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방의 인문학 1-신장 쿠처 신비대협곡과 키질석굴 그리고 조선인 한락연

신장(新疆) 위구르 자치구는 면적이 우리나라의 17배 정도 된다. 이렇게 넓은 땅이지만 통째로 오지(奧地)이다. 오지란 해안이나 도시에서 멀다는 뜻이다. 세계에서 대양에서부터 가장 먼 땅이 바로 신장이다. 신장의 허리춤에 있는 쿠처(庫車)에서 가장 가까운 바다는 아랍해이다. 직선으로 2300킬로미터가 넘는다. 그나마 히말라야 산맥과 칭짱고원, 파미르고원 그리고 타클라마칸 사막이 가로 막고 있다.

쿠처(庫車)는 신장의 아커쑤지구에 속하는 현(縣)이다. 천산산맥 중단의 남록이고 타클라마칸 사막의 북쪽 가장자리를 흐르는 타림강(塔里木河)의 북안에 걸쳐 있다. 투루판에서 카스로 이어지는 실크로드 천산남로의 중간에 있는 교역의 요충지이고, 인도의 불교가 중원으로 전해지는 길목이었다. 정치사로 보면 고대에는 서역 36국의 하나인 구자(龜玆)였다. 한나라 시대에 서역을 개척했니 못했니 하는 일부 기간을 제외하면 청나라 이전까지는 중원의 황제가 호령하지 못하는, 멀고 먼 남의 땅이었다.

엔수이거우, 사진 윤태옥

쿠처는 연평균 강수량이 80밀리미터밖에 되지 않는 대단히 건조한 곳이다. 이로 인해 자연풍광은 극단적으로 황량하다. 그러나 여행객에게는 황량한 것이 오히려 장관을 이뤄 찬탄을 내지르게 된다. 쿠처 시내에서 북으로 빠져나가 옌수이거우(鹽水溝)를 지나 64킬로미터를 가면 천산신비대협곡이 있다. 옌수이거우는 도로 양옆으로 펼쳐진 자연 그대로의 지질공원이다. 입장료도 없이 화성으로 가는 느낌이다. 이 풍광만으로도 주눅이 들 수 있다. 원형의 톱날을 세워놓은 것 같은 능선에서 기괴한 형상의 봉우리까지, 상상 그 이상이다.

천산신비대협곡은 옌수이거우의 외계행성 같은 황량함과는 달리 붉은 색으로 두껍게 칠한 거대한 유채화 같다. 주 협곡과 거기서 갈라진 일곱 가닥의 협곡이 모두 5킬로미터 정도 된다. 높이가 200여 미터나 되지만 폭이 아주 좁은 협곡이다. 사람이 교행하기 어려운 곳도 있다. 바닥에 가늘게 흐르는 물이 굵은 모래 속으로 사라졌다가 다시 지면으로 솟아나기도 한다. 좁은 협곡 안으로 파고드는 햇살은 최고의 조명이다. 감탄사가 통상의 언어들을 압도한다.

신비대협곡, 사진 윤태옥

천산신비대협곡에서 화성이나 금성 어디쯤 헤매는 느낌 속에 빠졌다가 돌아 나오면 쿠처 북서쪽에 있는 키질석굴로 가야 한다. 자연에서 인문으로 전환하는 노선이다. 키질(Kizil)은 중국어로 커쯔얼(克孜尔)이다. 중국 최초의 석굴사원으로, 3세기부터 9세기까지 개착된 서굴군이다.

인도에서 발생한 불교는 간다라에서 중국으로 전해졌다. 쿠처가 길목이었다. 불교의 전파는 실제로 불상과 불경과 불승, 삼보(三寶)가 중국으로 간 것이다. 키질석굴에는 고대의 삼보가 담겨있다. 석굴 입구에 들어서면 구마라집(鳩摩羅什) 동상이 유려한 몸매로 눈을 감은 듯 뜬 듯 여행객을 맞이한다. 불경을 한어로 번역한 초기의 역경가로 유명한 불승이다. 바로 이곳 쿠처에서 출생했다. 구마라집은 401년 장안에 도착해 후진(後秦)에서 국사(國師)로서 12년 동안 제자들과 함께 반야경 법화경 금강경 등 74부 384권을 번역했다.

구마라집 동상, 사진 윤태옥

구마라집 동상을 지나야 석굴로 올라간다. 지금까지 확인된 석굴은 236개다. 이 가운데 10여 개 석굴이 일반에게 개방되어 있다. 불상과 벽화 대부분은 훼손되었다. 19세기 말 20세기 초 탐험대라는 이름을 내건 서양의 문명 도굴꾼들이 치명적이었다. 지금도 벽화가 200여 굴에 1만 평방미터 정도 남아 있지만, 상당량의 벽화는 도굴꾼들이 뜯어내 서방으로 가져갔다. 뜯겨진 벽화는 서양에서 오리엔탈리즘 수장가들에게 비싼 값으로 팔려나갔다. 현지인들의 오랜 문화와 역사는 그들에게는 돈벌이였고, 그들의 고상한 역사학과 인류학은 신장에게는 약탈의 깊은 상처였던 것이다. 특히 독일의 베를린인도예술박물관이 키질석굴 벽화를 다량 소장하고 있다. 그것은 유물인가 장물인가.

키질석굴, 사진 윤태옥

키질석굴에는 한국인에게는 특별한 석굴이 하나 있다. 10번 석굴이다. 사진 한 장 찍지 못하게 철저하게 관리하는 석굴이지만, 승방굴 하나를 조선인 한락연(韓樂然 1898~1947)의 개인 기념관으로 조성했다니 놀랍지 아니한가. 한반도에서 3500킬로미터도 더 되는 이곳, 눈 파란 사람들의 땅에 검은 눈의 조선인 한락연이라니. 처음 키질석굴에 갔다가 한락연을 조우한 그날 밤, 나는 숙소로 돌아와서는 중국 웹사이트에서 한락연을 부리나케 검색했다.

한락연은 20세기 전반 ‘중국의 피카소’라고 불렸던 중국 국적의 조선인 화가였다. 서역의 석굴들을 중국 측에서 본격적으로 연구한 초기의 전문가 가운데 한 사람이 한락연이었다. 그래서 승방굴 하나를 그의 기념관으로 조성한 것이었다.

그의 일생은 내겐 더욱 놀라운 ‘사건’이었다. 1898년 옌볜의 룽징(龍井)에서 태어났다. 윤동주 송몽규와 마찬가지로 간도로 이주한 조선인의 2세다. 1919년 3.13 반일시위를 준비하면서 밤 새워 태극기를 그린 탓에 블라디보스토크로 피신해야 했다. 1920년 상하이에서 고려공산당 창건에 참여했고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들어가 호위위원 직을 맡았었다. 1921년 상하이 미술전과학교에 들어가 본격적으로 미술을 공부했다.

당시 임시정부는 독립운동에 아무런 성과도 내지 못한 채 파벌싸움에 빠져들어갔고, 조선의 젊은이들은 러시아에서 울려온 혁명의 함성에 주목했다. 청년 한락연도 그랬다. 1923년 상하이에서 중국 공산당에 가입했다. 조선인으로 최초였고 중국 미술계에서도 최초의 입당이었다. 1924년에 선양으로 파견되어 만주 지역의 초기 개척자가 되었다. 여기서 개인전시회를 열었고 동아일보는 ‘예술계의 수재’라고 보도했다.

중국 공산당의 후원으로 1925년 3개월 동안 소련으로, 1931~37년에는 파리 루브르 예술대학으로 가서 미술을 공부했다. 중일전쟁이 터지자 귀국했다. 우한에서 저우언라이가 이끄는 동북항일구국총회에서 일을 했다. 이곳에서 미국인 여성 기자 아그네스 스메들리(주더의 전기 <한 알의 불씨가 광야를 불사르다>의 저자)와 에드가 스노우(<중국의 붉은 별> 저자) 등과 교류했다. 1938년 국공합작 일선에서 활동했고, 1939년 중국인 류위샤(劉玉霞)와 결혼했다. 1940년 봄 중국 국민당 특무대에게 공산당 활동 혐의로 시안에서 투옥되었다가 1943년 가석방 되었다.

1944년에는 중국 공산당으로부터 간쑤 신장 칭하이 등 서북지역 해방을 위한 비밀 임무를 부여받고 란저우로 갔다. 한락연은 공개적으로는 화가이자 석굴벽화 연구가로 활동했다. 키질과 둔황의 석굴벽화를 체계적으로 연구하면서 현지 소수민족의 소박한 일상을 화폭에 고스란히 담았다.

그러나 불운했다. 1947년 국민당 군용기를 타고 우루무치에서 란저우로 돌아오는 길에 비행기 사고를 당했다. 49세였다. 그의 부인은 남겨진 작품 135편을 모두 국가에 기부했다. 지금은 베이징의 중국미술관에 영구소장 되어 있다.

그가 세상을 떠나고 40여 년이 훌쩍 지난 1993년, 한중 수교 1주년 기념으로 서울에서 <조선족 예술혼 천재화가 한락연 유작전>이 열렸었다. 2007년 대한민국 정부가 광복 60주년을 기념하면서 한락연에게 대통령 표창을 수여했다. 한국의 국립미술관과 중국의 중국미술관이 서울에서 한락연 전시회를 공동으로 열었었다. 중국에서는 그를 중하게 기억했다. 옌볜 조선족 자치주의 룽징시 중심에는 그의 이름을 딴 낙연공원이 있다. 그곳에 그의 흉상도 세워져 있다.

처음 키질석굴을 갔던 그날의 기억은 지금도 절절하다. 내겐 충격이었다. 한동안 멍하게 쳐다봤다. 이게 무슨 일인지 가늠하기 어려웠다. 사진촬영이 엄격하게 금지된 곳이지만 감시원이기도 한 안내원에게 통사정을 하면서 한락연의 자화상을 핸드폰으로나마 정성스레 촬영했다.

키질석굴의 한락연, 사진 윤태옥

키질석굴에서 한락연을 조우하고는 나는 나의 알량한 독립운동사를 되짚었다. 일본 제국주의에 사회주의로 저항한 것은 당시의 거대한 역사 흐름이었다. 어떤 이들은 중국 땅에서의 반제국주의 혁명은 중국 공산당이 중심이라고 생각하고 중국 공산당에 입당해서 활동했다. 중국의 반일 혁명투쟁이 우리의 독립에 도움이 되는 불가피한 관문의 하나라고 생각했다. 의열단의 김원봉은 물론 광저우기의의 김산 김성숙, 만주벌판을 피로 물들인 수많은 동북항일연군, 일제가 패망할 때까지 일제와 실제 전투를 벌인 타이항산의 조선의용군도 그랬다. 그들은 모두 서로 다른 곳이지만 같은 아리랑을 부르면서 몸을 던졌다. 거대한 역사의 ‘플래시 몹 아리랑’ 속에서 죽어간 이들이다. 한락연도 그 가운데 하나였던 것이다.

그러나 일제가 패망하면서 한국전쟁이란 거대한 비극이 덮쳐버렸다. 남북대결 속에서 한락연과 같은 인물은 이념을 핑계로 권력의 이해에 따라 가르치고 배우는 역사에서는 숙청당했다. 다행스럽게 1990년대 들어서서 정부는 한락연의 독립운동에 포상을 했지만, 아직도 대중적으로는 미지의 인물에 가깝다. 우리는 아직도 분단과 전쟁의 편견에서 질척대고 있다. 독립운동사의 지평부터 넓혀야 한다. 아직 멀기만 한 걸까.

신장은 우리와의 연관은커녕 중국 땅도 아니라고 생각하기 쉬운 곳. 이런 낯선 오지에서 조선인의 흔적을 대면하는 것이 신기해 보이는가. 그러나 신기한 일은 아니다. 우리 관념 속에 우리의 활동영역을 좁게 설정해서 신기한 것이다. 지리적으로도 생각의 영역을 넓혀야 하는 역사였고, 그게 오늘의 현실이기도 하다.

윤태옥 (중국여행객)

여행팁 : 쿠처를 가려면 일단 신장의 수도인 우루무치로 가야 한다. 우루무치에서 국내선 항공이나 시외버스, 기차를 이용할 수 있다. 직선으로는 430킬로미터지만 육상교통으로는 천산산맥을 돌아서 750킬로미터를 가야 한다. 지도를 보면 신장의 나라티 초원에서 남쪽으로 천산을 넘어가면 바로 쿠처이지만 중간에 있는 허징현(和靜)이 외국인 비개방 지역이라 통과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