中國思想文化術語詞典 3-회원이덕懷遠以德

회원이덕懷遠以德

은혜와 인덕으로 먼 지역의 부족, 백성 등을 위로하고 회유하는 것을 가리킨다. 역대 화하족 정권이 다른 민족과, 직접적인 통치 범위 안에 있지 않은 부족 및 외국과의 관계를 처리한 정치 이념이다. 중국은 다민족 국가였으며 화하족을 주체로 하는 정권은 스스로 대국이자 문화가 발달했다고 생각해 중국 문화에 속하지 않는 먼 곳의 부족과 백성 등에 대하여 보통 무력을 쓰기보다는 유가의 ‘인덕仁德’에 부합하는 유화적 수단으로 귀순시키려 했다.

예) 관중이 제 환공桓公에게 말하길, “신이 듣건대 아직 귀순하지 않은 제후는 예로 복종시키고 먼 지역의 부족과 백성은 덕으로 위로하라고 했습니다. 덕과 예를 어기지 않으면 귀순하지 않는 자가 없을 겁니다.”라고 했다. 管仲言於齊侯曰: 臣聞之, 招携以禮, 懷遠以德, 德禮不易, 無人不懷. (《좌전·희공僖公 7년》)

기리肌理

본래는 살갗의 결을 뜻하는데 파생되어 사물의 세밀한 조리를 가리키게 되었다. 문학 용어로는 청대의 옹방강이 맨 처음 제시했으며 의리義理와 문리文理, 두 측면을 함께 가리켰다. 의리는 시가 말하는 도리와 사리事理로서 주로 유가의 사상과 학문에 부합한다. 그리고 문리는 시의 조리 혹은 맥락으로서 주로 시의 구조, 격률 그리고 창작 기법을 가리킨다. 명청 이후, 성령파性靈派는 문학이 개인의 성정만 표현하고 교화는 포기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신운파神韻派는 참신하고 현묘한 시의 의경意境을 찬미했다. 옹방강은 이 두 가지 주장에 다 반대하고 송시의 창작 원칙과 방법을 추종했다. 의리에 있어서는 경전의 내용을 기준으로, 학문을 바탕으로 삼자고 했으며 문리에 있어서는 형식이 세밀하고 우아하면서도 내용은 충실해야 한다고 했다. 기리파는 청대 건륭乾隆, 가경嘉慶 시기, 경학과 고증학의 성행을 배경으로 형성되었다. 옹방강은 시의 내용과 형식의 유기적인 결합을 선양하면서 학자들로 구성된 시 유파를 만들었다. 하지만 그는 학문과 고증으로 시를 짓는 것만 고취한 탓에 동시대와 후대의 문예 비평가들에게 비판을 받았다.

예) 나는 나와 예전 사람의 견해가 같은지 다른지 개의치 않고, 그 견해들이 비롯된 것이 옛 사람인지 요즘 사람인지도 개의치 않는다. 단지 글의 조리와 의리를 세밀하게 분석해 어디에 치우치지 않는, 가장 합리적인 견해를 찾으려 할 뿐이다. 同之與異, 不屑古今, 擘肌分理, 唯務折中. (《문심조룡文心雕龍·서지序志》)

유가 경전에서 추구하는 ‘의리’의 ‘리’는 실질적으로 글의 도리와 사리이고, 동시에 글의 맥락과 조리이기도 하다. 義理之理, 卽文理之理, 卽肌理之理. (옹방강翁方綱, 《지언집서志言集序》)

사인士人들이 태어난 지금 이 시대는 마침 유학이 번성해 세상을 밝히고 있다. 그래서 학문하는 사람은 반드시 고증을 기준으로 삼고 시를 쓰는 사람은 반드시 기리를 기준으로 삼아야 한다. 士生今日, 經籍之光盈溢於世宙, 爲學必以考證爲準, 爲詩必以肌理爲準. (옹방강, 《지언집서》)

출처 如意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