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당의 정국-세계 제국 4

5-4 문화의 항공모함

아베노 나카마로는 일본으로 돌아가야 했다.

중국 이름이 조형晁衡이었던 아베노 나카마로는 개원 4년(716)에 유학생으로 당나라에 왔다. 당시 그는 19세였고 그를 비롯해 함께 온 기비노 마키비와 학문승 겐보玄昉는 모두 희대의 인재였다. 국자감에 들어가 공부한 아베노 나카마로는 두터운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우수한 성적으로 바로 진사에 급제했다.32
이제 우리는 적어도 3명의 외국인 진사를 알게 되었다. 차례대로 보면 일본인 아베노 나카마로, 신라인 최치원, 아랍인 이언승이다.

阿倍仲麻呂(晁衡)

이것은 깊이 생각해볼 만하다.

앞에서 말한 대로 당나라의 과거에서 가장 시험 치기 힘든 과목은 진사였다. 왜냐하면 명법明法, 명산明算 등의 다른 과목은 전부 전문 기술요원을 선발했기 때문이다. 진사과는 제국의 고급 관리와 정치가가 될 인재를 뽑기 위해 설치되었다. 그래서 전문 기술을 평가하지 않았고 기본 소질과 종합적 능력에 대한 요구가 훨씬 높았다.

그러면 진사과는 무슨 시험을 봤을까?

첩경貼經, 잡문雜文, 시무책이었다. 첩경은 유가 경전에서 뽑은 일부 단락의 빈 칸을 채우는 것이었고 잡문은 시와 변문(騈文. 주로 4자와 6자의 대구를 맞춰 쓰는 형식적 문체)을 쓰는 것이었으며 시무책은 현재 정치의 대책을 서술하는 것이었다. 첫 번째는 기초 지식의 점검, 두 번째는 재능과 기예의 확인, 세 번째는 학위논문에 해당했다. 이렇게 종합적으로 평가를 했으니 시험에 붙기 힘든 게 당연했다.

외국인에게는 한층 더 어려웠을 것이다.

하지만 아베노 나카마로는 단번에 합격했다. 그 후에는 장안에 남아 당나라의 관리로서 수십 년을 살았다. 그러다가 천보 12년(753), 고향이 그리웠던 그는 현종에 의해 당나라 사신으로 임명되어, 오랜만에 재회한 지인이자 견당부사였던 기비노 마키비와 함께 고향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 조정과 민간에서 많은 이들이 아쉬워했다. 한 시대를 풍미한 시인 왕유王維 등이 차례로 송별의 시를 써주기도 했다. 아베노 나카마로도 유명한 「함명환국작銜命還國作」을 써서 중국인 친구에게 주었다. “평생의 보검 한 자루를, 친구에게 선물로 남기네.”(平生一寶劍, 留贈結交人.)라는 내용이었다.33

이처럼 아베노 나카마로는 당나라에 깊이 융화된 상태였다.

당시 나카마로 같은 외국인은 소수가 아니었고 그들이 당나라에 융화된 원인은 제각각이었다. 예를 들어 사산 왕조가 아랍 제국에 의해 망한 뒤 도망쳐온 페르시아 왕족은 나라를 되찾을 수 없어 부득이 장안에서 객사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더 많은 이들이 당나라에 와서는 떠나고 싶어 하지 않았다. 홍려사 국빈관에 눌러앉은 사절들이 그 예였다. 하지만 모든 외국인이 다 당나라의 부양을 받은 것은 아니었으니, 다른 이들을 매료시킨 것은 또 무엇이었을까?

부, 기회, 제도, 문화였다.

이익을 쫓는 상인들은 당연히 거액의 부나 돈 벌 기회를 노리고 온 것이었다. 그것은 사실 수 양제에게 감사해야 했다. 대운하의 개통 덕분에 육상과 해상의 두 갈래 실크로드가 기본적으로 관통되었다. 상인들은 광주항에 상륙해 매령梅嶺을 거쳐 홍주에 들어가서 다시 동쪽으로 전당강에 들어가면 순조롭게 항주에서 양주, 낙양을 거쳐 실크로드의 동쪽 기점인 장안에 이를 수 있었다.35

세계의 수도로서 장안은 국제무역의 대시장이었다. 이곳에 제국은 시국市局과 시준국市准局을 설치해 상공업 관리와 표준 계량을 책임졌고, 또 물가의 안정도 책임졌다. 박리다매의 정책은 소비를 자극했으며 싸고 안정적인 물가는 멀리서 온 외국 상인들이 더 큰 이익을 도모하게 했다. 그래서 소그드, 페르시아, 아랍 위주의 외국 자본이 저절로 형성되었다.

호인들의 상단은 대단히 전문적이어서 심지어 일부 업종을 조종하고 독점하기까지 했다. 한 번은 어느 절에서 법회를 치르고 시주가 바친 보물 하나를 얻었는데 길이가 약 몇 치에 모양은 오래된 못 같았다. 그 절의 승려는 물건 보는 눈이 없어 그것을 갖고 서시에 가서 호상胡商에게 감정을 의뢰했다. 호상은 척 보자마자 말했다.

“어디서 났죠? 값을 부르세요!”

승려는 눈 딱 감고 10만을 불렀다.

하지만 호상은 껄껄 웃었다. 승려가 가격을 50만까지 올린 뒤에야 그는 찬찬히 입을 열었다.

“말씀드리죠. 이건 1000만의 값어치가 있습니다.”

거래가 성사된 후에야 승려는 그것이 부처의 유골임을 알았다.36

이 일의 진위는 알 도리가 없지만 그 호상이 얼마나 부자이고 장사 수완이 좋았는지는 짐작이 간다. 그들이 보기에 대외적으로 개방된 당나라는 그야말로 천국이나 다름없었다. 장안은 화수분이었고 양주는 지상낙원이었으니 그들은 당연히 넋이 빠져 고향에 돌아가는 것을 잊었다.

하지만 이것은 상인의 관점일 뿐이었다.

다른 이들은 공을 세울 기회를 더 중시했다. 안사의 난 전까지 당나라는 세계 제국으로서 영웅주의의 분위기가 강했고 진취적이고 개척적인 정신이 가득했다. 동시에 혼혈 왕조로서 종족을 구분하지 않고 모든 인재에게 문을 활짝 열어놓았다. 그래서 대신으로는 천축인 가섭제迦葉濟가 있었고 명장으로는 고구려인 고선지가 있었으며 외교관으로는 페르시아인 이밀예李密翳가 있었다. 그야말로 다양한 피부색의 인재가 한자리에 가득 모여 있었다.

수당이 창립한 제도가 자석과도 같았던 것은 그것이 당시 세계에서 가장 선진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제도들이 일본에 이식된 것이다. 장안성의 모양조차 거의 원형 그대로 나라奈良로 옮겨졌다.

한층 더 사람들을 매료시킨 것은 문화였다.

문화란 무엇일까? 문화는 바로 생활 방식이며 당나라인의 생활은 흥미와 시적 정취가 가득했고 지식, 지혜, 재능을 숭상했다. 어떤 사람이 재주가 출중하고 풍류가 넘치면 수많은 팬들이 생겼다.

이를 잘 설명해주는 이야기가 있다.

당 현종 개원 연간의 어느 날, 시인 고적高適과 왕창령王昌齡과 왕지환王之渙이 주루에서 가볍게 술을 마시다가 황궁 악단에서 노래 부르는 여자 몇 명을 우연히 보았다. 그때는 마침 엄동설한이었고 하늘에서 싸락눈이 날리고 있었다. 세 시인은 바깥방으로 몸을 피해 난롯불을 쬐며 노래를 듣다가, 여자들이 누구 시를 많이 부르는가를 따져 자신들의 시단에서의 순위를 매기기로 약속했다.

그런데 노래를 계속 들어보니 모두 왕창령의 시가 아니면 고적의 시였다. 왕지환은 은근히 화가 나기 시작했다. 그는 가장 미모가 빼어난 여자를 가리키며 말했다.

“조금 있다가 저 여자가 내 시를 노래 부르지 않으면 평생 당신들과 경쟁하지 않겠소.”

드디어 그 여자가 입을 열었다.

“황하는 멀리 흰 구름 사이로 올라가고, 외로운 성은 만길 높은 산에 있네. 강적羌笛 소리는 구태여 봄버들을 탓할 필요가 있나, 봄바람은 옥문관을 지나지 못하는데.”(黃河遠上白雲間, 一片孤城萬仞山. 羌笛何須怨楊柳, 春風不度玉門關.)

그 노래는 사람의 심금을 울리고 아름답게 울려 퍼져, 다들 가장 훌륭하다고 칭찬을 했다.

왕지환은 이 일로 그녀와 알게 되었고 유쾌하게 하루를 보냈다.37

이 이야기의 진위도 마찬가지로 고증하기 어렵지만 묘사된 분위기는 믿을 만하다. 실제로 황족의 애호와 과거의 영향으로 시는 당나라 때 이미 일종의 생활 방식과 교류 방식 그리고 트렌드와 유행이 된 동시에 상류사회의 신분적 지표와 통치계급의 집단적 교양이 되었다. 그래서 시인 두목도 양주의 유흥가에서 물 만난 고기처럼 활약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가 엄청난 부자도 아니었는데 말이다.

이것은 당나라 문명의 높은 수준을 잘 증명해준다. 오직 문명이 고도로 발달한 국가에서만 시인이 그렇게 숭고한 지위를 가질 수 있으며, 또 그렇게 많은 이들이 시를 쓰고 인재가 배출될 수 있기 때문이다. 뭇별 같은 그 명가들의 배후에는 틀림없이 훨씬 더 방대한 작가들과 독자들이 존재했을 것이다.

아베노 나카마로는 바로 그런 분위기에 매료된 게 아닐까?

아마도 그랬을 것이다.

실제로 확인된 사실에 따르면 견당사는 매번 중국에 올 때마다 당나라인의 시를 대량으로 수집해 일본으로 가져갔으며 시를 읊고 부를 쓰는 것이 일본 황실과 고관대작의 필수 과목이 되었다. 당 헌종, 당 목종과 동시대를 살았던 헤이안조平安朝의 사가嵯峨 천황은 다음과 같이, 당나라인과 비교해 전혀 손색없는 시를 쓰기도 했다. “차디찬 강 봄날 새벽에는 조각구름뿐 하늘은 맑고, 양쪽 기슭에 꽃이 날려 밤이 더 밝네. 농어회, 순채국, 먹은 뒤 술 마시고 노래 부르며 달빛 이고서 가네.”(寒江春曉片雲晴, 兩岸花飛夜更明. 鱸魚膾, 蒓菜羹, 餐罷酣歌帶月行.)38

시 외에 조각, 회화, 서예, 악무 등도 있지만 일일이 다 열거할 수 없으므로 두 가지만 언급하고 넘어가기로 하자. 첫째, 중국의 독창적인 예술 형식인 서예는 일본과 신라에서도 대단히 유행했다. 일본의 사가 천황과 구카이 법사 그리고 신라의 최치원은 모두 후대에 명작을 남겼다. 그리고 둘째, 일본과 천축까지 전해진 당나라 악무는 서역 문화의 영향을 깊게 받았다. 사실상 서역 악무는 장안에서 일찌감치 중국 악무를 압도하여, 호선무와 자지무(柘枝舞. 무용수가 모자 끝에 작은 방울을 달고 돌거나 뛰면서 그 방울 소리로 악사의 반주와 화음을 맞추는 춤)가 더 상류사회의 사랑을 받았다. 무용수가 북소리에 맞춰 유연하게 허리를 돌리면 꽃잎에 빗방울이 듣듯 비단옷에 땀이 스몄으니, 서역 악무의 매력은 그야말로 끝이 없었다.

매력이 있으면 전파력이 있고 전파력이 있으면 생명력이 있게 마련이다.

당나라는 때맞춰 그런 교류와 전파의 장을 마련했으며 만족의 수요는 쌍방향이었고 수혜도 역시 쌍방향이었다. 또한 외래문화는 당나라인의 시야를 넓혀주고 정신을 풍부하게 해주었으며 당나라의 제도와 문화는 다른 민족의 지혜를 깨우쳐주었다. 그래서 당나라는 거대한 문화의 항공모함이 되었다. 각 나라와 각 민족의 사절, 상인, 승려, 유학생이 거기에서 날아올라 중국의 문명을 동아시아, 중앙아시아, 서아시아, 남아시아, 유럽, 북아프리카로 전파했다.

한 세계 제국이 그렇게 세상에 우뚝 솟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