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종교 약사

1966년 1월 20일, 구졔강 선생이 중국 종교 약사에 대해 이야기했다.

오늘 아침식사 후, 구 선생은 중국의 종교사에 대해 말했다. 이것은 일찍이 내가 부탁했던 제목이었으므로 나는 매우 흥미롭게 경청했다.

중국의 종교로 말하자면, 진정으로 중국에서 자생하여 성장한 것은 오직 도교(道敎)뿐이라고 할 수 있다. 기타 다른 종교는 모두 외국에서 전래된 것들이다.

종교는 아주 옛날로 거슬러 올라가서 그 기원을 찾아 볼 수 있다. 옛 사람들은 미신을 극히 신봉했으므로 무당이나 무속이 매우 성행했다. 무당의 권력은 매우 컸다. 왜 그랬을까? 고대의 사람들은 바람․비․번개․천둥 같은 수많은 자연 현상에 관해 무지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다만 그러한 것에 대해 신비하게만 느꼈고 그것들을 해석할 방법 또한 없었으며 더욱이 그것에 대한 두려움까지 느꼈다. 그리고 대자연과 부딪히면 사람의 힘이 부족함을 느껴서, 스스로 하지 못하는 일은 천신(天神)의 힘을 빌려 해결하고자 했다.

상대(商代)의 왕은 두 가지 모습을 가지고 있었다. 하나는 무현(巫贤)이고 다른 하나는 무함(巫咸)이었다. 이 두 사람은 아마 성(姓)이 무(巫)였던 것이 아니라 대대로 무였을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상대의 왕과 사람들은 모두 미신을 믿었음을 알 수 있다.

공자의 시대와 그 이후에는 무(巫)의 지위가 하강하기 시작했다. 공자가 비로소 성인이 될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이 때문이었다.

伏羲舉日

‘무(诬)’ 자는 무슨 뜻일까? 무당의 말, 즉 무의 허황된 소리다. 고대의 종교는 ‘토템(totem)’을 숭배한 것이었다. 토템은 외국어다. 고대의 사회는 씨족 사회로부터 시작되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토템 신앙을 가지게 되었다. 이것은 가장 이른 시기의 신이며 실제로는 동물․식물․태양․광물, 즉 동․식물도 신이라는 말이다. 이것을 그림으로 나타낸 것도 있는데 상고 시대의 사람들은 그들의 선조가 하나의 토템에서 나온 것으로 믿었다.

아마도 중국의 용(龍)과 바람(风)은 모두 토템일 것이다. 《좌전(左传)》에서는 ‘태호는 용을 제사 지냈고, 소호는 바람을 제사 지냈다(太昊以龍为祭 少昊以风祭)’고 말하고 있다. 태호나 소호는 모두 왕이다. 여기에서는 고대의 왕이 용이나 바람을 제사 지냈음을 기록하고 있다.

상대에는 조상에 대한 숭배가 가장 성행했다. 이 때의 조상 숭배는 토템을 숭배하던 것과 비교하면 일보 진전된 것이다. 조상에게 제사 지낼 때 300마리의 소를 사용했던 것으로 보아 제사를 매우 성대하게 지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그들이 숭배하고 제사 지내야 할 첫 번째 조상은 토템이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상대에는 또한 상제(上帝)가 있다고 믿었으며 하늘에서 제일 높은 신이 천상의 많은 신과 지상의 많은 사람들을 관리할 수 있다고 믿었다. 다시 말해 이때에는 당대의 왕은 하느님이 인간 세상으로 보낸 대표라고 믿었으며, 그랬기 때문에 왕은 권력이 더욱 커졌다.

이후에는 산․강․나무․돌 등에 대한 사람들의 숭배가 발전하여 이들에게도 모두 신이 있다고 믿기에 이르렀다. 산신(山神)․수신(水神)․대수신(大树神) 등이 그러한 것들이다. 《산해경(山海经)》에는 이런 신들이 많이 기록되어 있으며 각지의 산과 강의 신들도 많이 실려 있다. 어떤 신은 선하므로 사람이 보면 복이 오고, 또 어떤 신은 악하므로 화를 얻게 된다고 했다. 즉 신을 선신(善神)과 악신(恶神)으로 구별지었던 것이다.

이를테면 쓰촨(四川) 지방의 싼샤(三峡)에서는 배가 자주 침몰했기 때문에 산신이자 여신인 ‘우산신녀(巫山神女)’가 나왔다. 사람들이 배를 타고 이곳을 지나가려면 이 여자 산신에게 제사를 지내고 무사히 건너가기를 간구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또 하나 수신(水神)이 있는데 그것은 ‘샹쥔(湘君)’과 ‘샹푸런(湘夫人)’이다. 한번은 진시황(秦始皇)이 둥팅호(洞庭湖)로 가는 길에 갑자기 폭풍우를 만났다. 진시황은 박사(博士)에게 그것이 무슨 신이냐고 물었다. 박사는 그것이 ‘샹쥔(湘君)’의 신으로, 원래 요(尧) 임금의 딸이자 순(舜) 임금의 부인이었다고 대답했다. 이 사실을 들은 진시황은 매우 분노하여 나무들을 모두 베어 버리라고 명했다.

옛 큰 강들 중에서 가장 두려운 것은 황허(黄河)였다. 그래서 전국 시대(战国时代) 위(魏)에서는 젊은 여자를 제물로 바쳐 그것에 제사를 지냈다. 강의 신은 ‘하백(河伯)’이라고 했는데, 그 하백으로 하여금 젊은 여자를 부인으로 삼게 한 것이었다.

어떤 고사에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시먼바오(西门豹)라는 사람이 예현[邺悬 : 지금의 허베이 린장현(临漳悬)]에서 현령을 지냈다. 도임 후, 그는 그곳에 무척이나 골치 아픈 일이 있다는 백성들의 얘기를 듣게 되었다. 그것은 황허가 자주 범람하기 때문에, 현의 관리나 향관(乡官)과 무파(巫婆)들이 많은 돈을 들여 하백을 위해 부인을 맞게 하는데, 매번 그 날이 되면 일반 백성 집안의 아리따운 소녀를 억지로 강물에 던져 넣었다는 것이었다. 시먼바오는 백성을 위해 이 문제를 처리하려고 했다. 어느 날 그는 하백이 부인을 맞이하는 장소로 갔다. 그는 무당이 처녀를 강 속에 집어넣으려는 것을 보고 이렇게 말했다. “이 여인은 보기가 싫으니, 네 스스로 강 속으로 들어가 하백에게 다른 여인으로 바꾸려 한다고 보고하도록 해라.”

그리고는 무당을 강물 속으로 던져 버렸다. 이를 본 다른 사람들은 겁이 나서 다시는 하백에게 부인을 바치는 일을 하지 않게 되었다. 이것은 위나라, 전국 시대의 일이다. 진대(秦代)에도 이런 풍습이 있어, 심지어 공주까지도 황허에 바쳤다. 이것은 《사기(史记)》에서 찾아 볼 수 있는 이야기다.

이러한 모든 일들은 옛날 사람들이 자연의 신에 대한 미신을 갖고 있었다는 사실을 설명해주고 있는 것이다.

전국 시대에는 선인(仙人)에 대한 숭배가 있었으니, 선(仙)은 곧 초인(超人)을 뜻한다. 제 왕(齐王)․연 왕(燕王)은 모두 선인이 되고 싶어 했다. 그들은 또한 장생불사(长生不死)할 수 있는 약을 얻고 싶어 했다. 진시황․한 무제(汉武帝) 등은 이 장생불사할 수 있는 약을 구하라는 명을 사람들에게 내렸다. 어떤 사람이, 동방에는 펑라이(蓬莱), 팡장(方丈), 잉저우(瀛州) 등 신산(神山)이 세 곳 있는데 그곳에는 선인들이 살고 있으며, 장생불로할 수 있는 약을 구할 수 있다고 말했다. 진시황은 쉬푸(徐巿)로 하여금 500명의 어린 남자아이와 여자아이를 데리고 동해의 외국으로 가서 그 신비로운 약을 구해 오도록 했다. 그러나 그들은 결국 돌아오지 않았다.

이 시대의 미신에는 다시 새로운 형식이 생겼다.

불교(佛敎)는 동한(东汉) 초년 명제(明帝) 때 중국에 전래되었다. 불교는 세계 3대 종교 중 하나로 옛 인도의 왕자 싯달타가 세운 것이다. 뒤에 그는 ‘석가모니(释迦牟尼)’라고 불렸는데, 이 칭호는 석가족(释迦族)의 성인이라는 뜻으로, 인도 왕자의 진짜 이름이 아니라 하나의 존칭일 뿐이다.

우선 한대에 불교가 들어왔다. 동한 명제 때 인도로 사람을 보내어 인도인을 청해 중국에 와서 불교를 전파하도록 했다. 사신은 차이인(蔡愔)과 두 명의 인도인이었는데, 백마(白马)에 불경과 석가모니의 불상을 싣고 뤄양성(洛阳城)에 도착했다. 그 후 조정에서는 뤄양에 중국의 첫 번째 불사(佛寺)인 백마사(白马寺)를 세웠다.

白馬寺

불교는 금욕주의로, 소식(素食)과 독신을 중요하게 여겼다. 자신의 현재의 생은 즐기지 아니하며 지금 이 생의 고통을 내세의 향수(享受)와 바꾸는 것이다. 이것은 선인과 다르다. 선인은 그와 반대로 향락주의적이며 장생불사를 강구했다. 앞에서 이미 언급했지만 선(仙)을 구하기 시작한 것은 전국 시대부터였다.

한 왕조 이후에는 전쟁이 자주 일어나 매우 혼란스러운 세상이 계속되었다. 그로 인해 백성들의 생활이 어려워져 많은 사람들이 현세의 고통을 내세의 행복과 바꾸고 싶어했다. 그로 인해 불교는 더욱 성행했다. 이때의 통치자들은 불교를 숭배하자고 제의했다. 왜냐하면 불교의 도리에 의하면 인간이 살아 생전 얼마나 큰 고통을 겪고, 얼마나 궁한 생활을 하고 얼마나 모욕을 받고 살든 참고 견뎌내기만 하면 다음 생에는 좋은 세상을 맞는다고 했기 때문이다. 불교에는 ‘생사윤회(生死輪回)’ ‘인과응보(因果应报)’라는 두 가지 설이 있는데, 사람은 누구나 성불(成佛)할 수 있고, ‘깨닫는 순간 부처가 될 수 있다(顿悟成佛)’고 여겼다.

이러한 불교의 도리는 황제의 통치에 도움이 되었다. 남조(南朝)의 송 문제(文帝)는 “백성들이 모두 불교에 귀의한다면 내가 아무 일도 하지 않고 태평스러움을 얻게 되니 더 이상 무슨 일이 있겠는가”라고 말했다.

그래서 남북조의 통치자들은 불교를 적극 제창했고 그로 인해 불교 신앙이 크게 성행했다. 이를테면 양(梁) 무제(武帝)는 불교를 국교로 정하고 그 자신도 몇 차례 절에 가서 스님이 되기도 했다. 그때마다 신하들은 많은 돈을 가지고 가서 양 무제를 다시 모셔왔다고 한다.

남조의 송(宋) 명제(明帝), 진(陈) 후주(后主)는 모두 스님을 존경하고 숭배했으며, 북조(北朝) 전진(前秦)의 푸졘(符坚), 후진(后秦)의 야오싱(姚兴), 북위(北魏)의 문성제(文成帝) 등도 모두 불법을 숭상했다. 그만큼 불교를 적극적으로 제창하고 지지했던 것이다.

남조 양 무제 때는 난징(南京) 한 곳만 해도 사원이 480개나 있었으며, 비구니와 스님은 10만 여 명이 있었다. 남방에 있는 사원의 웅장함은 왕궁과 비슷했다고 한다.

북위는 불사(佛事)를 일으키는 데 더욱 힘을 쏟았으며, 10만 근의 동(铜)과 600근의 황금을 들여 천궁사(天宫寺)의 불상을 만들었다. 또 23년 간 80만 명의 인부가 동원되어 뤄양의 룽먼석굴(龍门石窟) 석불(石佛)을 만들었다. 북위 때 건설된 사원만도 3만여 개나 되며 승려와 비구니도 약 2백만 명이 되었다. 이렇듯 남, 북조 시대에 황제, 재상, 관리들이 불교를 흥성 시킨 결과, 이때부터 불교는 중국의 남방과 북방에 널리 퍼져 발전하기 시작했다.

龍門石窟

이제 도교에 대해 말해 보자. 도교는 원래 중국의 각종 미신의 결합체다. 이것이 모여서 도교를 형성하게 되었는데, 이는 불교와 대립하기 위한 것이었다. 불교가 먼저 들어왔고 도교는 나중에 생겨났다. 도교는 동한(东汉) 말기에 생성되었고 불교는 앞서 말한 것과 같이 동한 초기에 전래되었던 것이다.

도교는 중국에서 생겨나 성장한 종교로서 토템․상제․조상․산천(山川) 등을 숭배했다. 그러므로 분산되어 있던 중국 각 민족의 미신을 한 군데 모은 총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도교는 노자(老子)가 시조다. 하지만 《노자(老子)》라는 책에는 미신이 없다. 노자는 이미 한 문제(文帝)․경제(景帝) 때부터 숭배되었다. 그때는 다만 ‘청정무위(淸净无为)’만을 바라고 있었다. 도교를 세운 사람은 장다오링(张道陵) 혹은 장링(张陵)이라는 동한 시대 말년의 사람이다. 그는 쓰촨성(四川省) 다이현(大邑县) 허밍산(鹤鸣山)에서 수도했기 때문에 허밍산인(鹤鸣山人)이라고 불렸다.

삼국(三国)시대에 산시성(陕西省) 한중(汉中) 사람인 장루(张鲁)라는 이가 있었는데, 그는 ‘오두미도(五斗米道)’를 세워 사람들의 병을 치료해 주었다. 오두미도라는 이름은 병을 치료할 때마다 다섯 말의 쌀을 주어야 했기 때문에 생긴 것이었다. 이 오두미도는 한중(汉中)과 쓰촨(四川)의 여러 지방에 전파되기 시작했다. 또한 장줴(张角)라는 사람이 태평도(太平道)를 만들어 북방의 산둥(山东)․허난(河南)․허베이(河北) 등지에 널리 퍼뜨렸다. 한 말에 황건(黄巾)을 두르고 난을 일으킨 황건적의 난도 초기에 세워진 도교를 이용한 것이다. 한편 장루 자신도 한중왕(汉中王)이라고 불렸다.

도교에서도 경전을 만들었는데, 《노자화호경(老子化胡经)》이라고 했다. ‘화호(化胡)’라는 말은 오랑캐(胡)들을 감화시킨다는 뜻이니, 여기에서 호는 옛 인도를 가리킨다. 그러므로 노자가 인도인을 감화시킨다는 뜻이다. 이 경전에서는 노자가 출관하여 인도로 가서 인도인 석가씨와 도를 논한다. 그 뒤 인도에 불교가 생겨났으니 중국의 도교가 먼저라는 것이다. 이에 불교도들은 몹시 분노하여, 제왕들은 언제나 이 도교 경전을 금지해야 했다. 지금은 이 경전이 이미 온전하게 남아 있지 않지만, 둔황(敦煌)의 모가오굴(莫高窟)에는 완전히 갖추어진 한 편의 도교 경전이 보전되어 있다.

도교가 건립된 후 많은 농민들이 반란을 일으켰는데, 그것은 모두 도교와 관련된 것이었다. 다만 ‘적미기의(赤眉起义)’만은 그것과 무관한 듯하다.

그 뒤 도교에는 많은 변화가 있었다. 거훙(葛洪)․커우쳰즈(寇谦之)같은 사람들은 도교 본래의 취지를 바꾸고 수정했다. 진인(晋人) 거훙은 유교와 도교를 합쳐서 《포박자(抱朴子)》라는 경서를 만들었고 고대의 양생(养生)․연년(延年) 등의 묘법을 정리했다. 북조의 숭산 도사(嵩山道士) 커우쳰즈(寇谦之)는 장루(张鲁)의 비법을 배워 ‘몸을 수련하고 약을 만들어 장생의 술수를 배우라’고 선전했다. 그리고 단을 쌓아 예배를 드린다든가 의관 의식과 같은 형식을 제정하기도 했다.

도교는 ‘날개가 생기고 신선이 되어 하늘로 올라감(羽化成仙)’, 또는 ‘장생불로(长生不老)’ 등을 주장했으며, 유가의 ‘부귀는 하늘에 있고 생사는 오직 운명에 달려 있다(富贵在天 生死由命)’, 그리고 불교의 ‘큰 죄를 지은 자는 다시 태어날 때 벌레나 가축이 된다(若有罪重之者 转生虫畜)’라는 생사윤회설(生死輪回说) 등을 한데 뒤섞었다. 그래서 한편으로는 깨끗한 마음으로 도를 닦고, 단약을 복용하며 수련하면서도 생사가 명에 달려 있고, 내세를 갈구했으니, 허황된 선경선계(仙境仙界)와 장생불사(长生不死)를 희망했던 것이다. 뤼춘양(呂纯阳) 등의 ‘팔선(八仙)’은 본래 당대(唐代)의 인물들로 모두 도교에 귀의했다.

또한 당대(唐代)에는 옛 페르시아에서 중국으로 전해져 온 배화교(拜火敎)라는 것이 있었다. 이 종교의 경서는 지금 남아 있지 않지만 둔황불굴(敦煌佛窟)에 그 일부가 보존되어 있다.

배화교는 ‘화천교(火祆敎)’라고도 한다. 천(祆)은 곧 선(仙)이니, 화천은 곧 화선(火仙)을 말한다. 말하자면 불을 숭배하고 믿었던 것이다. 또한 배화교에서는 밝게 빛나는 것을 숭상했다. 그러므로 ‘명교(明敎)’라고도 한다. 오늘날에도 푸졘(福建)의 취안저우(泉州) 지역에는 아직도 명교의 유물과 유적지가 남아 있다. 취안저우는 수, 당(隋唐) 때 아주 번창하여 마치 지금의 상하이(上海)와 같았다. 명조(明朝)를 ‘명(明)’이라고 하는 것은 이 명교와 관계가 있다. 주위안장(朱元璋)이 난을 일으켰을 때 그 가운데 적지 않은 사람들이 본래 명교를 믿었기 때문에 국호를 ‘명(明)’이라고 했던 것이다.

이제 이슬람교에 대해 말해 보자.

大秦景敎流行中国碑

이슬람교는 아라비아에서 건너왔으며 당대(唐代)에 중국으로 들어왔다. 그것은 우선 중국의 서쪽 일대에서 시작하여 내륙 지방에까지 전래되었다. 먼저 전파시키기 시작한 것은 서북의 위구르인(回纥人)들이었다. 그래서 중국에서는 그것을 ‘회교(回敎)’라고 불렀다. 회교는 서북의 각 지역에서 아주 번성했고 그 후 다시 윈난(云南)에 이르렀다.

회교 중에는 팔대문환(八大门宦)이 있었는데 그것은 곧 여덟 파(派)로 나뉘어 서로 대립하는 것을 말한다. 회교는 회족과 그 뜻이 다르다. 회족은 종족 명이고 회교는 종교인 것이다. 회족은 용맹함을 숭상했는데, 그들에게는 원수와 악인 일곱 명을 죽이면 천당에 들어간다는 설이 있었다.

청조(淸朝)의 통치자는 회족을 맹렬히 죽여 그들의 원한을 사게 되었다. 회교 내부에서는 비록 팔대문환이 서로 대립하고 있었지만, 청조에 대항하여 싸운 것은 모두 마찬가지였다. 청조 때 서북의 회교 성행 구역에서는 5년에 한 번씩 소란(小乱)이 일어났고 30년에 한 번씩 대란(大乱)이 있었는데, 이것은 청조의 통치자가 회족을 죽였기 때문이었다. 당시 서북에는 ‘백골탑(白骨塔)’과 ‘만인총(万人冢)’이 도처에 산재해 있었다.

이제 기독교(基督敎)에 대해 말해 보자.

기독교는 당대(唐代)에 ‘경교(景敎)’라고도 불렸는데, 이것은 기독교의 한 파였다. 현재 시안(西安)에 있는 석비(石碑)에는 ‘대진(大秦)의 경교가 중국에서 유행하다(大秦景敎流行中国碑)’라고 씌어져 있다. 여기서 말하는 ‘대진(大秦)’은 한대인(汉代人)들이 말하는 로마다. 명대(明代) 말년에는 이탈리아인 마테오 리치(Matteo Ricci)가 중국에 와서 기독교를 전파했다. 그는 우선 광둥(广东)에 도착한 후 난징(南京)으로 갔는데 거기서 쉬광치(徐光啓)를 알게 되었다. 쉬광치는 명조 때 예부상서(禮部尙书), 태학사(大学士)를 지냈으며 위대한 과학자이기도 했다.

마테오 리치는 기독교를 전파하기 위해서 먼저 중국의 학자와 관리들을 사귀었다. 그는 쉬광치와 서방의 과학을 이야기했고 서방의 과학 서적을 공동으로 번역하기도 했다. 그에게 있어서 이것은 기독교를 전파하기 위함이요, 쉬광치로서는 서방과학을 소개받기 위함이었다. 그들은 《기하원본(几何塬本)》을 번역했는데, 이것은 서방의 수학이 중국에 처음으로 소개된 것이었다. 그 후 쉬광치는 《구고의(句股义)》와 《고산기석(古算器释)》 등의 수학 서적을 번역했고 그로 인해 중국의 주산법은 필산법으로 바뀌었다.

마테오 리치와 같이 온 다른 사람들은 중국의 리즈짜오(李之藻)와 함께 서양의 논리학 서적인 《명리탐(明理探)》이라는 책을 번역했다. 그럼으로써 중국에는 명대에 이미 서양의 과학이 전해져 들어오게 된 것이다. 다만 청조 강희(康熙) 제 때 이상한 현상이 나타났다. 강희 제 자신은 서방 과학을 연구하면서도 민간에 과학 지식이 전해지는 것은 허락하지 않았다. 강희 제는 황제로서 이미 중국 학문뿐만 아니라 일부 서양 과학을 이해하고 있었다

다시 기독교에 대한 얘기로 돌아가자. 명조 최후의 황제인 숭정제(崇祯帝)의 계승자 영력(永歷) 제는 천주교(天主敎)를 믿었으며 그의 모친 역시 천주교를 믿었다. 기독교가 중국 민간에 전파되기 시작한 것은 청 말 아편전쟁 이후였다. 이때 비로소 서양인들은 교회의 건립을 강행했고, 지방의 토호와 탐관오리들은 서양인의 세력을 빌려 교회당으로 백성들을 압박했다. 가난한 사람들도 기독교를 믿었는데, 그것은 교회당에서 쌀을 주었기 때문이었다. 이런 상황이 기독교가 점점 발전하도록 만들었다. 허베이성(河北省)에는 이런 민가(民歌)가 있었다.

왜 세례를 받나, 여덟 말의 쌀을 얻기 위함이지

왜 기독교를 믿나, 여덟 꾸러미의 돈을 얻기 위함이지

(为什麽受洗, 为了八斗米. 为什麽信敎, 为了钱八吊)

세례를 받는 것은 기독교의 입교 의식(入敎仪式)의 하나다. 그래서 기독교는 ‘먹여주는 종교(吃敎)’라는 말이 생기게 되었다. 이것이 곧 가난한 사람들이 기독교를 믿게 된 원인이었다.

이제 라마교(喇嘛敎)․홍교(红敎)․황교(黄敎)에 대해 알아보자.

앞에서 이미 언급했지만 불교는 외국에서 전해져 들어온 것으로 나중에 중국에서 새로운 요소를 가미함으로써 변화가 생겼다.

불교는 중국에 전해진 후에 두 파로 나뉘었다. 하나는 ‘정토종(净土宗)’, 즉 불경을 염송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선종(禅宗)’으로 중국의 노장 사상을 끌어들여 사상 체계를 세운 것인데, 변론에 뛰어났다. 때때로 사람들이 그들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면 승려들은 사람들을 한 차례 때렸는데, 이것을 ‘당두봉갈(当头棒喝)’이라고 한다. 즉 이것은 스스로 깨닫게 한 것이었다. 불교가 이러한 두 파로 나뉘어진 것은 당대(唐代)에서부터다.

중국의 변경 지방에는 라마교가 있었고, 당대(唐代)에 불교가 티벳에 전해져 티벳 현지에 본래부터 있던 ‘흑교(黑敎)’와 혼합되어 ‘홍교’가 성립되었다. 뒤에 홍교는 또다시 ‘황교’로 변했다. 황교는 명대 초 티벳인 총카파(宗喀巴)가 세운 것이다. 그는 전장(前藏)에 있던 달라이(达赖)와 후장(后藏)에 있던 판첸(班禅), 그리고 몽골(蒙古)에 있던 저부쭌단바(哲布尊丹巴)라는 세 명의 제자를 데리고 있었다. 티벳어로 황교의 스님을 일컬어 ‘라마(喇嘛)’라고 했다. 그래서 한인(汉人)이 황교를 칭할 때는 라마교라고 했던 것이다. 그렇지만 황교 신봉자들은 스스로 불교라 칭했다.

이 종교에는 ‘환희불(欢喜佛)’이 있는데, 모두 인간이 짐승과 서로 교접하는 불상이다. 이것은 티벳인들이 옛부터 믿어 오던 사실로서 인간은 인간이 낳는 것이 아니라 짐승과 교합하여 생겨난 것이라는 말이다. 이것은 옛 토템 숭배의 잔류다.

홍교에서는 스님의 결혼이 허락되었으나, 황교에서는 허용되지 않았다. 홍교는 명대 이후부터 점차 사라진 반면에 황교는 점점 더 성행했다.

라마교는 정치와 종교를 하나로 합친 것이다. 라마교는 종교․정부․군대․사법 등의 4대 대권(四大大权)을 포괄하고 있으며, 이 4대 권력이 하나로 합쳐져 있다. 라마교가 성행하는 곳에서 어린 아이는 어느 정도 나이가 들면 라마가 되어야 했다. 마치 나이가 들면 공부를 하는 것과 같아서 한 집에 두 아이가 있으면 한 명은 라마가 되어야 했다. 만약 한 집에 세 아이가 있으면 두 명의 아이를 보내 라마가 되게 했다. 물론 라마는 결혼이 허락되지 않기 때문에 이렇게 되면 이 지역의 종족 보존에 영향을 받게 된다.

이 외에도 칭하이(靑海) 등지에는 ‘백교(白敎)’, ‘화교(花敎)’ 등이 있었다. 이런 종교들은 라마교와는 다르긴 하지만 모두 라마교의 지류에 속하는 것들이다.

중국 종교의 간략한 상황에 대해는 이 정도로 이야기하도록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