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료학과 고고학의 결합 3

1966년 1월 13일, 구 선생은 어제의 주제인 고고학에 대해 계속 이야기했다.

고고학을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또 있다.

12) 고대의 전폐(钱币): 전국 시대 이전에는 교역이 물물교환(物物交换)으로 이루어졌다. 인류 최초의 교환은 진짜 칼과 삽(铲)으로 이루어졌고 뒤에는 작은 칼과 삽으로 바뀌었다가, 나중에 ‘돈(钱)’이 생겨났다.

전폐는 전국 시대에 출현했다. ‘전(钱)’은 곧 ‘산(铲)’인데, 이것은 농기구의 일종이다. 교환이 빈번해짐에 따라 교역이 발전하고 ‘전’이 생겨났다. 고대 전폐는 처음에는 칼과 대패 모양이었다(기록자 주: 구 선생은 말하는 한편으로 그림을 그렸다).

전국 시대 각국의 화폐는 진나라 화폐로 통일되었다.

진(秦)․한(汉) 이후로 전폐는 그 모양이 변하여 밖은 원형, 가운데는 사각형이었다. 진대의 돈은 무게가 반 냥(半两)이었고, 한대에는 5수(铢)의 중량이었다. 일 수는 한 냥의 24분의 1이다.

오수전(五铢钱)

그 후 각 왕조의 화폐는 단지 각 왕조의 연호를 주조하여 새겨 넣었을 뿐 그 모양은 변하지 않았다. 예를 들면 당대에는 ‘개원통보(开元通宝)’, 송대에는 ‘선화통보(宣和通宝)’라 했고, 모두 금속으로 만들었다. 청대 후기는 동으로 만든 전을 ‘동원(铜元)’이라 했는데, 이때의 물가가 높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돈의 수량이 너무 많을 때에는 은을 사용했다. 전국 시대 초(楚)나라는 금을 전폐로 사용했는데, 이를 ‘영원(郢爰)’이라 했다. 그 형태는 바둑판의 격자 모양과 같아서 쓸 때에는 조금씩 잘라서 쓸 수 있었다.

금은 불교에서 다량의 금불(金佛)과 금탑 등을 만들면서부터 그 수요가 많아졌고 모든 사원에서는 많은 금과 금기(金器)를 소유하고 있었다. 금탑을 만들 때에는 화상(和尙)의 뼛가루를 그 안에 넣어야 했다.

고대 중국에서는 금은 생산했지만 은(银)은 생산하지 않았다. 은은 한대에 이르러서야 사용되기 시작했다. 은의 전폐는 양(两)으로 계산했다. 은을 원보(元宝)의 형상으로 만들고 쓸 때에는 한 조각씩 잘라서 분량을 달았다. 청 광서(光緖) 연간에는 원보를 은원(银元)으로 고쳤다. ‘은원’은 멕시코로부터 들여왔으므로 ‘양원(洋元)’이라고도 불렸고, 뒤에는 중국 자체 내에서도 은원을 주조하게 되었다.

청 이후 군벌집정(军阀执政) 시기에는 자체적으로 동원(铜元)을 주조하기 위해 동폐창(铜币厂)을 열었다. 하나의 동원은 처음에는 10전이었던 것이 뒤에는 20전으로 올랐고 그 후 다시 50전, 100전으로 올랐다. 이 시기의 동원은 동쪽에서 서쪽으로 갈수록 크기가 컸는데, 이것은 이 시기의 물가가 특히 서쪽으로 갈수록 더 높았다는 사실을 나타내 준다. 이것은 모두 군벌들이 만들어낸 부정적인 결과였다.

당시 중국 동남쪽 각 성에서는 소은원(小银元)을 사용했는데, 1각(角) 짜리도 있었고, 2각 짜리도 있었다. 전의 발전 과정을 고찰함으로써 역사 발전 과정을 알 수 있다. 전의 변화를 통하여 상업, 경제의 발전 정도, 이를테면 고대 물가의 높고 낮음을 엿볼 수 있는 것이다.

교자(交子)

중국의 지폐(钞票)는 송대부터 존재하기 시작했다. 당시에는 ‘교자(交子)’, ‘회자(会子)’라 불렀으며, 송, 원, 명대 모두 지폐를 사용했다. 지폐의 유통과 사용은 통화 팽창을 불러 일으켰다.

송․원․명대에 사용한 지폐는 ‘관(贯)’이라 했는데, 1관은 1000전이었다. 마작 놀이 패 가운데 ‘일만’, ‘이만’이 있고, 색패(索牌)라는 놀이에는 ‘일천’, ‘이천’이 있다. 여기서의 ‘천’이 바로 ‘관’이다. 지폐 안의 ‘원(圆)’은 곧 통한다는 의미다. 쟝졔스가 통치하던 시기에 지폐는 불환지폐(虚本位)가 되었다. 민국 20여 년 간 그는 전국의 은원을 모두 회수하고 단지 지폐만을 남겨 마음대로 인쇄해 시중에 유통시킴에 따라, 물가가 갈수록 높아졌다(기록자 주; 각국의 지폐 중에는 금을 본위로 하는 것과 은을 본위로 하는 것이 있다. 모두 실제로 갖고 있던 금이나 은의 수량에 의거하여 지폐의 발행을 제한했다. 쟝졔스 때에는 이것이 없었다. 그것은 불환지폐였던 것이다)전폐를 고찰함으로써 경제의 변이를 알 수 있고, 그로부터 역사의 변화도 알 수 있다.

13) 책(书) : 이어서 고서(古书)에 관하여 이야기해보자. 고서를 고찰하는 것은 당연히 역사와 커다란 관계를 가지고 있다. 고서를 고찰하려면 종류별로 나누어 이야기 해야 한다.

(1) 황제의 일기

각 고대 황제의 말이나 행동, 사건들은 모두 사관(史官)이 기록했고, 황제가 죽은 후에는 다시 그것을 《실록(实录)》으로 편찬했다. 실록은 바로 황제의 일과 행동만을 기록한 것이다. 그밖에 《성훈(圣训)》이라는 것이 있는데, 이것은 전적으로 황제의 말만을 기록한 것으로, 그의 모든 글과 포고문이 실려있다. 고대 중국 황제의 《실록》과 《성훈》은 현재 베이징의 난츠쯔다졔(南池子大街)의 ‘황사성(皇史宬)’에 보관되어 있다. ‘성(宬)’이란 글자의 용례는 다른 곳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송 이전의 황제 실록은 이미 실전 되었으나, 명․청 황제들의 실록은 아직 보존되어 있다. 명대의 실록은 필사본이고 청대의 실록은 원본이다. 이것들은 모두 인쇄되어 나왔는데, 일본 사람들이 인쇄했다.

회자{會子)

24사의 각 부 사서는 모두 《실록》과 《성훈》으로부터 원 사료를 베낀 것이고, 역대로 사서를 수찬할 때에도 이 가운데서 초록했다.

이른바 《실록》에 황제의 모든 언행을 사실대로 기록할 수 없었던 것은 당연하다. 이를테면 청의 순치(顺治) 황제의 모친은 뒤에 순치의 숙부인 도르곤(多尔衮)에게 개가(改嫁)했는데, 이 일은 숙부가 형수와 결혼한 것이므로 실록에는 기록되지 않았다. 도르곤이 죽은 후에는 그를 ‘의성종황제(义成宗皇帝)’라 칭했는데, 여기서 ‘의’는 가짜라는 뜻이다.

(2) 국사관(国史馆)의 기록

각 왕조는 모두 ‘국사관’을 두어, 각 조대의 일반적인 역사적 사건과 관리에 대한 일, 외교와 내정에 관한 일을 기록했다.

옛 역사를 편찬할 때에는 다음 조대에서 앞선 조대의 국사관의 기록을 편집 기록하여 사서(史书)를 만들었다. 송사(宋史)는 원대에 편찬된 것이고, 원사는 명대에 편찬된 것이다. 다음 조대에서 앞선 조대의 사서를 편찬할 때 근거로 한 것이 바로 《실록》 《성훈》 그리고 국사관의 수많은 자료였다.

(3) 황가(皇家)에서 펴낸 책

우잉뎬(武英殿)은 황제의 서적을 편집하고 인쇄하던 곳이다. 청대에는 황제만이 책을 편찬했다. 강희(康熙) 때 시작하여 편찬된 책이 바로 《고금도서집성(古今图书集成)》이다. 이것은 이전의 책을 분류, 편찬한 유서(類书)의 일종이다.

이른바 유서라는 것은 고대 백과사전 식의 책으로 각 방면의 서적을 두루 수집하고 종류에 따라 분류하여 편집한 것이다. 이 때문에 유서라고 불렸다.

며칠 전에 얘기했던 《책부원귀(册府元龜)》 《태평어람(太平御览)》 《태평광기(太平广记)》 등의 거작은 송대의 태종(太宗)․진종(眞宗)이 신하들에게 편찬하도록 한 유서다. 명 성조(成祖)는 다시 백과사전 식의 유서 《영락대전(永樂大典)》을 편찬하도록 명했다. 《영락대전》은 모두 2만 2937권으로 당시의 고금도서 칠 팔천 종을 모은 것이다. 경(经)․사(史)․자(子)․집(集)을 포함하여 불가․도가․의약․희극(戱剧)․평화(平话)․공예기술(工艺技术)․농예(农艺)뿐만 아니라 각 방면의 저작들, 그리고 천문․지리․인륜(人伦)․정치제도․천문기견(天闻奇见) 등을 모두 수집했다. 편집할 때에는 영락 제 주두이(朱棣)가 매우 엄격히 관리를 해서 광범위하고도 엄밀하게 수집했다. 수록된 서적에 대해는 임의로 삭제하거나 수정하지 못하게 하여, 한 글자라도 원본과 대조해서 틀림이 없게 했다. 그러므로 이 대작은 실전된 비전(祕典)을 적잖이 보존하고 있다.

안타까운 것은 명대 황제들이 책을 만들고 인쇄할 의도를 갖고 있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책은 단지 필사본 한 부만 있었다. 가정(嘉靖, 1522~1566) 때에 이르러서야 불에 타서 없어질까 봐 부본(副本) 한 부를 더 필사하여, 정부본(正副本) 2부가 되었다. 명조가 멸망하자 《대전》의 정본(正本)도 따라서 없어졌다. 청대에 영국과 프랑스 연합군이 베이징을 공격했을 때, 세계 문화의 귀한 보물인 《대전》의 부본 일부가 훼손되었고 어떤 부분은 그들이 가지고 가버렸다. 현재는 약간의 잔여 부분만 남아 있을 뿐이다.

다시 대 유서인 청대의 《고금도서집성》에 대해 이야기해 보자. 《집성》은 강희 제 때 천멍레이(陈梦雷)가 편찬한 것이다. 전후 10여 년의 편찬 과정을 거쳐, 옹정(雍正) 제 때 쟝팅시(蒋廷锡)가 이 일을 맡아 마지막으로 더하고 빼고 윤색하는 과정을 거친 뒤 완성되어 출판됐다.

《집성》은 여섯 편―역상(历象)․방여(方与)․명륜(明伦)․박물(博物)․이학(理学)․경제(经济)―으로 나뉘어, 32전(典), 곧 32류로 이루어진 가장 방대한 유서로서 모두 6109부로 되어 있다. 이 책이 1만 권이라 함은 매 본 2권씩 해서 모두 1만 권이라는 것이다. 옹정 제는 그 내용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고금을 관통하고, 경사(经史)를 모아, 천문 지리 모두 그림과 기록이 있다. 아래로는 산천초목, 갖가지 제조품(百工制造), 해서비법(海西祕法)에 이르기까지 갖추지 않은 것이 없다. 실로 전적의 대관(大观)이라 하겠다.(贯穿古今, 匯合经史, 天文地理, 皆有图记. 下至山川草木, 百工制造, 海西秘法, 靡不具备. 洵为典籍之大观.)

《고금도서집성》은 수집한 서적이 다소 적긴 하지만 《영락대전》에 비하여 편집이 뛰어나고 종류별로 편찬된 것이 특징이다. 《대전》은 글자의 음운(音韵)에 의거하여 책을 나누었는데 이러한 편집 법은 좋지 않다. 하지만 《대전》에 수집된 책이 더 많아 2만 여 권에 달하고 《집성》은 1만 여 권에 이른다.

《집성》은 동활자(铜活字)로 인쇄되었지만 인쇄된 수량이 극히 적었으므로 청대에 황제에게서 이 책을 하사 받는다는 것은 대단한 영광이었다. 광서 제 때에는 외국인이 이 책을 원했지만 황제에게 남은 것이 없어 다시 석인(石印)으로 500부를 인쇄했다. 이후에 다시 상하집성도서공사(上海集成图书公司)에서 활판 인쇄한 후 일반 사람들도 구해 볼 수 있게 되었다. 활판 인쇄본은 1600본이다.

(4) 황가에서 펴낸 책 두 번째 : 《사고전서(四库全书)》

청의 건륭 제는 《사고전서(四库全书)》를 편수하도록 군왕(郡王)과 태학사(大学士)를 총재(总裁)로, 육부 상서(六部尙书)와 시랑(侍郞)을 부총재로 임명했으며 ‘사고전서관(四库全书馆)’을 열어 이 거대한 책의 편수만을 책임지도록 했다. 지샤오란(纪晓岚)은 태학사이며 한학가로 주요한 책임을 맡았다. 그 외에도 다이전(戴震), 야오나이(姚鼐, 퉁청파 고문가) 등 적지 않은 저명한 학자와 태학사 웡팡강(翁方纲) 등 360명이 편수를 담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