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얼시劉二囍-서점의 온도書店的溫度 11

11 24시간 서점의 방랑자住在不打烊书店里的流浪汉

꼭두새벽에 연달아 울리는 메시지음 때문에 나는 잠이 깼다.

“얼시 형, 나 천수(陳舒)예요. 베이징에서 좀 말썽이 생겼어요.”

나는 얼른 전화를 걸었다. 알고 보니 그는 베이징에서 며칠 엑스트라 일을 했는데 상대측이 임금을 안 줘 한바탕 했다는 것이었다. 그런 일은 내가 어떻게 도와줄 방법이 없어서 그냥 너무 흥분하지 말라고 다독거리기만 했다.

우리의 지난번 통화는 반년 전인 1월 28일, 그러니까 딱 설날에 이뤄졌다. 당시 나는 광저우에 없었고 그는 막 1200북숍에서 섣달 그믐밤을 보낸 참이었다. 그는 내게 말했다.

“서점을 떠나려고 해요. 다음 여정을 시작해야죠.”

그는 이별의 시간을 일부러 새해 첫날로 잡아, 그것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했다.

천수는 서점의 방랑자였다. 그는 ‘방랑’이라는 단어를 전혀 꺼리지 않았다. 그가 보기에 방랑은 그가 택한 일종의 생활방식일 뿐이었다.

*

서점에는 별의별 사람이 다 있다. 특히 심야에는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오갈 데가 없어 단기간 머무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이미 시간이 꽤 지나서 나는 이미 그들의 존재에 익숙해졌다. 그들은 매일 똑같은 옷을 입고, 매일 똑같은 구석에 앉아 있다. 그들은 보통 말이 없고 다른 사람과 이야기하려 하지 않으며 자신의 상처를 들킬까 두려워한다.

그러나 천수는 달랐다.

그도 매일 똑같은 옷을 입고 발치에 커다란 검은색 배낭을 두고 있기는 했다. 그런데 어느 날 심야 좌담회 이벤트가 열렸을 때 자기가 앞장서서 걸상을 배치하고 빔 프로젝터를 제자리에 놓았다.
그래서 나는 그에 대해 호기심이 생겼다. 심야 좌담회가 끝나고 새벽 3시쯤, 그가 서점 앞 계단에 앉아 있는 것을 보고 바로 다가가서 옆에 앉아 말을 걸었다.

“왜 매일 밤 서점에서 밤을 보내죠?”

그의 대답은 명쾌했다.

“저는 방랑하고 있거든요. 방랑은 저의 꿈이죠.”

그 대답을 듣고 나는 흠칫 놀랐다. 나도 한때 방랑의 꿈을 품고 배낭을 짊어지고서 터벅머리에 지저분한 얼굴로 타이완 해안선 일주를 한 적이 있었다. 방랑은 내게 호방하고 이상주의적 색채를 띤 행위이다. 다만 도시에서 방랑은 소극적이고 부정적인, 힘들고 갈 데 없는 루저나 택하는 행위로 간주되기 쉽다.

“올해 7월에 이렇게 직업 없이 떠도는 생활을 시작했어요. 11월에 날씨가 추워지는 바람에 따뜻한 곳에서 겨울을 날까 싶어 광저우로 왔고요.”

그는 자기가 매일 일부러 한가하게 지낸다고 말했다.

“바쁜 일이 있으면 어떤 사람을 잊기 쉽거든요. 제가 방랑을 택한 건 그녀를 기억하기 위해서예요.”

그것이 왜 방랑을 택했느냐는 물음에 대한 그의 대답이었고 내가 들어본 중에 가장 가슴에 사무치는 말이었다.

그 말을 들었을 때 나는 그의 손에 막 거리에서 사온 만두가 들려 있는 것을 보았다.

“어서 드세요, 금방 식으니까.”

나는 그가 두 개를 먹고 일어서서 곧장 길가 쓰레기통 쪽으로 다가가, 먹을 것을 찾아 쓰레기통을 뒤지던 여성에게 남은 만두를 다 건네는 것을 보았다.

“저는 벌써 한 판 먹었고요, 이건 싸갖고 온 거예요. 저 여자 분이 저보다 훨씬 배가 고플 것 같아서요.”

나는 이렇게 참된 성정을 가진 친구를 알게 된 것이 기뻐서 서점에 돌아가 맥주 몇 병을 들고 나오려 했다. 그런데 그가 먼저 백팩에서 휴대용 이과두주 한 병을 쓱 꺼냈다. 그래서 가을로 접어드는 광저우에서 나는 길가에 앉아 이 도시의 밤과 마주한 채 그 24세 청년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

푸젠(福建)에서 출발한 뒤, 천수가 첫 번째로 간 곳은 사오싱(紹興)이었다. 그곳은 작가 루쉰의 고향이어서 꼭 들러 절을 올리고 싶었다. 그리고 사오싱을 떠날 때, 그가 처음 가지고 온 5백 위안은 벌써 거의 동났지만 결코 그의 발걸음을 방해할 수는 없었다. 그 여행길에서 그는 이미 다른 방랑자들로부터 적잖은 경험을 전수받았다. 예를 들어 맥도널드에서는 사람들이 먹다 남긴 치킨, 콜라, 감자튀김을 쉽게 구할 수 있었다. 그의 결론에 따르면 두 부류의 사람들을 특히 주목할 만했다. 첫 번째 부류는 연인이었다. 음식이 남아도 싸가는 것을 부끄러워했다. 그리고 두 번째 부류는 잘 차려입은 화이트칼라 여성이었다. 먹는 속도가 느리기는 해도 이미지 때문에 손에 뭐가 묻는 것을 꺼려서 항상 감자튀김을 많이 남겼다. 그래서 천수는 내게 말하길, “한동안 감자튀김을 너무 많이 먹어서 살이 많이 쪘어요.”라고 했다.

맥도널드가 숙식문제를 해결해줬지만 그래도 쓸 돈이 좀 필요하면 그는 공항에 갔다. 세관에 들어가기 전에 승객들이 버린 라이터를 주워 입국장 앞에서 팔면 수입이 꽤 짭짤했다. 이런 생존 기술을 발휘하고 적절히 무임승차까지 병행하여 그는 저장성(浙江省) 일대를 다 돌고 윈난성으로 넘어가 리장, 샹거리라(香格里拉)를 구경한 뒤, 다시 싼야(三亞)와 구이린(桂林)으로 갔다. 그리고 광저우에 오기 전에는 독서가 취미이기 때문에 특별히 인터넷에서 광저우의 서점을 검색하다가 밤을 보낼 수 있는 서점을 발견했다. 그는 지하철에서 나오자마자 곧장 광저우의 1200북숍을 찾았다.

마지막 술잔을 다 비운 뒤, 조금 알딸딸해진 나는 입을 쓱 닦으며 그에게 말했다.

“며칠 있다가 형님 한 분을 소개해드리죠. 함께 술이나 마십니다. 그분은 천 형의 선배예요.”

***

천수의 짧은 방랑의 이력과 비교하면 리(李) 형님은 절대적으로 선배라고 할 수 있었다. 천수가 처음 1200북숍에 발을 디뎠을 때, 타이완 출신의 리 형님은 광저우를 떠돈 지 벌써 15년이었고 우리 서점에서 머문 기간만 거의 2년이었다. 그는 광저우에 있는 24시간 맥도널드의 분포 상황과, 어느 지점이 자기에 더 편한지 알고 있었다. 겨울에는 어디에 가야 뜨거운 물로 목욕이 가능하고 어느 병원 세탁부의 세탁기를 무료로 쓰고 건조까지 할 수 있는지도 알고 있었다. 나아가 어느 육교 밑이 잠들기 편하고 자기 친구들이 다 어느 모퉁이에서 자고 있는지도 알고 있었다. 그는 오 데 코롱 향수를 쓰는 방랑자로서 다른 이들보다 훨씬 우아하게 살았다.
어느 주말 저녁, 나는 천수를 데리고 톈허북로점에 갔다. 그곳이 리 형님의 장기 서식처였고 서점 구석에 놓인 소파가 이 도시에서 그가 고정적으로 쓰는 침대였다. 리 형님이 특별히 진 한 병을 사와서 우리는 문 앞의 테이블에 둘러앉았다. 그 두 사람은 다 닭띠였는데 예순 살인 리 형님이 천수보다 무려 36살이 많은 셈이었다. 같은 처지가 나이의 격차를 해소시켜 그들은 바로 망년지교(忘年之交)가 되었다.

하지만 실컷 한 번 취해보려는데 리 형님에게 제동이 걸렸다. 이튿날 일찍 어느 미대에 가서 스케치 모델이 돼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그가 가장 좋아하는 일이었다. 하루 여섯 시간만 앉아 있으면 100위안 넘는 수입이 생겼다. 리 형님은 천수에게도 그 일을 적극 추천했다가 거절을 당했다.

“형님, 저는 성미가 급해서 그렇게 오래 못 앉아 있어요!”

리 형님은 알아서 빠져나갈 구멍을 만들어야 했다.

“됐다, 됐어. 모델을 하려면 노련해야 하고 주름이 많으면 많을수록 좋지. 천수는 첫 번째 조건에만 부합해.”

리 형님이 갖춘 갖가지 기상천외한 생존 기술 중에서 스케치 모델 일은 최근 몇 년 간 새로 생긴 것일 뿐이었다. 그 전에 그는 광저우동역에서 호객 일을 한 적도 있었다. 옛날에 일할 때 배운 영어를 사용해 광저우 중국무역박람회에 참가하러 온 외국인들에게 호텔을 소개했고 한동안 그 수입이 꽤 많았다.

배경도 성격도 전혀 다른 두 사람이 그렇게 만났다. 똑같이 방랑자이기는 했지만 사는 방식도 조금 달랐다. 천수는 아침이면 팡위안(方圓)빌딩 쪽 골목에 가서 찐빵 두 개를 사먹었다.

“1.5위안에 하나인데 크기가 엄청나요!”

이어서 점심은 건너뛰고 저녁에는 월마트에 가서 1개에 3위안짜리 도시락을 사먹었다.

“밥이 많아요. 밥 퍼주는 사람이 저한테는 반찬을 좀 더 주기도 하고요.”

하지만 리 형님은 많이 달랐다.

“아침에는 죽과 계란과 돼지고기국수를 먹지. 갖고서 맥도널드에 돌아가 먹고 조금 쉰 다음에 도로 잠을 자곤 해. 맥도널드 수바오예로(數寶業路)점은 아주 격조가 있어. 물론 켄터키프라이드치킨도 좋아해, 콰이어트(quiet)하니까.”
“그러면 서점에는 왜 오시는 거죠?”
“그건 내가 대학 때 신문방송학을 전공해서 신문 보는 걸 좋아하기 때문이야. 전에 《남방도시보》(南方都市報)에 이 서점이 보도된 걸 봤는데 그 이유도 역시 ‘격조’더군.”

금세 연말이 다가왔고 서점에서 송년음악회를 열게 되어 나는 그들도 초대했다. 그 두 방랑자는 서점 안의 피 끓는 문예 청년들과 함께 2017년으로 들어섰다. 음악회가 끝난 뒤, 다들 흥이 식지 않아 같이 주강으로 일출을 보러 가기로 했다. 우리는 날이 곧 밝을 때까지 이야기를 나누다가 7, 80명이 한꺼번에 떼를 지어 서점에서 레이더(獵得)대교까지 호호탕탕 걸어갔다. 두 방랑자는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새해의 첫 번째 햇빛을 향해 자신들의 신년 소망을 외쳤다.

그날 이후, 그들은 제법 사람들에게 알려져서 서점의 많은 손님들이 두 사람의 친구가 되었다.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해서 나는 그들을 서점의 심야 좌담회에 손님으로 초대했다.

우리 서점의 그 101번째 심야 좌담회는 자정 12시에 정확히 시작되었다. 그날은 청중이 많아서 서점 안이 꽉 들어찼다. 그들은 모두 과거에는 서점에서 두 방랑자의 이야기를 들을 것이라고는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좌담회가 끝난 뒤에도 아직 여러 사람들이 성이 차지 않아 계속 밤을 새서 그들의 이야기를 듣기로 결정했다.

밤을 새기로 한 장소는 세븐일레븐 앞이었다. 그때는 이미 새벽 3시가 넘은 시간이었다. 천수가 가게에 들어가 삶은 달걀 몇 개를 사왔고 리 형님은 또 진 한 병을 사 갖고 와서 몇 모금 마신 뒤, 휴대폰을 꺼내며 말했다.

“음악을 좀 틀게요.”

첫 번째 곡은 로이 클락의 《Yesterday When I was Young》이었다. 그 오래된 노래가 분위기를 확 바꾸고 우리 서점에 오기 전의 그들의 과거로 우리를 이끌었다.

****

천수는 푸젠성 닝더(寧德)의 시골 마을에서 태어나 고등학교까지 내내 길을 다니며 주걸륜의 노래만 들었다. 그러다가 2010년에야 인터넷을 알았는데 그 전까지는 모범생으로서 옛날 성현의 책만 읽고 바깥 세계가 책에 써진 세계처럼 아름답다고 믿었다. 당시 그는 수도 없이 자신의 미래를 꿈꿨다. 바다와 나무와 농구장이 있는 도시에서 커피숍에 앉아 일을 하다가, 저녁에 길을 갈 때 우연히 어떤 여자와 마주쳐 고백을 한 뒤 함께 살아갈 줄 알았다.

그러던 어느 가을날, 그는 그 마음속의 소녀와 마주쳤다. 교복 같은 녹색 옷을 입고 하얀 신을 착용한 그녀는 그에게 노트를 빌려 베껴 쓰려 하는 다른 여학생들과는 달랐다. 온몸에 문신이 있었으며 밤에 기숙사에 안 가고 피시방에 갔다.

당시 그는 고등학생이고 그녀는 중학교 일학년이었는데 학교가 같은 캠퍼스에 있었다. 그 후로 이 모범생은 자주 수업을 빼먹고 운동장에 나가 그녀가 체육 수업을 받는 것을 지켜봤으며 금요일에는 정류장에서 집에 돌아가는 그녀를 눈으로 배웅했다. 일요일에는 또 아침 7시에 일어나 빵 2개와 생수 4, 5병을 사서 온종일 수십 킬로미터를 걸어 그녀 집에 도착해, 다시 그녀가 학교로 돌아가는 것을 배웅했다. 그렇게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그는 그녀를 쫓아다녔다. 고백할 기회가 없지는 않았지만 끝내 그녀에게 말도 걸지 못했다.

고등학교를 마치고 그는 그녀를 만날 일이 없었다. 그리고 직장을 그만둔 뒤, 그녀 없는 날들을 견딜 수 없어 방랑에 나섰다. 방랑은 그가 그녀를 기억하기 위해 택한 방식이었다.

그런데 리 형님은 천수와는 전혀 반대되는 사연을 갖고 있었다. 지금 천수의 나이일 때 그는 벌써 “1년에 24명의 사장을 바꿔가며” 곳곳을 떠돌고 또 곳곳에서 인생을 즐겼다. 그러고서 오피스텔에 투자를 하고 컴퓨터 메인보드를 만들어 팔았으며, 또 가라오케를 열어 직접 “뜻밖의 놀라움, 뜻밖의 기쁨!”이라는 광고 카피를 만들기도 했다.

그는 타이완 아리산(阿里山) 기슭에서 태어나 외아들로 자랐다. 그의 부모는 과일 장사를 하느라 바빠서 그를 거의 돌보지 못했다. 그가 초등학교 5학년 때 할아버지가 별세한 뒤로는 집안에는 내내 그 혼자만 남아 있었다. 그는 두 달 동안 70편의 영화를 본 적도 있으며 밤을 새가며 프랑스 실존주의 철학과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을 읽고 일제 라디오로 팝송을 들었다. 공부에 취미가 없고 일도 좋아하지 않았지만 기억력이 출중해서 흥미로운 것만 생기면 꼭 끝장을 보았다.

그는 대학을 중퇴하고 사회에 뛰어들었다. 타이베이 힐튼 레스토랑의 종업원 일을 시작으로 더 랜디스 호텔과 뱅커스클럽에서 일했으며 나중에는 한 독일인과 바바리아 스타일의 레스토랑을 차렸다. 힐튼 레스토랑의 유니폼은 위엄 있는 스페인 투우사 복장이었고 뱅커스클럽 안에는 거장 치바이스(齊白石)의 그림이 걸려 있었다. 더 랜디스 호텔 내 ‘파리 1930’ 레스토랑의 샹파뉴 와인은 파리에서 공수해온 것이었다. 당시 그 레스토랑의 피아니스트는 그를 보면 꼭 《Yesterday When I was Young》을 연주해주었다.

사진 刘二囍

하지만 그 모든 것은 정말 어제의 일이 되고 말았다. 언제나 그를 돌봐줬던 하늘이 갑자기 그에게서 관심을 거두었고, 그는 광저우에 왔다가 자기가 투자한 방직공장이 사람을 잘못 써서 원금도 못 건지게 되었음을 알았다. 지난날 힐튼에서 즐기던 에스프레소와 등심스테이크 그리고 푸아그라가 그렇게 연기처럼 사라졌다.

2002년, 그는 은행에 겨우 9마오(毛. 1위안의 10분의 1)가 남았고 카운터에서 4마오를 찾아 찐빵을 사먹었다. 이튿날에는 5마오까지 마저 찾았다. 그리고 나중에 자신의 증명서까지 다 분실한 뒤에는 아예 타이완으로 돌아갈 생각을 접었다.

“뜻밖의 놀라움, 뜻밖의 기쁨!”이라는 리 형님의 옛날 그 광고 카피는 지금 돌아보면 대단히 의미심장하다. 운명은 결코 누구도 편애하지 않는다. 그날 진 몇 잔을 들이켜고 나서 리 형님은 계속 똑같은 말을 중얼거렸다.

“옛날에 125cc 오토바이에 두 딸을 태우고 타이완 일주를 한 적이 있었지. 그때 걔들은 예닐곱 살밖에 안 됐었어. 타이둥(臺東)의 해변에서 걔들에게 노래를 불러줬고 가오슝의 맥도널드에서는 맥너겟이 몇 덩이인지 걔들과 내기를 했지. 내 딸이 그러더군. 아빠가 지면 자기가 간지럼을 태울 거라고.”

당시 그의 아내는 이미 그와 이혼하기로 결정한 상태였다. 그가 중국에 온 뒤로는 딸들과의 연락도 끊어져 버렸다. 그는 심지어 딸들이 나중에 누구와 결혼했는지도 몰랐다.

“타이완은 3만 6천 평방킬로미터라고 하더군. 나는 얼시, 자네가 쓴 타이완여행기를 보고서야 타이완이 본래 그렇게 크다는 것을 알았어.”

그런데 운명은 천수에게도 그리 호의적이지 않았다. 그가 대학을 졸업하고 고향에 돌아와 기운차게 맥주 판매 일을 하고 있을 때, 어느 날 문득 익숙한 뒷모습을 보았다. 바로 그녀였다. 머리를 염색하고 어린아이의 손을 잡고 있었다. 그 아이는 어눌하게 엄마, 엄마하고 불러댔다.

그날 심야 좌담회의 생중계 영상을 보고 누군가 “코미디보다 더 웃겨요.”라고 평했다. 그런데 그날의 모임을 마무리 지을 때 천수는 내게 말했다.

“희극의 핵심은 비극이죠. 제가 요즘 가장 좋아하는 건 주성치 영화랍니다.”

*****

새해가 되어 그들은 무척 바빠졌다. 리 형님은 모델 일을 하느라 바빴고 천수는 책을 읽느라 바빴다. 천수는 책을 읽고 나면 주장신도시에 가서 햇빛을 쬐곤 했다. 그들은 서점에서 계속 더 많은 친구들을 사귀었고 늘 누구와 이야기를 하거나 주강 강변에 나가 술을 마셨다.

지금 서점 구석의 그 소파는 완전히 리 형님의 집이 되었다. 그는 자기 짐을 그곳에 장기간 놓아둔 채 점원들에게는 자기를 방해하지 말라고 했다. 자기가 카페 자리를 오래 차지하고 앉아 아무것도 안 사먹더라도 말이다.

그리고 천수는 아직도 여행 중이다. 그가 인터넷 카페에 올리는 사진은 예나 다름없이 흑백사진인데 쓸쓸하면서도 굳세 보인다.

“두 분은 방랑의 과정에서 어떤 어려운 시련과 만났고 또 어떻게 그것을 해결하셨나요?”

그날 심야 좌담회에서 가장 많이 제기된 질문은 바로 이것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계속 말을 아꼈다.

“뭐라고 말씀드리기가 곤란하네요. 여러분이 방랑을 하게 되면 스스로 어떻게 해야 할지 알게 될 겁니다. 큰일이 눈앞에 닥쳐도 계속 살아가야 하고 어떻게든 방법은 있게 마련이니까요.”

방랑은 그들에게 단지 하나의 살아가는 방법이자 선택일 뿐이다.

사진 刘二囍

一大早,就被一连串信息声吵醒,“囍哥,我是陈舒,我在北京出了点麻烦……”

我赶紧回了个电话过去,原来他在北京做群众演员,结果干了几天后,因为对方不支付工钱,他较真跟人家撕了起来。这事我真的不知道如何帮,只好安抚他别太冲动。

上一次我们通话,还是半年前的1月28号,那天刚好是春节。当时我不在广州,而他刚刚在1200bookshop度过了跨年夜。他跟我说,终究还是会离开书店,进行下一段旅程。他特意把辞别的时间选在了新年第一天,赋予了它隆重的仪式感。

陈舒是住书店里的流浪汉,他毫不避讳流浪这个字眼,在他眼中,流浪是他选择的一种生活方式。

书店内有着形形色色的人,尤其在深夜,不乏因窘迫困顿,居无定所而短期落脚的人。久而久之,我对他们的存在,已经习以为常。他们每天都穿着同一件衣裳、每天都会在固定的角落出现。他们通常比较沉默,不愿与他人交往,生怕自己的伤口被别人发现。

可陈舒不一样。

他每天也穿着同一件衣服,脚边放着一个大大的黑色行囊。但在深夜故事分享活动前后,他会主动帮忙摆放凳子,或者勤快地把投影仪归位。

这让我对他产生了好奇。在一次分享会结束后,大概凌晨三点的样子,我看他坐在书店门口的台阶上,就也坐下来搭话。

当我问到他为何每晚待在书店过夜时,他干脆利索地回答:我在流浪,流浪是我的一个梦。

这个回答让我一惊。曾经我也有一个流浪梦,所以我才能背起行囊,蓬头垢面居无定所地沿着台湾海岸线走了一圈。流浪在我看来,是具有江湖气息,带着理想主义色彩的一种行为。只是在都市里,流浪很容易被赋予消极负面的色彩,似乎只有loser才会流离失所,生活艰辛。

陈舒说自己七月份就开始了这种无业游民的生活,十一月份,天气转凉后,他想要去个暖和的地方过冬,就来到了广州。他故意让自己每天都闲着,“因为忙碌的工作会很容易让自己忘记一个人,我选择流浪,是为了记住她。”这是他对为何选择流浪的回答,也是我听过的最深情的一句话。

说这话时,我见他手里拎着一袋刚从街对面买回来的小笼包,叮嘱他赶紧吃吧,一会就凉了。我看他吃了两个后,站起来径直走向路边的垃圾桶。他把剩下的包子递给了正在垃圾桶里搜寻食物的一个女生。

他说他刚刚已经吃过了一袋,这一袋是打包过来的,她应该比自己更饿。

我为认识这样一位真性情的朋友感到高兴,正打算起身进书店拿两支啤酒出来,却见他从背包里掏出一瓶随身携带的牛栏山二锅头。于是入秋的广州,我坐在马路边,对着这个城市的夜,倾听这位24岁年轻人的星辰与大海。

从福建出发后,陈舒的第一站是绍兴,理由是景仰鲁迅,要去他的故乡膜拜。离开绍兴时,启程时怀揣的500块钱,几近用光,但这并没有阻碍他走下去。这一路上,他已经从其他流浪汉那里积攒到了经验,譬如在麦当劳,可以很容易得到别人吃剩下的鸡块、可乐与薯条,他总结有两类人群特别值得关注:其一是情侣,吃不完不好意思打包带走;其二是穿着精致的女上班族,虽然吃得慢,但为了形象,不愿沾手,薯条总是剩很多。以致于,“有一段时间吃了大量薯条,都吃胖了。”

麦当劳里可以解决食宿问题,如果需要些零花钱,那就去机场。安检回收处有大量客人丢弃的打火机,拿去航班到达口倒卖,收益有时挺乐观。靠着这些生存技巧,加上见缝插针地逃票,他逛完浙江一带,又去了云南大理、丽江、香格里拉、再去三亚和桂林。来广州前,因为喜欢看书,他特地在网上搜了广州的书店,发现有个可以过夜的书店,从火车站出来后,他就直奔了广州1200bookshop。

把最后一点壶底酒干完后,微醺的我抹抹嘴巴告诉他:晚几天,我帮你介绍一位大哥,一起喝酒,他可是你的前辈。

相比起陈舒的短暂流浪生涯,大哥绝对算得上前辈。当陈舒走进1200bookshop时,来自台湾的李大哥在广州已经漂泊十五年,光是在书店就差不多住了两年。他知道广州24小时麦当劳的分布情况,以及哪几间睡起来最舒服;他知道冬天时去哪里洗热水澡,以及某某医院的后勤处有洗衣机可以免费洗衣服,而且可以晾晒;他知道哪些天桥下可以方便人,以及自己的老朋友都睡在哪些街角。他是一个每天使用古龙水的流浪汉,活得比很多人都体面。

一个周末的晚上,我带着陈舒来到天河北店,这是大哥的长期据点,书店角落里的一张沙发就是他在这个城市里固定的床。大哥特地去买了一瓶杜松子酒,我们在门口的一张桌坐下。这两位都属鸡,60岁的大哥,比陈舒大了整整三轮。相同的经历完胜年龄的差距,他们两个很快成了忘年交。

只是,说好的不醉不归被大哥叫停,他说忽然想起第二天要早起,去美院当写生模特。这是他最喜欢的工作,一天六个钟,只是坐着就可以有上百元收。大哥向陈舒强力安利这个工作,但被拒绝,理由是“脾气暴躁,坐那么长时间受不了”。大哥给自己找个台阶下,说也罢也罢,做模特一定要沧桑,皱纹越多越好,陈舒只符合第一项。

在大哥具备的各项超强谋生技能中,做写生模特只是最近这些年新增的业务。早些年,他在广州火车东站当过拉客仔,用过去工作中学会的英语,给来参加广交会的外国人介绍酒店,曾经一度收入颇丰。

两个背景、性格完全迥异的人,就这么相遇了。不过即便同是流浪,侧重也有所不同,陈舒早上去方圆大厦那边小巷里买两个包子,“一块五一个,个头很大”;不吃午餐,晚上去沃尔玛买一份3块钱的盒饭,“饭很多,打饭的还会多给我一点菜。”

李大哥呢,“早上吃皮蛋瘦肉粥、鸡蛋、猪肠粉,拿回麦当劳吃,休息一下,睡个回笼觉。麦当劳数宝业路那家最有格调;当然,我还是比较喜欢在肯德基,quiet。”他说他之所以来到书店,是因为大学学新闻,喜欢看报纸,曾看到《南方都市报》对书店的报道,原因,依然是“格调”。

很快,临近年尾,书店会举办跨年音乐会,我邀请了他们一起参加。这两位流浪汉,在书店内和一群热血文艺青年,一起走进了2017年。音乐会后,意犹未尽,大家约定一起去珠江看日出。我们聊到天快亮,七八十人浩浩荡荡从书店走上猎德大桥。两位流浪汉和每个人一样,对着新年的第一缕阳光喊出了自己的新年愿望。

那天之后,他们开始走进公众视野,很多书店里的客人都成了他们俩的朋友。越来越多的人想要知道他们的故事,于是,我邀请他们两个在书店做场讲座。

深夜故事101期活动现场,还有粉丝给二位献花

书店的第101场深夜事故分享会在凌晨十二点准时开始,那一天来了很多听众,书店被塞得满满的。他们都不曾想过,可以在一间书店内,听两个流浪汉讲各自的故事。活动结束,不少听众依旧兴致不减,一群人喊上二位,决定去宵夜,继续听他们的故事。

宵夜的地点,是7-eleven门口的马路牙子上。那会儿已经凌晨三点多,陈舒进去买了几个茶叶蛋,大哥买回一瓶杜松子酒,几口下肚,掏出手机,说,放点音乐。

第一首,是Yesterday When I was Young,这首老歌导致画风突变,由此奠定这天的后半段基调,我们得以翻阅很多他们来书店之前的前尘往事。

陈舒出生在福建宁德乡村的农民家庭,直到高中,走在路上听到的歌只有周杰伦。他到10年才接触网络,在那之前,他是学霸,一心只读圣贤书,相信外面的世界和书里写的一样美好。那时他无数次幻想自己未来的生活,是去到一个有海有树有篮球场的城市,在一家咖啡厅里工作。晚上在大街上走,会有奇遇,碰到某个女孩,跟她表白,在一起,然后生活下去。

没过多久的一个秋末,他就碰到了那个心目中的女孩,她穿着像校服一样绿色的衣服、白色的鞋子,完全不同于那些向他有意借笔记抄的女生,满身都是纹身,夜不归宿去网吧。

那时,他读高中,她读初一,在同一所学校。从那以后,学霸开始逃课,跑去操场看她上体育课,周五在车站目送她回家。周日早上七点起来,买两个面包和四五瓶水,走一天,几十公里到她家,再送她回来。如此直至大学毕业,他跟着她,不是没有机会向她表白,但他始终不敢跟她说话。

她就是他选择出来流浪的那个理由,是曾经的他,一个农村少年用来屏蔽外部未知世界的方法。如此说来,坐在旁边的李大哥,简直是他的反义词。

像陈舒那么大时,李大哥已经“一年换24个老板”,到处飘,到处玩。投资写字楼、做电脑主板生意……开KTV,他亲自打广告:不定时、不定期的惊喜。

他出生在阿里山脚下,是独生子。父母忙水果生意,从来不管他。从小学五年级爷爷去世,家里就只剩他自己。他可以两个月看70多部电影;晚上不睡觉,读法国存在主义哲学、大英百科全书,拿着日本进口的收音机听International Community Radio Taipei里的英文歌……他不爱念书,做事没有长性,只是凭借超强的记忆力,碰上感兴趣的事,总能玩出点明堂。

因为不想当兵,他大学还没毕业,就跑出去工作,从台北希尔顿西餐厅服务员做起,到亚都丽致大饭店、Bankers Club、再到和德国人开巴伐利亚风味餐厅……希尔顿的工作制服是威风的西班牙斗牛装,Bankers Club里面挂着齐白石的画,亚都大饭店里有个Paris 1930,香槟从巴黎空运。“Yesterday when I was young, The taste of life was sweet as rain upon my tongue……”当年弹钢琴的看见他,一定弹这一首。

但如那首歌所唱,那都是Yesterday的事了。始终对他眷顾的上天,最终还是给他来了一下——他来广州看自己投资的纺织厂,却发现因为用人不当,血本无归。曾经希尔顿里的espresso、莎朗牛排、鹅肝酱化为云烟。02年,他银行里只剩9毛钱,他去柜台取了4毛,买馒头。第二天,再取5毛。再之后,他丢掉了自己的全部证件,索性断了回台湾的念想。

“不定时、不定期的惊喜。”李大哥当年的这句广告语如今想来,颇有深意。命运不会因为你的出身,亦或是你的一往情深,就对你偏爱有加。那天几杯杜松子酒下肚,李大哥反复念叨的,是那一年,他骑着125cc的摩托车环台湾岛带着两个女儿回家去。她们只有6、7岁,到了台东的海边,他给她们唱歌;到了高雄的麦当劳,他和女儿打赌麦乐鸡到底有几块,他的女儿说,你要是输了,就帮我抓痒。

那时他的妻子已经决定离开他。他来到大陆,从此失去了和女儿的联系。他甚至不知道她们后来嫁到了什么地方。“台湾有3.6万平方公里,我看了二囍你写的书,才知道台湾原来有那么大。”

而陈舒呢,命运也“一视同仁”。在他大学毕业,在老家潇洒做着啤酒销售时,一日当他正要去下一家客户拜访时。20米开外,他突然看到一个熟悉的背影。那是她,染了头发,变成了一个牵着小孩的少妇。而那个孩子,正很不流利地叫着妈妈。

那天深夜故事的直播,有人评论“比看欢乐喜剧人还搞笑”,但那天的最后,陈舒告诉我说,喜剧的核心是悲剧,他现在最喜欢的是周星驰的电影。《苏乞儿》里,如霜给了苏乞儿一个包子,她曾是他的女神,当他沦落为乞丐,他该如何面对?

新年之后,他们都开始变得很“忙”。李大哥忙着去当模特,陈舒忙着看书,他反复读着席慕蓉,读完,去珠江新城晒晒太阳。他们在书店还结交了很多朋友,经常有人找他聊天,去珠江边喝酒。

如今,书店角落里的那张沙发,已经成为了大哥的家,他把行李长期堆放在那儿,我吩咐店员不要去打扰他,哪怕他长期占据消费区而不消费。

而陈舒,在继续他的征程,朋友圈里更新的照片依旧是黑白风,看上去苍白,却又坚挺。

“在你们流浪的过程中,遇到过什么困难,对幸福的定义有什么改变吗?”那次深夜故事,他们被问到最多的是这个问题,但他们总是不愿多讲,“没什么好讲的,在你跨出那一步之后,你自己知道怎么办。事到临头,你要活下来,总会有办法。”

流浪,对于他们而言,都只是一种活法,一种选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