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당의 정국-혼혈왕조 3

4-3 토번의 부상

고창이 망하고 그 이듬해에 문성文成공주가 청장靑藏고원(지금의 티베트고원)에 들어갔다.

청장고원은 평균 해발고도가 4천 미터 이상인 세계의 지붕이며 세상 사람의 눈이 닿지 않는 신비한 세계이다. 그곳에는 히말라야가 우뚝 솟아 있고 브라마푸트라 강이 쉬지 않고 흐르고 있으며 남쵸 호수와 암드록쵸 호수가 맑은 물을 자랑한다. 언젠가 카르장꽃이 온 산에 가득 피었을 때, 한 민족과 왕조가 야룽강 골짜기에서 발흥했다.23

그들의 이름은 토번이었다.24

토번 왕조는 대략 당나라와 같은 시기에 건립되었다. 서기 7세기 초, 왕조의 건립자는 무력으로 고대 강족羌族의 소비(蘇毗. 지금의 티베트 북부와 칭하이성靑海省 서남부에 있었다)와 양동(羊同. 상웅象雄이라고도 하며 지금의 티베트 북부에 있었다)의 여러 부락을 정복하고 자신의 도읍을 라싸로 옮겼다. 이로써 한 신기한 왕국이 눈 덮인 고원에 우뚝 솟았다.

도읍을 옮긴 사람은 송첸감포松贊干布였다.

송첸감포의 신분은 찬보贊普, 즉 토번왕이었다. 토번어에서 찬은 강하다, 보는 사나이, 감포는 속이 깊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송첸은 그의 이름이었다. 그래서 ‘송첸감포 찬보’라는 전체 명칭을 번역하면 “속 깊은 송첸, 강한 사나이, 토번 백성의 왕”이었다.26

이 사람은 토번 역사의 진정한 창조자였다. 사실 그가 나타나기 전까지는 이 민족의 존재조차 아는 사람이 드물었다. 그렇다. 사나운 돌궐, 우아한 구자, 가까운 고구려, 멀리 있는 페르시아는 각기 중국인의 주의를 끈 적이 있었다. 하지만 토번은? 미안하지만 금시초문이었다.

그런데 송첸감포가 금세 세상 사람의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사건은 구혼에서 시작되었다. 우리는 한 고조 때부터 중국 제국에 ‘화친和親’의 전통이 있었다는 것을 알고 있다. 당 태종은 즉위 후 이 정책을 더 확대하여 이민족 추장들에게 부지기수로 공주와 종실 여자들을 시집보냈다. 그 용감한 돌궐 왕자 아사나사이도 이세민의 여동생을 아내로 맞았다. 이 일을 전해 듣고 송첸감포는 자기도 그런 영예를 누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불행히도 당 태종은 토번의 전투력과 침략성을 과소평가했다. 경솔하게도 송첸감포의 청을 거절했을 뿐만 아니라 송첸감포의 사자에게 냉대를 당했다는 인상을 주었다. 속 깊은 송첸은 당나라에 본때를 보여주기로 마음먹었다. 단지 그의 창끝은 토욕혼吐谷渾에게 겨눠졌다.

그 일은 의미심장했다.

토욕혼은 선비족 모용부慕容部의 나라로 지금의 칭하이와 간쑤 남부 그리고 쓰촨 북부 일대에 있었으며 서진 시대에 세워졌다. 토욕혼이 세워진 뒤, 중국은 끝없는 전란에 휩싸였다. 하지만 이 왕국은 폭풍의 중심에서 멀리 떨어진 채 여러 강대한 세력의 틈바구니에서 용케도 당나라 정관 연간까지 살아남았다.

그러면 송첸감포는 왜 토욕혼을 치려 했을까?

표면적으로는 토번 사자의 말 때문이었다. 그 사자는 라싸로 돌아와 송첸감포에게 눈물로 호소했다.

“당나라는 본래 신 등을 융숭히 대접했습니다. 그런데 토욕혼의 사절단이 도착하자마자 대접이 바뀌었고 승낙했던 혼사도 허사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일이 그렇게 단순했을까?

당연히 그렇지 않았다.

시간표를 보면 금세 알 수 있다. 토번이 토욕혼을 향해 출병한 것은 정관 11년 또는 12년이었다. 그리고 그 전인 정관 9년(635), 당나라는 이미 전쟁을 통해 토욕혼을 기미정책의 허수아비로 만들어 놓은 상태였다. 따라서 토번의 그 출병은 만만한 상대를 치려는 것이면서 개를 때려 그 주인에게 보여주기 위한 것이었다.

더 중요한 것은 차이다무 분지에서 서역으로 통하는 주요 교통로가 토욕혼 안에 있어서 당나라조차 오래 군침을 흘려왔다는 사실이었다. 더군다나 토욕혼에는 같은 토번인이 많이 살았다. 그래서 토번은 언젠가 손을 쓸 참이었다. 그들이 결국 서기 663년에 토욕혼을 멸한 것이 그 증거이다. 이번에는 그저 시험 삼아 나섰을 뿐이었다.

그렇게 일석삼조의 효과를 노린 것을 보면 송첸감포는 확실히 속이 깊은 인물이었다.

진즉에 당나라의 속국이 된 토욕혼은 아예 토번의 적수가 되지 못했다. 낭패하여 지금의 칭하이성 북쪽까지 달아났다. 송첸감포는 기세를 몰아 토욕혼 옆의 두 강족 부락, 당항黨項과 백란白蘭을 또 손쉽게 차지했다.

안타깝게도 당나라는 아직 정신을 못 차린 듯했다.

할 수 없이 예비 사위는 미래의 장인을 향해 전쟁을 선언했다. 정관 12년(638), 송첸감포는 둔병(屯兵. 변경에 머무르며 평상시에는 농사를 짓는 군사) 20만 명을 거느리고 당나라 국경의 송주(松州. 지금의 쓰촨성 아바阿壩 장족藏族 자치주)를 침범해 공주를 맞으러 왔다며 큰소리를 쳤다. 이 구혼자는 심지어 공주를 못 만나면 후한 예물을 갖고 계속 진군해 자신의 성의를 표시할 수밖에 없다고 선언했다.

이번에는 당 태종도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으며 무거운 대가를 치르고서야 송첸감포를 국경 밖으로 몰아냈다. 하지만 이제는 당 제국의 황제도 그 무시무시한 이웃을 절대 얕잡아봐서는 안 된다는 것을 똑똑히 인식했다. 그래서 송첸감포가 다시 구혼을 해왔을 때 당 태종은 즉시 승낙을 했다. 비록 시집보낼 여자가 자신의 친딸은 아니었지만 말이다.

송첸감포도 태종의 체면을 세워주었다. 자신의 오른팔인 대재상 록동찬(祿東贊. 까르 동찬)을 장안으로 파견해 많은 돈과 선물로 대당의 공주에 대한 사모의 마음을 표시했다. 똑똑하고 유능했던 록동찬도 사명을 욕되게 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제국의 군신과 교섭을 진행했다. 그 결과, 태종은 록동찬을 다시 보고 황족의 딸을 아내로 주겠다고 했다.27

록동찬은 황제의 ‘원플러스원’ 제안을 예의바르게 거절하며 말했다.

“신은 본국에 이미 본처가 있습니다. 부모님이 짝지어준 사람을 어찌 내치겠습니까? 하물며 우리 찬보께서 아직 공주님을 뵙지 못했는데 신하가 어찌 한 발 앞서 가겠습니까?”

이 말을 듣고 황제는 갸륵한 마음이 드는 동시에 그를 포섭하려는 생각이 더 굳어졌다. 그래서 우격다짐으로 자기 손위 누이의 외손녀를 록동찬에게 시집보냈다. 그것은 제국이 시행해온 화친의 역사에서 전례 없는 일이었을 것이다.

송첸감포의 혼사는 당연히 더 문제될 게 없었다.

정관 15년(641) 정월, 문성공주가 토번에 들어갔다.

혼례는 성대하고 화려하게 치러졌다. 당나라에서는 예부상서를 사절로 파견해 공주를 호송하고 혼례를 주재하게 했고 송첸감포는 라싸에서 오늘날의 칭하이성 지역으로 건너가 자기가 병탄한 토욕혼의 옛 땅에서 친히 신부를 맞이했다. 그는 심지어 라싸에 문성공주를 위한 궁전까지 새로 지었으며 자기는 당나라의 복식으로 갈아입어 대당 황제의 사위로서의 면모를 갖췄다.28

지금 돌아보면 그때 쓴 돈은 확실히 그만한 값어치를 했다.

실제로 당나라와 토번의 그 통혼은 두 나라 백성들에게 적어도 20년간의 평화를 가져다주었고 두 군주도 각자 바쁜 일에 집중할 수 있었다. 태종은 성공적으로 서돌궐의 침범을 저지하고 서역 각국을 수중에 넣었으며, 송첸감포는 확장과 정복의 사업을 끝까지 밀어붙이고 때맞춰 인도인들을 혼쭐을 냈다.

더 중요한 것은 문화교류였다.

기록에 따르면 문성공주가 토번에 들어갔을 때 석가모니 불상과 진귀한 보물, 당나라 복식과 가구, 요리 식자재 등을 혼수로 가져갔을 뿐만 아니라, 시서예악, 의료 기구, 농기구, 육종 등에 정통한 학자와 악사, 의사, 토목기술자까지 데려갔다고 한다. 그들은 그야말로 방대한 문화대표단 겸 기술지원단이었다.29

송첸감포도 당나라에 유학생을 파견했다. 그들은 대부분 토번의 왕족과 추장의 자제였다. 하지만 송첸감포는 당나라에만 전적으로 기울지 않고 다른 여러 나라와 균형을 유지했다. 네팔의 공주도 아내로 맞이했고 인도에서도 문화를 도입했다. 게다가 바로 송첸감포의 시대에 그 지혜로운 민족은 자신들의 문자를 창조했다.30

토번은 평화롭게 일어섰지만 결코 무력을 배제하지는 않았다.
의심의 여지없이 어떤 일이든 양면성이 있게 마련이며 이웃의 강대함은 당나라로서는 꼭 좋은 소식은 아니었다. 게다가 토번의 후계자는 송첸감포만큼 말이 잘 통하는 인물이 아니었다. 당 고종 함형咸亨 원년(670), 토번은 서돌궐과 손을 잡고 대대적으로 당나라를 공격해 우전, 소륵, 구자를 차례로 함락시켰다. 이로써 안서사진이 폐기되어 당 태종이 확보한 자산이 송두리째 날아가고 말았다.

토번은 목적을 달성했지만 그래도 멈추지 않았다. 거꾸로 안사의 난 때, 또 승세를 타고 대종代宗 광덕廣德 원년(763) 장안을 점령하는 한편, 지금의 간쑤성 일대의 농우隴右, 하서河西 등의 지역을 수중에 넣었다. 그 후에는 또 투르판 등의 전략적 요충지까지 점령하고 돈황을 60년이나 자기 치하에 두었다.

강성해진 토번은 끝내 당나라의 두통거리가 되었다.

결국 당나라와 토번 간의 회담이 2차례 열렸고 한자와 티베트 문자로 적힌 평화 기념비도 그때 세워져 지금까지 라싸시에 남아 있다. 하지만 당시 당나라와 토번은 모두 내리막길에 접어든 상태였다. 서기 9세기 중엽, 당나라 황제는 환관의 손에 놀아나는 허수아비로 전락했고 토번 왕조는 내란으로 사분오열되어 완전히 해체되면서 과거의 번영은 전부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았다.

카르장꽃이 졌다. 언제 다시 필지 기약도 없이.

<松赞干布迎娶文成公主图>, 출처 Baid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