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얼시劉二囍-서점의 온도書店的溫度 2

2 아광 阿光:서점의 소파객 书店沙发客

「일 년 전의 내 자신에게」

일 년 전, 그러니까 2013년 5월 26일, 대학교 2학년 2학기였던 네게는 오랜 꿈이 있었지. 그때 너는 네 자신에게 말했어. “쩌우천광(鄒晨光), 너도 차를 타고 중국 일주를 할 수 있어. 너는 뼛속 깊이 자유분방한 사람이잖아. 네 세계 안에서 네가 할 수 없는 일은 없어.”라고 말이야.
그러고서 너는 인터넷 ‘하얼빈(哈爾濱) 카페’에 정신없이 포스팅을 올렸어. 함께 미쳐서 여행을 떠날 친구를 찾는다고 말이야. 그때 너는 옆에 있던 친구에게 그 얘기를 했다가 아마 비웃음만 샀지…… 카페에서 한 친구가 너와 함께하겠다고 댓글을 달았어. 두 사람은 정신없이 대화를 나눴지. 서로 가고 싶은 데가 달라 결국 흐지부지되긴 했지만 말이야. 그러고 나서 그해 6월, 너는 실수로 다쳐서 수술을 받았고 집에 무려 석 달이나 누워 있었어. 또 실수로 수술 부위가 벌어졌기 때문이었지. 나중에 너는 베이징에 가서 인턴 일을 했는데 일을 마치고 1만 위안을 모았을 때 또 네 자신에게 말했지. “내가 하려던 일을 아직 못 했으니 이 돈을 다 쓰고 다시 일을 시작하자.”라고. 너는 2014년 6월 12일 졸업을 하고 학교를 떠났고 지금 2014년 12월 12일까지 벌써 6개월 동안 여행 중이야. 그 전에 올린 포스팅을 보고 있으면 절로 웃음이 나오곤 하지. 고향의 부모님과 친척 분들은 곧 설이 되면 뵙겠구나……

*

문에 들어서자마자 나는 ‘형님’이라는 소리를 들었다. 곧이어 약 백팔십 센티미터의 청년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다가왔다. ‘형님’이라는 그 한 마디에서 나는 동북 지역의 진한 사투리를 느꼈다.

눈앞의 그 청년은 검은색 면스웨터에 하얗게 바랜 청바지를 입고 목에는 염주를 걸고 있었다. 나는 바로 그와, 벽 밑에 놓인 65리터짜리 대형 배낭을 연결지었다. 며칠 전 점장이 내게 중국 일주 중인 청년을 재우게 됐다고, 그 청년은 벌써 반년 넘게 여행 중이라고 말했던 것이 떠올랐다. 과연 그 친구는 요 며칠 서점의 소파 방에서 묵어온 진정한 의미의 배낭족 아광이었다.

동북 사투리를 쓰는 아광은 동북 지역에서 오기는 했지만 동북 삼성(중국 동북 지역에 위치한 지린성[吉林省], 랴오닝성[遼寧省], 헤이룽장성[黑龍江省]을 뜻함) 사람은 아니었다. 동북 지역에는 사실 동북 삼성 외에도 내몽골(內蒙古)의 츠펑(赤峰), 퉁랴오(通遼), 싱안멍(興安盟), 후룬베이얼(呼倫貝爾), 이 네 지역도 포함된다. 그의 고향은 바로 후룬베이얼이었으며 그 어마어마하게 넓은 지역은 면적이 산둥성(山東省)과 장쑤성(江蘇省)을 합친 것과 맞먹었다.

하지만 너무 넓은 탓에 경내의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초원 중 하나인 ‘후룬베이얼초원’은 그조차 가본 적이 없었다.

더 재미난 것은 중국 일주를 절반이나 했는데도 그가 자기 고향이 속한 내몽골의 지방정부 소재지인 후허하오터(呼和浩特)에는 못 가본 것이었다. 후룬베이얼에서 후허하오터까지는 기차로 40시간 가까이 가야 했다. 후룬베이얼에서 가장 가까운 지방정부 소재지는 오히려 헤이룽장성의 하얼빈이었다. 아광은 기차로 “10시간밖에 안 걸리는” 바로 그 도시에서 대학 시절을 보냈다.

평생을 고위도 지역에서 살았으니 당연히 북방의 풍경만 눈에 익숙했을 것이다. 그러다가 여행채널의 다큐멘터리에서 본 남방의 경치가 그를 사로잡았다. 이 동북 출신 청년이 가장 가보고 싶었던 곳은 뜻밖에도 항저우(杭州)였다.

푸른 산에 끝없이 누각이 펼쳐졌는데
서호(西湖)의 가무는 언제나 그칠 것인가
따뜻한 바람은 향기로워 여행객을 취하게 하여
바로 항주(杭州. 항저우의 한자 이름)가 변주(汴州. 북송의 수도)인 줄 알게 하네 
山外靑山樓外樓
西湖歌舞幾時休?
暖風熏得游人醉
直把杭州作汴州

남송의 애국시인 임승(林升)의 이 시는 정치적 풍자를 담고 있는데도 그에게는 항저우의 분위기를 물씬 풍기는 시로만 읽혔다. 그리고 백사(白蛇)의 전설은 더더욱 그가 항저우의 서호를 동경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하얼빈에서 항저우까지 기차표가 얼마인지 검색하고 나서 그는 생각을 접었다.

나중에 그는 류창(劉暢)의 베스트셀러, 󰡔차 타고 베를린까지󰡕(搭車去柏林)를 보고 중국 일주의 희망이 머릿속에 싹트기 시작했다. 그래서 앞에 인용한 편지에 적힌 것처럼 대학교 2학년 때 인터넷 카페에 함께 항저우에 갈 친구를 구한다고 글을 올렸지만 불행히도 그의 꿈은 역시 이뤄지지 못했다.

더 나중에 졸업을 코앞에 두고서 그는 더 미뤄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더 미룬다면 아예 나중이라는 것이 또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2014년 6월 12일 교문을 나선 순간부터 그는 직장에 들어가는 대신 의연히 배낭을 짊어지고 기나긴 졸업여행을 시작했다. 일정표도 시간표도 없었던 그 여정은 혼자만의 축제이자 온 세상과의 만남이었다.

“만약 네가 어떤 곳에 가고 싶다면 온 세상이 네게 길을 열어줄 거야.”

**

아광은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 이른 아침의 밝은 햇빛이 사방에 넘실거렸다. 그날은 평소와 다름없는 하루인 것 같았다. 하지만 그때 아광은 이미 하얼빈에서 수백 킬로미터나 떨어진 어느 작은 군의 고속도로 요금소 의자에 앉아 꽈배기와 콩국을 먹고 있었다.

그 후로 반년 동안 그는 히치하이킹 위주로 자기가 방문한 도시의 명단을 늘려나갔다. 베이징, 타이안(泰安), 뤄양(洛陽), 시안(西安)을 거쳐 남서쪽 윈난성(雲南省), 귀저우성(貴州省), 쓰촨성(四川省)의 12개 도시를 돌아다녔고 그 다음에는 남하하여 후베이성(湖北省)의 샹양(襄陽), 우한(武漢), 징저우(荊州) 그리고 후난성(湖南省)의 창사(長沙), 샹탄(湘潭), 천저우(郴州)에 이르렀다. 광저우는 그가 현재 도착한 최남단 도시였고 여기에서 그는 맨 처음에 인용한, 일 년 전의 자기 자신에게 보내는 편지를 썼다.

가다가 머물다가, 또 머물다가 가다가 하면서 항저우와의 거리는 갈수록 멀어졌다. 그는 경찰차를 탄 적도 있고, 링컨 콘티넨탈을 탄 적도 있고, 관용차를 탄 적도 있었다. 그를 태워준 운전기사, 여관에서 일을 거들 때 알게 된 흥미로운 사람, 차비를 벌려고 노점을 하면서 마주친 행인의 이야기가 그의 커다란 배낭에 꽉 차 있었다. 이야기를 할 때면 그는 혼자 껄껄 웃곤 했고 중요한 대목에 이르면 크게 손짓발짓을 하며 초원 사내의 스타일을 드러냈다. 그가 이렇게 말을 잘하는 것을 보고 점장은 즉흥적으로 우산로(五山路) 지점의 심야 좌담회에 손님으로 와달라고 청했다. 그날 밤, 나도 그 좌담회에 가서 낯선 사람들 사이에 끼어 그의 입담을 감상했다. 한마디로 “배낭족의 세상에는 낯선 사람이란 없었다.”

출처 QQ.com

***

자신의 독보적인 이야기 솜씨 덕분에 아광은 잘 곳을 찾기 힘들었던 수많은 밤에 남의 집 소파 하나를 차지할 수 있었다.

윈난성 리장(麗江)에서 그는 석 달을 머물며 각양각색의 신기한 사람들을 사귀었다. 글 솜씨가 뛰어난 은행원도 있었고, 팝핀댄스를 추는 환갑의 노인도 있었고, 기타를 치며 민요를 부르는 가게 주인 그리고 다리(大理) 지역 ‘사쯔란뤄’(沙子蘭若) 사원의 50대 제자로서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을 술술 외우던 쑨(孫) 형도 있었다. 햇살 좋은 어느 날 오후, 아광은 리장에서 좌판을 벌이고 있다가 역시 옆에서 좌판을 차린 쑨 형을 만났고 그와 한 나절을 쉬지 않고 이야기를 나눴다. 나중에는 날이 저물었는데도 두 사람은 흥이 식지 않아 아예 함께 물건을 팔기로 했다. 그래서 그 불문에 몸담은 사람과 정처 없는 여행자는 리장의 돌다리 옆에서 찰랑찰랑 탬버린 소리가 울려 퍼지는 가운데, 오가는 여행객들에게 시솽반나(西雙版納. 윈난성 최남단에 위치한 태족[傣族] 거주 지) 산 터키석 팔찌의 신기한 효능에 관해 차근차근 설명했다. 그 말을 듣고 나서는 리장까지 와서 그 팔찌를 안 사면 장님이나 다름없다는 기분이 들어 다들 홀린 듯이 돈을 치렀다.

그 인연을 기념하기 위해 아광은 쑨 형에게 염주 한 벌을 샀고 그것을 목에 건 채 리장을 떠났다. 그리고 그 후로 이틀에 걸쳐 6킬로미터의 도보와 8번의 히치하이킹으로 루구호(瀘沽湖)에 도착했다. 중간에 비가 내리기 시작해 빗방울이 차창 위에 흘러내리며 불규칙한 선을 남겼고 먼 곳의 안개 낀 산봉우리는 아직 닿지 못한 피안처럼 보였다. 그는 여러 곳에 내리던 비를 떠올렸다. 초원의 비, 바다의 비, 국도의 비, 먼 곳의 비. 문득 그는 이별을 고할 때가 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연이 되면 다시 만나요.”는 그가 여행길에서 가장 많이 한 말이었다. 그는 다시 자신의 65리터 부피, 25킬로그램 무게의 배낭을 지고 루구호와 귀저우성 동남부와 징저우를 여행했다. 광저우에 오기 전, 그는 광저우 화난(華南)이공대학에 다니는 친구에게 연락을 했다. 그는 리장의 여관에서 만난 친구였고 그를 통해 그의 대학 근처에 무료로 소파객을 받아주는 서점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래서 숱한 산과 강을 넘어 우리는 이곳에서 만나게 되었다.

****

아광과의 대화는 사전 준비가 필요 없었다. 그의 현란한 입담 외에도 배낭족이라는 그의 정체성이 우리와 그가 한 생명과 다른 생명의 만남일 뿐이라는 것을, 그리고 주류와 비주류, 능동과 수동, 질문과 대답의 관계가 존재하지 않는 사이임을 결정지었다.

우리는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또 그가 노점을 차리게 해주었을 뿐이다. 아광은 리장에 있었을 때처럼 매일 햇볕을 쬐고 시베리안 허스키와 놀지는 않았다. 그는 숙소를 제공해준 주인을 도와 짐을 날랐으며 또 노점을 열었다. 낮에 일이 없을 때마다 근처 대학 캠퍼스에 가서 그 시솽반나 팔찌를 팔았다.

그는 자기 좌판 앞에 입간판을 세우고 큰 글씨로 ‘무전여행 중’이라고 적어 놓았다. 또 자기소개 삼아, “저는 후룬베이얼 사람이고 올해 대학졸업 후 배낭여행을 떠나 벌써 6개월째입니다. 팔찌 하나 사주시면 좋겠고 안 사주셔도 여기 앉아 인생과 꿈, 세계 평화에 대해 이야기합시다. 제 여행 이야기를 들어주시거나 이 노점의 여주인이 될 불을 소개해주셔도 좋고요.”라고 쓴 메모지도 붙여 놓았다.

며칠 전에는 한 여학생이 그가 쓴 입간판 글씨가 보기 싫다고 한사코 자기가 다시 써주겠다고 했다. 그녀가 쓱쓱 새로 글씨를 써주자 효과가 바로 나타났다. 금세 어린 아가씨가 다가와 팔찌를 구경했다. 그는 만면에 미소를 띠고 말했다.

“이 근처에서 제일 싼 물건이에요. 시솽반나에서 직접 가져온 팔찌죠. 하나에 20위안밖에 안 해요. 네? 조금 비싸다고요? 그러면 먹을 것하고 메신저 번호랑 바꿔도 된답니다.”

그날은 이미 연말과 가까워서 아광은 곧 고향에 돌아갈 예정이었다. 확실히 배낭족의 생활은 멋져 보이기는 해도 역시 고달팠다. 줄이 끊어진 그 65리터짜리 배낭은 아광의 전재산이었고 6개월간 매일같이 무게가 25킬로그램이었다. 심리적으로도 부담이 전혀 없지는 않았다. 매일 잘 만한 소파가 있는 것이 아니어서 밥 먹듯이 길가에 텐트를 치고 슬리핑백 안에서 잠을 청했고, 일을 해서 차비도 벌어야 했지만 날마다 순조롭지는 않았다.

누구도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 잭 케루악의 󰡔노상󰡕의 마지막 부분을 보면 이런 말이 있다. “태양이 서쪽으로 저물 때, 그는 오래 보수가 안 된 무너진 강둑 위에 앉아서 뉴저지 위쪽의 광활한 하늘을 바라보았다. 어둠이 곧 내려와 강과 산봉우리를 덮고 마지막에는 해안을 가려 대지에 평안을 가져다주며 초원에는 남은 석양빛을 쏟아부을 것이다. 길은 저마다 먼 곳으로 뻗어 있어 도착 못한 이들은 모두 그 풍요로움과 신비를 동경하고 있다.” 하지만 먼 곳에 도착하는 것은, 아광에게는 돌아갈 길이 더 멀어지는 것을 뜻했다.

하지만 누가 뭐라고 해도 “진정으로 자유로운 영혼은 정말 아무것도 개의치 않는다. 그들의 마음속 깊은 곳에는 국왕 같은 긍지가 있기 때문이다.” 길은 곧 삶이다. 예를 들어 그날, 밤이 되어 아광이 엉덩이를 털고 좌판을 접으려 할 때 한 아가씨가 그를 불렀다.

“이봐요, 잠깐만요. 저 기억하세요?”
“기억하고 말고요. 아까 제 간판에 글씨를 써주셨잖아요.”
“저기, 방금 전에 밀크티를 사다가 당신이 아직 여기 있는 걸 보고 한 잔을 더 샀어요. 자, 가져가세요. 아 참, 당신은 제 우상이에요.”

그녀는 말을 맺자마자 허둥지둥 그 자리를 떴다. 차가운 바람 속에서 바보처럼 씩 웃고 있는 아광을 뒤에 남겨둔 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