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당의 정국-관료정치 2

3-2 삼성육부

간단히 말해 삼성육부는 수와 당, 두 왕조의 중앙정부였다. 그중 삼성三省은 중서성中書省, 문하성門下省, 상서성尙書省을, 육부六部는 상서성 밑의 6개 직능 부서인 이부吏部, 호부戶部, 예부禮部, 병부兵部, 형부刑部, 공부工部를 뜻했다. 이 제도는 의미가 컸고 그 영향이 역사적이면서도 세계적이었다. 현재 중국 중앙정부의 부서도 여전히 부라고 하며 일본은 성이라고 한다.

그러면 성은 무엇일까?

성은 본래 후궁後宮을 가리켰다. 위진과 수당 시기, 왕조의 중추적인 건축물 중 가장 앞(남쪽 끝)에 있는 것은 황성皇城이었으며 태묘太廟, 사직社稷, 관서官署, 아문衙門이 있었다. 가운데는 궁성宮城이고 황제가 군신들을 만나는 장소였다. 그리고 가장 뒤(북쪽 끝)가 후궁이었다. 황제와 후비들의 내밀한 공간으로서 특별한 허락 없이는 들어갈 수가 없어 금禁 혹은 금중禁中이라 불렸다. 서한 원제元帝 때 황후 부친의 이름과 겹치는 것을 피하기 위해 금을 성으로 바꿨고 이때부터 금과 성이 다 통용되어 금이라 하기도 하고, 성이라 하기도 하고, 금중禁中이라 하기도 하고, 성중省中이라 하기도 했다.

확실히 성은 본래 정부와는 거리가 멀었다.

금성禁省이 정부기구가 된 것은 한 무제 때문이었다. 그 사람은 재상의 손에서 권력을 빼앗고 관료정치를 황권정치로 바꾸기 위해 ‘일국양부一國兩府’의 정치체제를 발명했다. 궁 밖에는 재상이 우두머리인 ‘외조外朝’를, 궁 안에는 대사마大司馬가 이끄는 ‘내조內朝’를 조직하고 내, 외조가 함께 조정을 관리하게 했다(󰡔이중톈 중국사 8: 한무의 제국󰡕을 참고).

의심의 여지없이 그것은 이원적 체계였다.

이원적 체계는 그 전에도 있기는 했다. 한나라 초, 황제와 재상은 서로 명확히 일을 나누었다. 황제는 국가의 원수였고 재상은 정부의 수뇌였다. 재상이 있는 곳은 부(府. 상부相府)였고 기구는 조曹였으며 황제가 있는 곳은 궁(황궁)이었고 기구는 상尙이었다. 상에는 상의尙衣, 상식尙食, 상관尙冠, 상석尙席, 상욕尙浴, 상서尙書, 이렇게 6상이 있었는데 기본적으로 황제의 생활을 관리해서 상부의 13조와 부딪칠 일이 없었다.

그런데 한 무제가 이 제도를 폐지했다. 한편으로 그는 조정에서 수완가를 선발해 상서 직을 맡겨서 정무를 처리하게 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대사마를 임명해 업무를 주관하고 비밀 모의에 참여하게 했다(대사마는 서한 때는 ‘영상서사領尙書事’라 불렸고 동한 때는 ‘녹상서사錄尙書事’라 불렸다). 그 결과, 자연스럽게 대사마와 상서의 의견이 국가 정책으로 변했으며 상서도 비서 그룹에서 정책결정 그룹으로, 상부는 거꾸로 정책결정 기구에서 집행 기구로 변했다.

일국양부는 이때부터 출현했고 상서의 지위도 이때부터 변했다.

그런데 대사마가 ‘앞장서서’(領) ‘상서의 일’(尙書事)을 주재하는 것은 정규적이지 않았고 영상서사, 녹상서사도 정식 관직명이 아니었다. 아무래도 이렇게 임시방편으로 제도를 대신하는 것은 장기적인 대책이 될 수 없었다. 그래서 동한의 광무제光武帝는 아예 상서대尙書臺를 세웠는데 이것은 대각臺閣이라고도 불렸다. 이때부터 상서는 더 이상 궁정의 비서나 임시 사무장이 아니라 정식 국가 요직이 되었다.

상서의 일(사무)이 상서대(기관)로 변한 뒤로 일국양부는 제도가 되었다. 하지만 한 나라에 정부가 두 개인데 어떻게 일을 처리했을까? 아주 간단했다. 재상이 관직을 보류하고 정무를 대각으로 넘겼다. 바꿔 말해 삼공三公이 이끄는 상부는 유명무실했고 상서가 이끄는 대각이야말로 진정한 중추 기구였다.

그래서 조위曹魏 황초黃初 3년(222), 상서대는 궁 밖으로 이전해 정식으로 중앙정부가 되었다. 서진 또는 유송劉宋 말이 돼서는 또 상서성尙書省으로 변했다. 그러면 상서대는 왜 상서성으로 이름이 바뀐 것일까? 왜냐하면 상서대의 별칭인 대각에서 대臺와 각閣은 다 황가의 건물로서 대는 금성禁省 내에, 각은 궁성 가운데에 있었기 때문에 대각은 대성臺省이라고도 불렸다. 그래서 대가 성으로 바뀐 것은 그저 호칭이 바뀐 것에 불과했다.

중서성의 내력도 비슷하다.

한 무제는 상서로 하여금 조정 일에 관여하게 하면서 상서가 하던 문서 보관과 수발 업무를 어쩔 수 없이 다른 사람에게 넘겼다. 그 사람이 바로 중서였다. 그런데 ‘상서의 일’을 이끌고 주재하는 대사마가 실질적인 재상이 된 후로 권력이 강해지자 황제는 또 참을 수 없게 되었다. 그래서 한 선제宣帝 유순劉詢은 증조부인 무제의 수법을 본받아 중서로 하여금 상서를 대체시켜 대사마의 실권을 빼앗았다.

당시 대사마를 맡고 있던 외척은 당연히 이 조치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래서 한 성제成帝 건시建始 4년(BC 29), 그들은 다시 상서대로부터 권력을 빼앗아왔다. 조위 때에 와서는 상서대가 궁 밖으로 이전한 뒤, 궁 안에 비서처와 자기 사람을 안 둘 수가 없었기 때문에 위 문제 조비는 바로 비서령祕書令을 중서령中書令으로 이름을 바꾸고 궁 안에 관서를 설치했다. 그 이름은 ‘중서감中書監’이었으며 서진 이후에는 ‘중서성’이라 불렸다.

그 결과, 어떻게 되었을까?

과거의 사례와 똑같았다. 궁성 안의 중서성이 점차 궁성 밖의 상서성을 대신해 정책결정 기관이 되었다. 당시 사람들은 그것을 ‘봉황지鳳凰池’라고 불렀다. 어떤 관리가 만약 중서령에서 상서령이 되면 겉으로는 영전한 것 같아도 실제로는 좌천당한 것으로 여겨졌다.

중서성이 사실상의 재상부가 되는 것도 당연히 여의치 않았다. 이번에는 문하성이 대두되었다. 문하성의 전신은 시중사侍中寺로서 한때 동사東寺, 서사西寺와 함께 ‘금중삼사禁中三寺’라 일컬어졌고 동한 말기에 시중성侍中省으로 이름이 바뀌어 조위 때는 또 산기성散騎省과 함께 ‘금중이성禁中二省’이라 불렸다. 이어서 동진 애제哀帝 때 두 성을 합병한 것이 바로 ‘문하성’이다.

문하성의 본래 업무는 주로 황제의 일상 사무를 챙기는 것이었다. 그런데 궁정에 설치되어 황제 곁에 있으면서 황제의 일에 관해 모르는 게 없었으므로 또 새로운 정부의 대체자가 되었다. 북조의 문하성 장관은 한층 더 실질적인 재상 역할을 했다.

이것이 바로 삼성의 내력이다. 그 중요성은 일정한 원칙 없이 전적으로 황제의 의사에 좌우되었다. 하지만 대체적으로는 동한 때는 상서성을, 남조 때는 중서성을, 북조 때는 문하성을 중시했다. 그리고 수당 때에 와서 삼성이 같이 중시되어 함께 중앙정부가 되었다. 호칭은 또 한나라 때 상서대의 예가 답습되어 대각 혹은 대성이라 불렸다. 당 고종 때는 상서성을 중대中臺, 문하성을 동대東臺, 중서성을 서대西臺라 불렀다.

물론 문하성은 그때 이미 궁 밖으로 나간 상태였다.

궁 밖으로 나간 삼성은 정립鼎立하여 세력 균형을 이루었다. 중서성과 문하성은 마주보고 있었는데 문하성은 동쪽에, 중서성은 서쪽에 있었고 합쳐서 양성兩省 혹은 북성北省이라고 불렸다. 승천문承天門 큰길에 위치한 상서성은 중서성, 문하성의 남쪽에 있었으므로 남성南省 혹은 남궁南宮이라고 불렸다.

삼성 중에서 상서성의 등급이 가장 높아서 장관인 상서령이 정이품, 차관인 좌복야左僕射, 우복야右僕射가 종이품이었다. 이는 당연히 상서성이 가장 일찍 대두했고 관여하는 일도 가장 많았으며 수나라에 이르기까지 계속 모든 것을 장악한 기관이었기 때문이다. 고경과 양소는 좌, 우복야의 신분으로 수나라의 재상이 되었다.

상서성은 규모도 가장 커서 아래에 6부部 24사司를 두었다. 그중에서 이부吏部는 관리들을 관할해서 조직부나 인사부에 해당했고, 호부는 재정을 관할해서 재무부 겸 상무부에 해당했고, 예부는 제사와 교육을 관할해서 문화부 겸 교육부에 해당했고, 병부는 군정을 관할해서 국방부에 해당했고, 형부는 형벌과 법률을 관할하여 공안부와 사법부에 해당했고, 공부는 공사를 관할하여 건설교통부와 농업부에 해당했다.

6부의 장관은 모두 상서라 불렸고 정삼품이었다. 차관은 또 모두 시랑侍郞이라 불렸으며 정사품이었다(이부시랑은 정사품상正四品上이었다). 각 부 밑에는 다시 4개의 사가 있고 사의 책임자는 다 종오품상의 낭중郞中이었으며 부책임자는 다 종육품상의 원외랑員外郞이었다. 그 밑은 주사主事로서 종구품상이었다. 6부 24사는 각 부의 제1사가 곧 본사本司였다. 예를 들어 이부의 제1사는 이부사吏部司, 호부의 제1사는 호부사戶部司였다.

상서성에는 또 종합사무동이 있었는데 그 이름은 도성都省 혹은 도당都堂이었다. 각 부의 사무동은 부당部堂이라 불렸다. 6부의 상서와 시랑은 매일 오전마다 도당에 모여 회의를 했고 오후에는 자기 부로 돌아가 일을 보았다. 만약 상서가 국무회의에 출석해야 하면 시랑이 업무를 주관했다.7

확실히 그것은 정교하고 엄밀한 체계였고, 그래서 수당부터 명청까지 기본적으로 변함없이 유지되었다. 6부의 숫자, 부의 명칭, 구조, 직능, 직함까지 바뀐 게 없었으며 바뀐 것은 관직의 등급과 권력뿐이었다. 간단히 말해 관직의 등급은 청나라 때 가장 높았고 권력은 명나라 때 가장 강했는데 이에 대해서는 나중에 논할 것이다.8

명청, 양대에 육부가 권력이 강하고 지위가 높았던 것은 수당과 송원, 네 왕조를 거치며 육부의 효과적인 행정제도가 검증되었을 뿐만 아니라, 주원장이 재상 제도를 폐지한 후로는 더 이상 중간의 프로세스가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육부가 황제 직속으로 함께 중앙정부를 구성했으므로 당연히 수당의 육부와는 함께 논의되기 힘들다.

하지만 명청, 양대에도 명의상으로 재상이 없었을 뿐이었다. 명나라의 내각內閣과 청나라의 군기軍機가 사실 명의가 없는, 이것도 저것도 아닌 반쪽짜리 재상이었다. 그것은 당연히 황권정치의 승리를 뜻했지만 그 승리는 대가를 치러야 했고 그 대가는 바로 제국 제도의 철저한 멸망이었다.

수 문제와 당 태종은 물론 그 점을 생각하지 못했다. 신흥 세력의 대변인으로서 그들이 해야 했던 일은 제도를 개혁하고 역사를 창조하는 것이었다. 실제로 그들은 그 일을 했고, 게다가 아주 잘 해냈다. 합리적이고 성공적인 제도 설계 덕분에 그들은 세계적인 문명을 창조해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면 수당 정치 개혁의 요점은 무엇이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