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방의 인문학 3-한 무제 반성문 쓰게 한 흉노의 땅, 룬타이

가을이면 노랗게 물들면서 경이로운 사막 풍경을 연출하는 신장위구르 자치구 룬타이현의 호양림(胡楊林). 한 무제의 반성문인 ‘윤대의 죄기조’ 무대가 된 곳이다.

룬타이현(輪臺縣) 남부에 있는 타림 호양림(塔里木 胡杨林) 공원은 사막의 노란 보물이다. 호양수(胡杨樹)들이 가을이면 노란색으로 물들면서 경이로운 사막 풍경을 연출해준다. 광활한 하늘은 눈이 부시도록 파랗다. 키 큰 호양수의 노란 잎들이 햇살을 반사하듯 반짝인다. 황홀하다고 할 정도다. 살아서 돌아올 수 없다는 타클라마칸 사막에도 생명이 깃들어 있다는 사실을 온몸으로 보여준다.

호양수는 극한의 사막에서도 살아남은 기적이다. 다른 식물들에게서는 찾아보기 힘든 생존 능력을 갖추고 있다. 지상으로 30미터까지 자라는 호양수는 지하 20미터까지 뿌리를 깊이 박는다. 염도 높은 지하수에서도 수분만 빨아들이는 능력도 있다. 일반적인 식물은 고염도의 지하수를 만나면 삼투압 현상으로 수분을 빼앗겨 고사하게 된다. 그러나 호양수는 세포액 농도가 높기 때문에 염기 지하수로부터도 수분만을 빨아낸다. 줄기의 껍질도 아주 견고하여 대량의 수분의 줄기 안에 축적할 수 있다. 그래서 황량한 모래사막에 초록의 잎을 흔들어주다가 가을이 오면 노랑의 환상 교향곡을 연주해주는 것이다.

살아서 천년이란 호양수는 죽어서도 그 존재감이 이어진다. 죽은 호양수는 천년 동안 넘어지지 않고, 넘어져도 그 다음 천년 동안 썩지 않는다고 한다. 사막이란 화폭에 멋진 필획으로 남아있다는 것이다. 사막에 우물이 숨어 있다는 생텍쥐페리의 이야기가 사막을 동화의 상상으로 장식했다면, 호양림은 찬란한 색과 독특한 고사목으로 사막의 실경을 장식한다.

룬타이현은 투루판에서 카스로 이어지는 톈산남로의 중간에 있다. 쿠얼러와 쿠처 사이에 자리 잡은 인구 12만의 작은 현이다. 타클라마칸 사막 북쪽 가장자리의 오아시스 지역으로, 타클라마칸 사막을 관통하여 타중(塔中)을 거쳐 민펑현(民豊縣)에 이르는 사막공로(216번 국도의 일부)의 시발점이기도 하다.

룬타이는 아주 인상적인 고대사의 한 장면을 떠올리게 하는 곳이다. 룬타이의 우리말 독음은 윤대, 바로 한무제가 말년에 내린 ‘윤대의 죄기조(輪臺罪己詔)’가 바로 이곳과 깊은 관련이 있다. 조는 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 알리는 글이다. 죄기조는 황제가 신하나 백성들에게 자신의 과오를 고백하는, 일종의 반성문이다. 죄기조의 말미는 다음과 같다.

朕即位以来, 所为狂悖, 使天下愁苦, 不可追悔. 自今事有伤害百姓, 糜费天下者, 悉罢之.
짐이 즉위한 이후 망령되고 그릇된 일을 많이 저질러 천하의 백성들을 근심케 하고 고통스럽게 했다. 후회가 막급하다. 오늘 이후 백성을 힘들게 하고 국가의 재력을 낭비하는 일을 일체 중단하노라!

북으로 흉노를 정벌하는 등 사방으로 위세를 떨쳐서 한나라의 전성기를 구가했다고 배웠던 한무제가 반성문을 썼다니, 이상하지 않은가. 알고 보면 이상할 것은 없다. 전성기라는 말은 곧 추락의 시작이란 뜻이다. 중원문명을 꽃 피운 한나라는 한무제로부터 추락 그 이상의 망조에 빠져들었던 것이다.

한고조 유방은 BC 200년 백등산 전투에서 흉노에 포위되어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졌다. 그는 화친(和親)이란 그럴듯한 이름으로 겨우 살아나왔지만 패배의 굴욕을 톡톡히 감수해야 했다. 이때부터 한나라는 흉노에게 온갖 진기한 물품에 황실의 공주까지 얹어서 바쳤다. 불평등한 국경무역도 허용했다. 외교적 명목은 화친이지만 실제로는 국가간 뇌물이었고, 흉노에겐 전쟁 없는 약탈이었다. 유방이 죽고 난 뒤 섭정을 하게 된 여태후(呂太后)는 흉노의 묵돌 선우로부터 “너는 남편이 없고 나는 아내가 없으니 함께 살아보면 어떻겠느냐”는 치욕적인 서신까지 받았다. 한나라는 속을 끓이면서도 흉노에게 바칠 물품과 공주를 챙겨야 했다.

황제의 외교는 이랬으나 백성들의 살림과 나라의 재정은 크게 달랐다. 백성들이 휴식하면서 유민들이 농토로 돌아왔다. 해가 지날수록 생산이 늘고, 세수도 증가하고, 국력도 날로 증강되었다. 5대 문제와 6대 경제의 선정을 문경지치(文景之治)라고 한다. 바로 이 굴욕적인 화친의 시대였다. 요즘 말로 하면 흉노에게 ‘퍼주기’를 했으나 흉노와의 전쟁을 회피함으로써 안으로는 풍요로워진 것이다.

당당하게 제위에 오른 7대 한무제(재위 BC 141~87년)는 굴욕적인 화친을 파기하기로 했다. 황제의 권위를 만천하에 바로 세우기 위해 대대적인 흉노 정벌전쟁을 준비했다. 그동안 축적된 엄청난 국부가 든든한 밑천이었다. 장건을 월지국(月氏國)에 밀사로 파견했던 것도 그 일환이었다.

BC 133년 한무제는 드디어 흉노와의 43년 전쟁을 개시했다. 퍼주기를 중단하고 ‘전쟁으로 퍼붓기’를 시작한 것이다. 창고를 열어 국가의 재부를 전비로 퍼부었다. 장군들은 병졸과 군마를 전장에 퍼부었다. 흉노는 유목민 특유의 기동력으로 한나라 대군과 승패를 주고받았다. 그러나 엄청난 국부를 쏟아 붓는 한나라의 지구전에 서서히 무너져 갔다.

한나라는 어찌 되었는가. 한나라는 장기전으로 국부를 탕진했다. 창고가 비어가자 대신들은 온갖 명목으로 증세에 증세를 거듭했다. 공식적으로 관직을 팔았고 죄인은 돈을 받고 사면했다. 백성들은 징병과 증세 속에 전장으로 차출되거나 유민으로 떠돌았다. 한나라의 인구는 4천만에서 2천만으로 반 토막이 나고 말았다. 아비가 병졸로 출정했고, 몇 년 뒤에는 아비를 환송했던 아이도 전장으로 끌려갔다. 아무도 돌아오지 않았다. 마을의 남정네가 전부 전쟁에 나가버리니 불구였던 불행한 한 남자만이 운 좋게 살아남았다는 새옹지마(塞翁之馬), 여기에 기실(紀實)이 있다면 바로 이 시대가 아니었을까.

북방초원의 흉노는 새떼와도 같았다. 공격을 하면 흩어져 날아갔다. 공격을 멈추고 숨을 돌리면 다시 날아들었다. 황제에게 승전보고는 계속 올라왔으나 실제로는 허위보고가 넘쳐났다. 전비가 부족해졌고 대신들은 또 다른 전비 염출방안을 건의했다. 세금을 추가로 걷고 윤대에 둔전 방식으로 군대를 보내자는 것이었다. 전쟁에 지치고 재정부족에 허덕이던 한무제는 고심했다. 결국 더 이상 의미 없는 전쟁을 중지하기로 했다. 그게 바로 윤대의 죄기조다.

흉노와의 43년 전쟁을 벌인 한 무제

전쟁을 그쳤으니 한나라는 되살아났을까. 아니다. 국부는 이미 깡그리 탕진했고, 내치에서도 후유증이 심각했다. 흉노에게 항복한 이릉 장군을 두고 궁중에서 논쟁이 벌어졌다. 무리한 전쟁을 반대하는 사마천은 이릉을 옹호했다가 황제로부터 사형이 선고 받았다. 그는 살아남기로 했다. 치욕보다 고통스러운 궁형을 자처했다. 그리고는 피눈물로 <사기>를 써내려갔다. 무모한 전쟁으로 중원문명이 망가지는 현실을 기록으로 남긴 것이다.

황실도 무너졌다. 한무제 말년에는 반란으로 몰린 황태자가 자결하는 사건까지 일어났다. 이로 인해 한무제는 멘탈까지 완전히 붕괴됐고 얼마 지나지 않아 세상을 떠났다. BC 87년, 재위 55년, 전쟁 43년만이었다. 황태자가 죽었으니 제위는 어린 손자에게 넘어갔다. 더 큰 악순환이 시작되었다. 어린 황제를 둘러싸고 외척과 환관이 정치적 적대세력이 되어 서로 치고받았다. 권력을 두고 그들끼리 사생결단으로 싸웠다.

한나라는 치유불능에 빠져 들었다. ‘왕망의 신나라’라는 기괴한 푸닥거리도 그런 증세의 하나였다. 곳곳에서 황건적이 출몰했다. 한나라의 마지막 단원인 삼국시대로 넘어간 것이다. 껍데기뿐이었던 유 씨 황실은 폐기되었다. 조 씨의 위(魏)나라를 거쳐 사마 씨의 진(晉)나라로 껍데기를 바꿨다. 진나라는 팔왕의 난이라는, 사마 씨들끼리의 다자간 연속 쿠데타 끝에 스스로 종말을 고했다. 그것도 한(漢)이란 국호를 내세운 흉노인의 손에 영가의 상난(AD 311년)이란 참극을 당하면서 그리 됐던 것이다.

춘추전국시대에 백가쟁명이란 치열한 사상적 이념적 논쟁을 거쳐 구축된 중원문명은 종말을 고했고, 그들이 폄하해마지 않던 오랑캐들이 중원을 휩쓰는 5호16국 시대로 넘어갔다. 그 몰락의 커튼을 열어젖힌 장본인이 바로 한무제였다. 그 추락이 시작된 역사의 현장이 바로 이곳 윤대였다.

황제의 권력, 백성의 일상은 어느 시대를 보더라도 큰 차이는 없는 것 같다. 황제는 권력으로 백성을 휘둘렀고, 백성들이야 휘둘리지만 최소한의 일상까지 파탄이 나면 결국 황제까지 침몰시키곤 했다.

멀고도 먼 오지 신장의 룬타이라는 작은 현에서 나는 왜 중국의 고대사를 회고하고 있는가. 중의법으로 우리의 현대사도 함께 읽는다. 21세기 우리가 겪는 가장 큰 고통은 남북문제에 그 연원이 있다. 이념을 핑계로 한 권력 갈등은 우리 민족 대부분이 직간접으로 희생을 당하는 모진 전쟁으로 터졌었다. 휴전은 했으나 서로의 머리 위에 폭탄을 퍼붓겠다는 위협은 수십 년간 변함이 없었다. 잠시 퍼주었다는 시기도 있었다. 퍼주는 듯하자 퍼준다는 비난의 폭탄이 퍼부어졌다. 다시 퍼붓기 태세로 돌아섰다가 요즘은 퍼주기로 방향을 전환하고 있다.

한고조 유방은 퍼주었다. 황제는 굴욕을 감수했지만 백성들은 편안해지고 나라는 부강해졌다. 한무제 유철은 황제의 권위과 명분을 살리기 위해 국부를 전비로 지출하여 전쟁으로 퍼부었다. 백성들은 고통스러웠고 나라는 피폐해졌다. 결과는 황제는 물론 국가체제를 지탱했던 중원문명 자체가 몰락하고 말았다.

국부를 전비로 퍼부을 것인가, 아니면 전쟁 회피 비용으로 퍼줄 것인가는 결코 쉬운 결정이 아니다. 현실적으로야 두 가지가 적절하게 혼합되겠지만. 국제정치적인 현실과 국내의 복잡다단한 이해관계를 면밀하게 검토하고 신중하게 대처할, 대단히 어려운 선택의 문제다. 권력의 시선과 백성의 일상은 다를 것이다. 그러나 윤대의 죄기가 주는 교훈은 간명하다. 전장에서 퍼부을 것인가, 시장에서 퍼줄 것인가.

중국여행객 윤태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