되살아나는 홍콩의 ‘천안문 트라우마’

지난달 27일 홍콩 위안랑 지역에서 백색테러 사건(7월21일 발생)에 항의하는 시위대가 행진을 하고 있다. 앞서 엿새 전인 21일 흰 옷을 입은 100명의 남자들이 위안랑 전철 안에서 범죄인 인도 법안에 반대하는 시위를 마치고 귀가하던 시민들을 향해 흉기를 휘둘러 45명이 부상을 당했다. 홍콩/EPA 연합뉴스

지난 6월에서 7월로 이어졌던 홍콩의 ‘범죄인 인도조례 반대’ 시위 열기가 식지 않고 계속 뜨거워지고 있다. 캐리 람 행정장관은 7월9일 기자회견을 통해 이 법안이 “수명을 다했다”(壽終正寢)고 했다. 하지만 홍콩인들은 이 표현이 법안의 공식적인 철회가 아닌 아주 모호한 것으로 여긴다. 이에 이들은 “철회하지 않는다면 해산하지 않는다”(不撤不散)는 구호를 외치며 시위를 지속하고 있다.

시위 초반부터 계속 한발 늦게 대응하고 있는 홍콩 행정당국의 조치들은 민의에 전혀 부합하지 못하고 있으며, 최루탄과 고무탄 사용 등 폭력적인 시위 진압으로 더 많은 분노를 불러일으키고 있다. 시위의 장기화는 홍콩 사회 내부의 갈등으로 이어져 친정부 시위대와 반송중(反送中: 범죄인 중국 송환 반대) 시위대 사이의 충돌도 격화하고 있다. 심지어 7월21일에는 흰 셔츠를 입은 일군의 집단이 검은 셔츠를 입은 반송중 시위대에 무차별적으로 폭력을 휘두르는 일명 백색테러 사건이 벌어지기도 했다.중국 당국도 초반의 침묵과 관망에서 벗어나 강하게 자신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지난달 29일 베이징의 국무원 홍콩·마카오 사무판공실은 1997년 홍콩 반환 이후 처음으로 기자회견을 열었다. 양광 대변인은 “홍콩의 시위가 일국양제(하나의 국가, 두개의 체제)의 마지노선을 건드렸다”고 하는 동시에, 현재 시위를 폭력과 불법으로 규정하면서 엄정한 법집행을 요구했다. 군 투입 가능성에 대한 질문에도 주둔군법과 홍콩기본법의 관련 조항을 언급하며 그 가능성을 부정하지 않았다. 그가 언급한 홍콩기본법 18조에는 “홍콩특별행정구 정부가 통제할 수 없는 국가의 통일 또는 안전을 위해하는 동란이 발생하여 긴급 상황이 발생하였다고 결정되는 경우 중앙인민정부가 관련 전국성 법률을 홍콩특별행정구에 실시할 수 있다”는 조항이 있다. 이 조항은 중국 당국이 군을 투입할 수 있는 근거가 되는 법률이라고 할 수 있다. 심지어 지난 1일에는 홍콩 주둔 중국인민해방군 쪽에서 건군기념일을 맞아 공식 에스엔에스(SNS) 계정에 올린 영상에 대테러 및 폭동 진압 훈련 장면이 들어 있었다. 많은 전문가가 현 사태에 인민해방군의 개입 가능성은 낮다고 전망해왔지만, 중국 당국의 이러한 움직임은 상당한 우려를 불러일으킨다.

홍콩인에게 특별한 ‘천안문 비극’

광범위한 대중시위에 군 투입 가능성이 논의되는 것은 중국 현대사의 가장 큰 비극 중 하나인 1989년 천안문 사건을 자동적으로 떠올리게 한다. 마침 올해는 천안문 사건 30주기이기도 하다. 당시 중국 당국이 저항자들을 굳이 총과 탱크로 강력하게 유혈진압한 것은 이를 트라우마로 남겨놓아 다시는 당의 권위에 도전하면 안 된다는 강력한 신호를 보낸 것으로도 볼 수 있다. 경제적인 자유와 번영은 허락하지만 당의 지배적 통치를 위협하는 정치적 반대는 절대 허용하지 않겠다는 뜻이다.

어떤 면에서 홍콩은 천안문 사건의 트라우마가 가장 짙게 드리운 곳이기도 하다. 1989년 당시에도 세계 어떤 지역보다 가장 적극적으로 연대 시위를 조직하여 100만명이 넘는 인파가 모여 천안문 광장의 사람들을 지지한 곳이 홍콩이며, 그 이후 매년 6월4일 빅토리아 광장에서 대규모 촛불 추모행사를 열어왔다. 세계에서 유일하게 민간의 힘으로 천안문 기념관이 조성되어 있고, 관련한 자료집이나 서적을 지속적으로 출판하는 곳도 바로 홍콩이다.

홍콩인들이 이렇듯 적극적으로 천안문 사건을 지속적으로 환기하는 이유는 중국으로 홍콩 반환이 결정된 이후 벌어진 천안문 사건이 단순히 중국인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는, 자신들도 그 상황에 이를 수 있다는 공포와 불안을 느꼈기 때문이다. 실제로 천안문 사건 이후 일국양제를 약속한 중국 공산당에 신뢰를 잃어버리고 이민을 가버린 홍콩인도 많았다. 당시 홍콩인들에게 영국은 기댈 수 없고 중국은 믿을 수 없는 대상이었다. 여전히 천안문 사건이 금기와 검열의 대상인 중국 대륙과 달리 홍콩에서는 여러 사회세력이 좀 더 적극적으로 그 사건에 재평가를 시도하기도 한다.

그중에서 친중국 성향의 평가를 살펴보면, 당시 운동을 두 단계로 나눠서 평가한다. 처음에는 후야오방의 사망 이후 학생들의 평화적인 청원과 정부 정책의 개선을 희망한 단계였지만, 나중에 몇몇 소수 급진파의 불순한 선동으로 인해 평화적인 운동이 색깔혁명으로 변질되고 정권의 전복을 도모하는 단계로 변했다고 본다. 그렇기에 중국의 안정적인 발전을 위하여 유혈진압은 불가피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평가는 현재 홍콩 반송중 시위에 대한 홍콩 행정당국이나 중국 당국의 평가와 비교해 어떤 기시감을 불러일으킨다. 중국 당국은 범죄인 인도 조례의 통과와 관련해 일정하게 양보했으니 이제는 홍콩인들이 시위를 멈추고 일상으로 돌아가야 하는데 현재 시위에서 나타나는 일부 양태들은 도가 지나쳐 좌시할 수 없다는 뜻을 분명히 하고 있다. 7월1일 입법회 점거 당시 영국 식민지 시기의 홍콩기가 의사당에 걸렸던 것, 일부 시위대가 미국의 성조기를 들고 나온 것, 홍콩특별행정구와 중국의 국가 휘장 등 중요한 상징물을 훼손한 것 등은 중국을 크게 자극했다. 일부 시위대의 이런 행위는 중국에 색깔혁명의 시도로 여겨졌다.

지난달 27일 홍콩 위안랑 지역에서 한 시위자가 곤봉을 휘두르는 경찰을 피해 도망치고 있다. 이날 시위는 엿새 전 발생한 백색테러 사건에 대한 항의를 표시하기 위해 열렸다. 홍콩/AP 연합뉴스

‘민주주의 없는 자본주의’ 지속

중국에 지금과 같은 상황은 매우 곤혹스럽다. 중국은 홍콩이 중국 내 다른 지역에 비해 많은 권리를 누리고 있다고 보는데 도리어 많은 홍콩 사람이 지난 150여년 동안 한번도 제대로 된 정치 참여를 보장한 적이 없던 영국 식민지 시기를 민주와 자유를 누렸던 시기로 기억하는 것이 억울한 것이다.

일반 중국인들도 지금의 상황이 당혹스러운 것은 마찬가지다. 극소수에 불과하지만 반(反)중국을 외치며 홍콩 독립을 요구하는 일부 시위 참여자들의 주장은 오랜 고난의 시기를 거쳐 겨우 회복하기 시작한 중화의 민족적 자존심을 훼손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게다가 홍콩 시위의 일부 참여 단체 중에서는 중국인에 대한 인종차별주의와 혐오 발언도 심심찮게 나온다. 심지어 광둥어나 영어를 구사할 수 없는 사람을 시민권에서 제외하거나 중국 대륙에서 넘어온 이민자들이 홍콩에서 기본혜택을 누리지 못하게 하자는 주장이 나오기도 한다. 비록 소수라 하더라도 이런 주장들은 두 지역 간 감정의 골을 깊게 만들고 있다.

홍콩도 할 말이 많다. 홍콩 사람들이 볼 때 덩샤오핑이 약속했던 일국양제는 처음 약속대로 지켜지지 않고 있다. 홍콩은 중국이라는 국가로 귀속되지만 홍콩의 자유와 법치, 경제 제도는 50년간 보장한다는 일국양제의 원칙은 물론이고, 홍콩은 홍콩인들이 통치한다는 ‘항인치항’(港人治港)과 국방과 외교를 제외한 분야에서는 자율권을 행사할 수 있다는 ‘고도자치’(高度自治)의 약속도 상당히 변질되었다. 중국은 시진핑 집권 이후인 2014년에 발표된 ‘홍콩특별행정구의 일국양제 실천’이라는 백서에서 홍콩의 관할권은 중국 중앙정부가 전면적으로 보유하며, 일국양제의 ‘양제’와 ‘일국’을 동등한 가치로 간주해서는 안 되고, ‘양제’는 ‘일국’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새로 규정했다. 정치 영역뿐만 아니라 사회정책에서도 중국식 애국교육이 강화되는 등 중국화 정책이 가속화되고 경제적으로도 중국 의존이 심화되는 가운데 홍콩인들의 중국에 대한 감정은 매우 복잡하고 다층적으로 변해갔으며, 반중정서도 심화되었다.

홍콩의 역사를 회고해보면, 영국 식민지 시기의 홍콩은 ‘민주주의 없는 자본주의’라고 할 수 있다. 당시 홍콩인들의 정치적 권리는 매우 제한되어 있었으며, 참정의 권리는 일부 성공한 자본가들에게만 주어졌다. 언론의 자유는 비교적 폭넓게 누렸을지 몰라도 198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결사나 집회의 자유도 제한적이었다. 1980년대 들어 홍콩의 중국 반환이 결정된 이후에야 영국 당국의 시혜로 일부 권리가 주어졌을 뿐이었다. 물론 이 과정에서 비록 세력은 약했지만 홍콩의 민주 인사들과 사회운동 세력이 기층 민중을 대표하여 많은 노력을 기울였음은 분명하다. 이들은 중국으로의 반환 과정에서 더 많은 민주적 권리를 얻어내고자 중국 당국과도 상당히 접촉을 시도했다. 하지만 이후 협상 과정에서 이들은 배제되었고 중국 당국이 손을 잡은 것은 친중 인사들과 홍콩의 대자본가들이었다.

결국 중국으로의 반환 이후에도 홍콩에 남은 것은 다시 ‘민주주의 없는 자본주의’였다. 비록 홍콩은 식민 시기를 청산하고 모국으로 돌아갔지만, 이미 중국은 천안문 사건 이후 1990년대부터 중국 대륙에 중국 특색의 신자유주의 정책을 도입하고 있었으며, 지구적 자본주의 체제에 깊숙이 편입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홍콩의 자본가들은 충성의 대상을 영국 식민정부에서 중국 공산당으로 바꿔나갔고, 대륙에 적극적으로 진출했다. 본래 심각했던 홍콩의 빈부격차와 주택 문제, 부동산 투기 등의 문제가 개선되기는커녕 더 심각해졌고, 여기에 청년실업 문제도 겹쳐지고 있다.

중국의 구심력 대 홍콩의 원심력

이런 홍콩의 정치경제적 상황은 식민과 탈식민, 냉전과 탈냉전, 민족주의와 포퓰리즘의 강화 등 여러 지역적, 세계적 정세의 변화와 맞물려 복잡하게 요동하고 있다. 게다가 중국은 시진핑 집권 이후, 중앙과 당으로의 강도 높은 권력 집중을 통해 국제적, 국내적 위기 요소를 극복하려고 시도한다. 이 과정에서 구심력을 강화하려는 중국과 그에 대응해 역시 강해지는 주변지역의 원심력 속에서 긴장과 갈등은 격화되고 있다.

그러나 1989년 천안문 광장의 비극이 홍콩의 애드미럴티역이나 빅토리아 광장에서 반복될 가능성은 낮다. 만에 하나 군이 개입하게 되더라도 당시와 같은 유혈진압에 나설 가능성은 희박하다. 위구르나 티베트와 달리, 전세계의 관심이 집중돼 있는 홍콩에 대해서는 극단적으로 억압적인 조치를 취하기 쉽지 않다. 책임있는 강대국, 인류운명공동체 등의 슬로건을 제시하며 나름 글로벌 소프트파워를 키워나가려는 중국으로서는 그동안 자신이 쌓아온 것을 일거에 무너뜨리는 리스크를 감당하기 어려울 것이다.

다만 역사의 트라우마를 환기시키는 동시에 더 이상의 요구는 절대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중국 당국의 강경한 자세는 홍콩 사람들에게 더 깊은 불안과 절망을 가져다줄 것이다. 2014년 우산운동 당시 많은 활동가가 체포되고 억압되었지만 2019년 홍콩의 기층 사회와 젊은 세대의 역량이 더 크게 회복된 것을 보면, 향후 베이징과 홍콩의 갈등은 당분간 지속될 가능성이 크다.

2019. 8.3(토) 한겨레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