 있을 것이다.

『서유기』에 내재된 이런 다양성과 결함들은 기본적으로 그것이 오랜 시간에 걸쳐 다양한 작가의 손을 거치며 완성되었고, 무엇보다도 그 작품이 추상적 개념의 논의에 익숙한 지식인들이 아니라 즉자적인 즐거움을 중시하는 일반 대중을 대상으로 삼았다는 데에서 비롯된다. 그러므로 이 작품에 담긴 모든 종교와 사회에 대한 관점—그것이 비판적이건 긍정적이건 상관없이—은 본래 오랜 세월 동안 중국 민중들의 의식 속에서 은밀히 성장해 가던 것을 하나의 환상적 이야기를 통해 부분적으로 조금씩 투영해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 결과 『서유기』는 완성된 형태가 아니라 종합적인 형태로 집적되었던 것이다.

우리가 『서유기』라는 고전 명작의 참된 맛을 제대로 느끼려면, 무엇보다도 우선 이러한 태생적 특징을 명확히 이해하고 인정해야만 한다. 가령, 그런 선행 조건이 갖춰졌을 때에야 우리는 이 작품에 삽입된 시사들이 적어도 『홍루몽紅樓夢』의 그것들에 비해 정련되지 못한 것은 분명하다 해도, 그 나름대로 역동성과 재미를 갖추고 있는 작품들 또한 적지 않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특히 전투 장면에 자주 나타나는 사부詞賦들은 진지한 시문학의 정교한 비평 기준이 아닌 민중 오락의 차원에서 접근할 때, 그 특유의 현장성과 경쾌한 리듬에 내재된 색다른 즐거움을 제대로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런 경험을 통해서 현대의 독자들도 ‘천천히 읽기’와 ‘부분적으로 맛보기’라는 전통 시기 중국인들 특유의 소설 감상 방법을 조금이나마 공유해볼 수 있을 것이다.

*

이야기 한 편을 읽는다는 것은 어쩌면 한 번의 여행을 하는 것과 같다. 이를테면, 나는 막연한 어떤 휴식과 재미를 찾아 경주로 출발한다(왜 하필 그곳을 선정했는가는 잠시 논외로 치자). 어쨌든 나는 지도를 보고 도로에 올라 열심히 이정표를 찾으며 운전에 열중한다. 길옆으로 펼쳐진 풍경들이 차창에 찍혀 줄줄이 기억의 뒤편으로 사라지고, 어느 순간 휴게소의 커피를 마시며 남은 여정과 시간을 생각한다. 경주에 도착한 후 이틀 동안은 그곳의 소문난 음식점들을 찾아가보고, 국사 교과서의 희미한 기억을 더듬으며 관광 안내 책자를 뒤적이다가, 자전거를 빌려 몇 군데를 돌아보고 사진을 찍는다. 어쩌면 계림의 숲에서 잠시 달콤한 낮잠을 즐길 수도 있을 것이다.

아니, 어쩌면 나는 그곳에서 유명한 이야기 한 편을 읽을 수도 있을 것이다. 낯선 풍경들에 적응하기 위해 잠시 신경을 집중하다가 이내 작가가 마련한 길을 찾기 시작한다. 때론 분명하게 때론 으슥하게 가려진 이정표를 찾아가며 조금은 긴 길을 가다보니, 어느새 마지막 페이지를 덮게 된다. 그곳에서 나는 어느 신문의 서평에 실린 누군가의 감상과 유사한 어떤 감동—혹은 짜증—을 느낀다. 그리고 다시 풀밭에 누워 하늘을 잠깐 보다가 눈을 감고 잠시 이야기의 여운을 되새겨본다.

단순하게 비유하자면, 서울에서 경주까지의 여정은 한 이야기의 첫 페이지에서 마지막 페이지까지의 독서와 같다(왜 경주를 택했는가 하는 이유 역시 왜 그 책을 택했는가 하는 이유에 상응한다). 어떤 경로를 통했는가는 중요하지 않지만, 어쨌든 그곳 혹은 그것은 내게 필요한 휴식과 재미를 줄 수 있다고 판단한 대상인 것이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고 난 후, 어느 날 나는 한 가지 곤란한 문제에 부딪힌다. 즉 처음에 내게 필요했던 것이 경주로 가는 것 혹은 한 권의 책에 담긴 이야기를 읽는 것이었는가, 아니면 휴식 재미를 제공해줄 대상을 찾는 것이었는가 하는 문제이다. 그러고 보니, 경주까지는 너무 먼 길이었고, 그 책도 단번에 읽기엔 조금 부담스러운 분량이었던 것 같다. 그렇다면 나는 굳이 경주를 택하지 않거나 다른 이야기를 택할 수 있었을 것이다. 어쩌면 고수부지를 따라 한강 주변을 산책할 수도 있었을 테고, 그 두꺼운 책보다 좀 더 얄팍하고 짧은 이야기를 택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후자를 택했다면 나는 이정표에 매달리며 운전하느라 진을 빼는 대신 느긋하게 강변의 풍경과 들풀을 감상할 수 있었을 것이고, 운이 좋으면 한두 줄 시도 쓸 수 있었을지 모를 일이다. 그리고 그 시간 동안이라면, 어느새 기억 속에는 줄거리만 희미하게 남은 그 장편의 이야기 대신 진한 여운을 가진 짤막한 소품들을 서너 편 읽을 수 있었을지 모른다. 어차피 시간이 한정될 수밖에 없다면 아무래도 나는 촉박하고 긴 여행과 장편의 독서, 혹은 느긋하고 짧은 산책과 짤막한 독서가 주는 휴식과 재미의 질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볼 필요가 있을 듯하다.

그러고 보니 불국사 앞에서 사온 작은 염주를 만지작거리다가 느꼈던 당혹감이 떠오른다. 단순히 만지작거리는 동작을 하면서도 나는 그저 스님을 흉내 내며 무심히 한 알 한 알 세어 넘기고만 있었을 뿐, 싸구려치고는 제법 매끈하게 다듬은 그 염주의 알들을 하나씩 꼼꼼히 살펴볼 여유가 없었다. 문득 그 사실을 깨닫고 다시 살펴보니, 염주 알들은 동그란 모양과 크기만 같을 뿐이고, 하나하나가 서로 다르면서도 아름답기 그지없는 나무 무늬들을 보여주고 있었다. 어쨌거나 만만한 불경 하나 제대로 외우지 못하는 나로서는 염주를 넘기는 동작에 부여할 수 있는 다양한 의미들의 가능성을 발견했다는 것이 나름대로 신선한 충격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