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당의 정국-수 양제 5

1-5 대운하

대운하는 수 양제의 길이 남을 걸작이다.

오늘날에는 고속열차를 타고 항저우에서 북쪽으로 6시간만 달리면 베이징에 도착하므로 그 당시의 남북 대운하가 떠오를 일이 별로 없다. 교통이 불편했던 시대에 제국의 대동맥으로서 대운하가 얼마나 특별한 의미가 있었는지 아는 사람이 거의 없다. 돛을 펴고 멀리 운행하던 그 배들에는 곡식과 비단뿐만 아니라 한 민족의 오랜 소망이 실려 있었다.

그 소망은 바로 남북의 소통이었다.

잘 알려진 대로 지형적인 원인으로 중국의 주요 하천은 모두 서쪽에서 동쪽으로 흐른다. 그래서 황하 유역에서 장강 유역으로의 물자의 교환과 문화의 교류는 육로로 진행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수레와 말로는 배를 당해낼 수 없었다. 비용이 낮고 효율이 높은 선박 수송이야말로 고대사회의 운송업에서 가장 나은 선택이었다.

운하의 개통은 꼭 필요한 일이었다.

그래서 춘추시대에는 장강과 회하를 잇는 한구邗溝가, 전국시대에는 회하와 황하를 잇는 홍구鴻溝가 개통되었고 또 진나라 때는 단도곡아丹徒曲阿가, 수 문제 때는 산양독山陽瀆이 개통되었다. 산양독이 개통된 이듬해에 수 문제는 진陳나라를 멸하기 위한 전쟁을 일으켰다. 그런데 8로路로 나뉜 그의 대군 중 단지 1로만 산양독을 이용하였고 이 때문에 그가 운하와 관련해 병사와 식량의 운송뿐만 아니라 더 원대한 계획과 구상을 갖고 있어서 그랬다고 생각하는 학자도 있다.38

그 구상은 수 양제가 완성해야만 했다.

실제로 그는 그 구상을 단순히 완성했을 뿐만 아니라 순식간에 다 이루었다. 대업 원년에 통제거 공사를 시작해 대업 6년 강남하江南河를 개통함으로써 남쪽의 여항(余杭. 지금의 항저우)부터 북쪽의 탁군(涿郡. 지금의 베이징)까지 해하海河, 황하, 회하, 장강, 전당강, 이 5대 수계를 관통하는 전체 길이 4천여 리의 운하를 완성했다. 이로써 진령秦嶺에서 회하를 잇는 800밀리미터 등강수량선을 경계로 갈라지는 남방과 북방이 하나로 연결되었다.

대운하는 사실 남쪽 구간과 북쪽 구간으로 나눠진다. 북쪽 구간에서는 영제거永濟渠가 황하와 해하를 이었고 남쪽 구간에서는 통제거가 황하와 회하를, 한구가 회하와 장강을, 그리고 강남하가 장강과 전단강을 이었다. 남쪽 구간과 북쪽 구간이 만나는 곳은 낙양이었다. 혹은 낙양이 남북 대운하의 중심이었다.

당연히 낙양은 수 양제의 지휘본부이기도 했다.

따라서 낙양과 운하를 이해하면 곧 수 양제를 이해하게 된다.

하지만 이것이 누가 태자가 된 것과 또 무슨 관계가 있을까?

그 관계는 양광이 후계 투쟁에서 승리한 것이 진정한 ‘정변政變’ 즉 정치노선의 변화였다는 데 있다. 정변의 배후에는 이익집단의 권력투쟁뿐만 아니라 정치파벌의 노선투쟁도 있었다. 그중에서 양용은 서북파를, 양광은 남방파를 대표했다. 양광이 낙양을 수도로 삼고, 운하를 건설하고, 강도에 3번 순방을 간 것은 다 그것 때문이었다.39

파벌의 형성은 수 문제 때 이뤄졌고 우세했던 쪽은 서북파였다. 서북파의 정식 명칭은 관롱關隴집단이었는데, 관중과 농산(隴山. 지금의 류판산六盤山) 일대를 점유한 정치, 군사 세력이었다. 사실상 그것은 서위, 북주, 수, 당에서 다 활약한 정치집단이었다. 서위의 집권자이자 북주의 설립자인 우문태宇文泰, 수나라의 설립자 양견 그리고 당나라의 설립자 이연은 모두 이 집단에 속했다.

게다가 또 모두 무천武川 출신이었다.

무천은 곧 무천진武川鎭으로서 북위 건국 초, 도무제道武帝 탁발규拓跋珪가 북방의 변경에 설치한 6대 군구(軍區. 육진六鎭) 중 하나였으며 우문태, 양견, 이연의 선조는 모두 무천진의 직업군인이었다. 북위 말기에 천하에 대란이 일어났을 때, 우문태는 명을 받아 군구의 위치를 관중으로 바꾸었다. 그래서 현지 토호들과 결합해 있던 무천집단은 다시 관롱집단으로 바뀌었다. 한족화된 선비족이었던 우문태는 그 집단 성원들의 본적을 관중으로 바꿨을 뿐만 아니라, 그들에게 선비족의 성씨까지 하사했다. 예를 들어 양견의 아버지 양충楊忠은 보륙여普六茹라는 성을, 이연의 조부 이호李虎는 대야 大野라는 성을 하사받았다.40

그래서 이 집단의 특징은 무천 군벌, 관롱 귀족, 혼혈 가문, 이렇게 12글자로 개괄된다.

이 때문에 양견은 쉽게 왕조를 바꿀 수 있었다. 그것은 같은 통치 집단 내부의 교체였을 뿐, 결코 집단의 근본적인 이익을 저해하지는 않았다. 마치 어느 회사에서 일 못하는 사장을 더 유능한 사람으로 갈아치운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주주들은 기득권을 잃을 리가 없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더 많은 배당금을 받을 수 있었으므로 반대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41

의심의 여지없이 그 집단의 정치노선은 필연적으로 관중을 중심 혹은 기지 그리고 발판과 출발점으로 삼아 관중 위주의 정책을 시행했다. 황태자 양용이 대표한 것이 바로 그 이익집단과 그들의 정치노선이었다.42

하지만 양광은 달랐다.

양견의 차남이자 소비蕭妃의 남편으로서 22세에 양주총관揚州總管을 맡은 그 황자는 적어도 감정적으로는 남방에 더 기울어졌다. 훗날 강도가 될 그 지역을 10년간 지키면서 그는 남방의 문화를 몹시 흥미로워했고 남방의 사족을 최대한 존중했다. 심지어 그 지역 사투리까지 유창하게 구사했다. 종교적인 점에서도 양광은 양용과 사뭇 달랐다. 양용은 삼계종三階宗을 믿었지만, 양광은 천태종天台宗을 적극적으로 추종하여 계율을 받고 천태종의 속가제자가 되기까지 했다.43

양광은 강남지역 집단의 엄연한 대변인이 되었다.

또한 바로 그 기간에 양광은 양소와 정치적 동맹을 맺었는데 바로 우문술이 중간에서 다리를 놓았다. 그것은 ‘남방파’ 혹은 ‘2인자파’라 불릴 만한 연합전선이었다. 양광은 황자들 중 서열이 두 번째였고 위에 형 양용이 이었다. 양소도 대신들 중 서열이 두 번째였으며 앞에 재상 고경高熲이 있었다. 강남 사족의 제국에서의 정치적 지위도 마찬가지였다. 관중 출신의 득세로 인해 그들은 2등 신민이 되었다.

이제 마음속에 불만을 품은 ‘2인자’들이 손을 잡았다. 그러면 오랜 억압을 못 참고 떨쳐 일어난 그들은 성공할 가능성이 있었을까?

가장 중요했던 것은 수 문제의 태도였다.

그의 태도는 황태자를 바꾸기 전에 이미 표출되었다. 개황開皇 19년(599) 8월 10일, 다시 말해 양용이 황태자 자리를 잃기 1년 전, 건국 이후 계속 재상직을 맡아온 고경이 파면을 당하고 하마터면 죽을 뻔했다. 수나라의 개국공신인 그가 거의 재직 20년 만에 갑자기 그런 일을 당한 것은 아마도 이유가 하나밖에 없었다.44

이제 수 문제에게 그가 대들보가 아니라 걸림돌이 되었기 때문이다.

사실 수 문제는 양용을 폐하고 양광을 새 황태자로 세우기 전, 그 노재상에게 의견을 물었다. 고경은 대경실색하여 바닥에 넙죽 엎드렸다.

“장유유서인데 태자를 어찌 그렇게 쉽게 폐하려 하십니까?”45

문제는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얼마 후 고경은 면직되었다.46

고경과 마찬가지로 삼계종도 된서리를 맞았다. 이 불교 종파는 양광이 새 황태자가 된 뒤, 역시 수 문제의 명령으로 포교가 금지되었으며 그 시기는 개황 20년(600)이었다. 이 일은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당시 고경이 삼계종의 가장 유력한 지원자였기 때문이다.47

여러 가지 단서를 통해 그 분쟁의 총감독이 수 문제 자신이었고 양광과 그의 당파 혹은 공모자들은 단지 시류에 순응했을 뿐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양제는 훗날의 옹정제雍正帝처럼 합법적으로 제위를 계승했다. 문제의 죽음에 그가 어떤 역할을 했는지는 이미 중요하지 않다.48

그러면 수 문제는 왜 황태자를 갈아치우려 했을까?

정치노선을 바꾸기 위해서였다. 실제로 수 문제는 건국 초에 북주와의 결별을 명확히 표명했다. 이를 위해 그는 정치체제의 개혁(제3장을 참고)을 진행했고 만년이 되어서는 관중 위주의 정책을 반성하기 시작해 결국 황태자를 바꾸기로 결심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양제는 그의 정치적 유훈을 수행하며 지나치게 서두르고 과격했던 탓에 관농집단 전체의 심기를 거스름으로써 끝내 명예와 목숨을 다 잃고 말았다.49

이렇게 보면 소 황후에 대한 처우는 더욱더 이해가 안 간다.

하지만 수 양제는 그렇지 않다. 사실 운하 개통과 낙양 건설은 모두 옛날 북위 효문제孝文帝 탁발굉拓跋宏도 했었고, 또 하고 싶어 한 일이었다. 더욱이 장기간의 혼란과 분열을 거친 뒤에는 많은 황제들이 남북의 소통을 꾀하곤 했다. 수 양제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를 위해 그는 동도 건설과 운하 개통을 동시에 추진하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고 그 결과, 민족에게는 천추의 위업을, 자신에게는 영원한 악명을 남겼다.50

대운하는 엄청난 공적이었지만 백성의 혹사와 국고의 탕진을 야기했다.

당연히 우리는 고대의 어떤 인물에게 “주권은 국민에게 있다”는 민주주의 사상을 기대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그가 “백성이 귀하고 군주는 가볍다”(民貴君輕)는 성인의 가르침을 잊었다고 비판할 수는 있다. 사실상 수 양제는 사람을 사람으로 보지 않았다. 그의 눈에 비친 백성은 마음대로 부리고 죽일 수 있는 가축에 지나지 않았다. 요컨대 맹자가 말한 대로 “군주가 신하를 하찮게 보면 신하는 군주를 원수로 보게”(君視臣如土芥,則臣視君爲寇仇) 마련이니 사마덕감이 그에게 한 말은 결코 허언이 아니었다.

수 양제는 실제로 자신이 지닌 절대권력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
다행히 누군가는 수 양제의 파멸에서 교훈을 얻었다. 그리고 그 사람이 말한 대로 “물(백성)은 배(군주)를 띄우기도 하고 뒤집기도 한다.”(水能載舟, 亦能覆舟) 한 정권이 만약 백성의 이익을 최우선으로 삼는 대신, 거꾸로 백성과 이익을 다투고 백성을 적으로 삼는다면 그 정권의 패망은 시간문제일 뿐이다.

우리는 그 사람이 바로 당 태종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