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당의 정국-혼혈왕조 4

4-4 장사꾼 회흘

토번이 안사의 난 이후 허점을 노려 당나라를 침입한 것과 정반대로 북방의 한 소수민족은 동란 중에도 당나라의 동맹군이 되었다. 지덕至德 2년(757), 그들은 당 숙종肅宗을 도와 서쪽 도읍 장안을 수복했고 보응寶應 원년(762)에는 또 당 대종을 도와 동쪽 도읍 낙양을 수복했다. 물론 어떤 학자는 그 부대가 사실상 용병이었으며 요구한 대가가 터무니없이 높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어쨌든 그 민족이 일찍이 크게 활약한 사실만큼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32

그렇다. 그들은 바로 회흘回紇, 즉 오늘날의 위구르Ouigours였다.

회흘은 본래 철륵의 한 갈래로서 수 양제 대업 연간에 서돌궐 니궐처라 카간의 지배에서 벗어나, 정식으로 자신들의 이름을 회흘이라고 천명했다. 또 당 덕종德宗 정원貞元 4년(788)에는 당나라에 공문을 보내 회골回鶻로 개칭했다고 알렸다. 하늘을 선회하는 송골매처럼 재빠르다는 뜻이었다.33

그렇다. 회흘은 확실히 처신이 재빨랐다.

과거의 흉노와 돌궐과 마찬가지로 회흘도 애초에 유목민족이었다. 다만 그들과 달리 중원 지역과 기본적으로 마찰 없이 잘 지냈다. 게다가 돌궐과 갖가지 복잡한 관계로 이어져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계속되는 전쟁에서 줄곧 당나라 편에 섰다. 정관 4년(630), 회흘은 당나라를 도와 동돌궐을 멸했고 현경 2년(657)에도 당나라를 도와 서돌궐을 멸했다.34

이렇게 보면 그들은 정말로 당나라의 동맹군이었다.

하지만 하늘 아래 공짜 점심이 있을 리 없다. 회흘이 당나라를 도운 것도 결코 무슨 의리 때문이 아니었다. 실제로 그들은 매번 착실히 이익을 챙겼다. 서돌궐을 멸한 뒤에는 동, 서돌궐의 땅이 회흘에게 돌아갔다. 그 후, 회흘이 후後돌궐의 통치를 전복시킬 때는 당나라도 답례로 그들을 도왔다. 이를 바탕으로 이 민족은 자신들의 칸국을 수립하고 당나라의 승인과 책봉을 얻었다.

당나라와 회흘은 서로를 이용했을 뿐이었다.

상호 이용의 법칙은, 가게가 세면 손님을 무시하고 손님이 세면 가게를 무시하는 것이다. 당나라가 기울어 두 도읍을 잃었을 때 값을 부를 자격을 가진 쪽은 회흘이었다. 명색이 각 민족 백성의 천카간이었던 당나라 황제는 울분을 참고 양보할 수밖에 없었다.

영국寧國공주는 그렇게 해서 회흘의 카간에게 시집을 갔다.

문성공주가 종실의 여성에 불과했던 것과 달리 영국공주는 당 숙종이 가장 아끼던 막내딸이었다. 그녀가 떠나기 전, 황제는 친히 환송연을 베풀었다. 부녀는 이별을 아쉬워했고 연회장에는 생이별의 처량한 분위기가 가득했다. 마지막에 공주는 눈물을 머금고 부황을 위로했다.

“나라의 안위를 위해서라면 저는 죽음도 거절하지 않을 거예요!”

숙종은 눈물을 주르르 흘렸다.

그런데 회흘의 카간은 과거의 송첸감포처럼 그렇게 예의바르지도, 은혜에 감사하지도 않았다. 국경을 넘어 마중을 나가지도 않았을 뿐더러, 오히려 황포와 오랑캐 모자 차림으로 군막 안에 거들먹거리며 앉아서 공주를 호송해온 한중왕漢中王 이우李瑀 일행을 맞았다.

카간이 물었다.

“왕야王爺는 천카간과 어떤 관계요?”

이우는 답했다.

“대당 천자의 사촌동생이오.”
“왕야 윗자리에 서 있는 사람은 누구요?”
“궁중 환관이외다.”

카간이 소리쳤다.

“환관은 노예인데 어찌 왕야 위에 있을 수 있는가?”

그 환관은 놀라서 뒤로 물러섰다.

카간이 또 말했다.

“당신들은 본 카간을 보고도 어찌 절을 하지 않는가?”

이우가 답했다.

“영국공주는 대당 천자의 친딸이시고 카간은 대당 천자의 사위인데 어찌 침상에 높이 앉아 은혜를 받으려는 거요?”

회흘의 카간은 그제야 일어나서 황제의 조서를 받았다.35

그러나 이우는 단지 당나라의 체면을 만회했을 뿐이었다. 회흘은 실리에 있어서는 조금도 양보하지 않았다. 정사의 기록을 보면 그때의 약정에 따라 당 제국은 매년 회흘의 용병 부대에 사례비로만 무려 비단 2만 필을 지급해야 했다. 여기에는 그들이 약탈하고, 갈취하고, 각종 명목으로 추가한 것은 포함되지 않았다.36

탐욕스러운 회흘은 강제로 사고 파는 행위까지 했다. 말 한 필에 비단 수십 필을 달라고 했다. 한 번은 자기들 멋대로 말 2만 필을 당나라로 몰고 가서 값으로 비단 50만 필을 불렀다. 당나라는 그렇게 많은 말이 필요 없었을 뿐더러 그렇게 많은 비단을 내놓기도 힘들었다. 결국 반복되는 교섭 끝에 절반 가격으로 거래가 성사되었다.

회흘은 무엇 때문에 그렇게 많은 비단을 갈취한 것일까?

절호의 기회와 지리적 이점을 이용해 큰돈을 벌기 위해서였다. 그들이 당나라로부터 갈취한 비단은 일부만 회흘 귀족의 사치품이 되었고 대부분은 회흘 상인과 소그드 상인의 손을 거쳐 서양으로 흘러 들어갔다. 그 비단은 심지어 페르시아의 은화와 당나라의 동전처럼 당시 상업무역의 통화 역할까지 했다.37

그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동양과 서양, 두 세계를 연결시킨 그 상업무역 통로가 실크로드라고 불렸던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하물며 비단은 휴대하기도 쉽고 가격도 높은데다 서양인들이 앞 다퉈 갖고 싶어 해서 신속히 되넘겨 팔면 당연히 큰돈이 되었다.

회흘 칸국은 재원이 풍부했다.

이와 동시에 이 민족의 사회적 성격에도 변화가 생겼다. 많은 회흘인들이 유목에서 정착과 상업으로 나아가 ‘유목 도시생활’을 영위하기 시작했다. 칸국의 전성기에 오르콘강(鄂爾渾河. 지금의 몽골 영토 안에 위치) 상류에 위치한 그들의 왕궁은 휘황찬란했고 성 안에는 전각과 사원들이 빽빽이 늘어서 있었으며 그 사이로 각국의 상인과 승려들이 돌아다녔다.

그중 가장 사람들의 눈길을 끈 것은 분명 마니교의 법사였다.

마니교(Manichaeism)는 서기 3세기 페르시아에서 일어난 오래된 종교로서 그 교의는 간단히 말해, 빛이 결국에는 어둠과 싸워 이긴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명교明敎라고도 불렸다. 이 종교는 대략 서기 6세기부터 7세기까지 육로로 서역에 전해졌고 또 서역을 통해 회흘에 전해졌다. 회흘인은 금세 자신들이 믿던 샤머니즘을 버리고 마니교를 국교로 삼았다.

왜 그렇게 된 것일까?

정사의 해석에 의하면 포교를 위해 막북(漠北. 고비사막 이북의 광대한 사막 지역)으로 들어간 마니교 법사 고팔두高八斗의 뛰어난 언변에 회흘의 카간과 귀족들이 감복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하지만 왜 마니교가 다른 지역보다 회흘에 더 큰 영향을 끼쳤을까? 설마 다른 지역의 선교사들은 전부 일자무식에 말주변이 없었단 말인가?39

확실히 위의 견해는 신빙성이 부족하다.

반증으로 중원의 태도를 살펴보자. 전체적으로 당나라의 황제와 유생들은 마니교를 안 좋아했다. 개원 20년(732), 당 현종이 금지령을 내리기도 했다. 그러다가 회흘이 당나라를 도운 공을 인정해 대력 3년(763), 비로소 당 대종이 마니교의 사원 건립을 허가하고 대운광명사大雲光明寺의 편액을 하사했다. 그러나 회흘 칸국이 망하자마자 마니교는 다시 금지된 사교邪敎가 되었다.40

그러면 마니교는 중원에서는 왜 냉대를 받았을까?

원인은 당연히 많았다. 그중 하나는 마니교 법사가 별로 마음이 깨끗해 보이지도, 욕심이 적어 보이지도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장안에 들어온 후, 그들이 가장 좋아한 일은 시장에 출몰하며 상인들과 어울리고 간통을 일삼은 것이었으니 전혀 출가인답지 않았다.41

그러나 중국 사대부들이 반감을 느낀 이유는 아마도 회흘이 좋아하는 종교였기 때문일 것이다. 그 민족은 장사꾼의 머리를 타고났는지 자신들의 자그마한 부락을 방대한 칸국으로 키워냈고 또 국제적인 성격의 유목 무역도시까지 건설했다. 그 바람에 장안에도 한바탕 상업의 열풍이 불어 닥쳤다.42

알고 보면 회흘은 마니교와 죽이 맞을 만했다. 왜냐하면 마니교가 발생한 페르시아는 본래 상업 제국으로서 오랫동안 실크로드에서 중간상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아마도 마니교 법사는 회흘에서 포교를 할 때 장사의 요령도 설파해 그들의 비위를 맞췄을 것이다.

나중에 회흘은 독특한 운명을 맞이했다.

당 무종武宗 개성開成 5년(840), 이미 회골로 이름을 바꾼 그들의 칸국은 갑작스러운 습격을 당해 멸망을 고했다. 그러나 나라를 잃은 회골인들은 유목 시대로 돌아가지 않고 세 갈래로 나뉘어 계속 전진했다. 그중 일부는 남하하여 중국의 농경문명에 동화되었고 일부는 지금의 간쑤甘肅로 들어가 감주甘州 회골과 사주沙州 회골이 되었으며 더 많은 이들은 지금의 신장으로 이주해 서역의 동족同族 원주민들과 함께 서주西州 회골이나 천산天山 회골을 형성했다.

그것은 한 민족의 재탄생이었다. 그 전에 그들은 이미 유목민족에서 상업민족으로 화려하게 변모한 적이 있었다. 그 후에는 또 이렇게 중국 서북쪽에 정착해 위구족裕固族과 위구르족의 선조 또는 선조 중 하나가 되었다.43

서쪽으로 이주한 회골은 종교도 바꿨다. 간쑤 남부의 위구족은 라마교 겔루크파(황교黃敎)를 믿었고 신장의 회골은 서기 10세기에 건립된 카라한 왕조 시기에 대대적으로 이슬람교를 받아들였다. 그것은 사실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초기 이슬람은 아라비아 반도의 베두인족이 창조한 유목 상업문명이었기 때문에 그들과 맞아 떨어지는 점이 있었다.

다만 그것은 훗날의 이야기일 뿐이다.

투르판 베제클리크 천불동의 벽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