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고대 사회

1966년 1월 15일, 구졔강 선생이 중국 고대사회에 대해 이야기했다.

오늘은 밤새 큰 눈이 내린 바로 다음 날로 맑은 해가 막 떠오르기 시작했다. 내가 구 선생의 병실로 들어갔을 때 선생은 얼굴에 홍조를 띠고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마치 손님을 기다리는 사람처럼 소파에 앉아 있었다.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구 선생님, 선생님께서 십여 일 동안 계속 가르침을 주셔서 제게 무척 도움이 되었습니다. 이미 중국 정사(正史)․중국 잡사(杂史)․중국 고적의 정리와 연구, 경학․한학․고증학 그리고 역사과학(歷史科学)과 고고학 등과 같은 큰 제목, 큰 학문을 이야기하셨습니다. 이제 선생님께 중국 고대 사회, 중화민족의 연원, 중국의 철학․문학․종교 등 각 방면의 개요를 청하고 싶은데 괜찮으시겠습니까?”

“좋지, 좋아! 그럼 오늘은 중국 고대 사회를 얘기하도록 하지!”

구 선생은 이야기를 시작했고 나는 재빨리 펜을 들었다.

고대 중국의 사회 제도는 어떠했을까? 이 문제를 연구하는 데에는 어려운 점이 있다. 현재는 중국 고대 사회에 관한 사서는 없고 단지 고대 사회의 기물만이 있을 뿐이다. 그러면 역사 시기 이전의 수십 만 년 동안의 역사를 어떻게 연구할 것인가? 사회 발전사를 찾아 볼 수밖에 없다.

외국인은 먼저 로마와 그리스에 보존되어 온 서양 씨족사회 말기의 흔적을 연구한 후, 아메리카 인디언의 씨족사회 전성기의 제도를 연구했다.1 인디언의 초기 사회 제도에 관한 자료 역시 없다.

미국인 모건은 고대 사회를 연구하여 고대 인류의 많은 일들을 알아냈다.2 고대 사회에는 한 씨족 내부의 형제 자매가 서로 혼인할 수 있는 혈족혼인제(血族婚姻制)가 있었다. 뒤에는 군혼제(群婚制), 즉 한 씨족의 남녀는 같은 씨족의 남녀와 통혼할 수 없고 다른 씨족의 남녀와 통혼해야 하는 제도가 성립되었는데, 이것은 좀더 진보된 것이었다. 그러나 군혼제는 한 씨족의 모든 여인이 다른 씨족 모든 남자의 처가 되는 것이므로 자연히 한 남자와 한 여자가 고정적인 부부관계가 되는 것은 아니었다.

군혼제 이후, 다시 진보하여 대우제(对偶制)가 생겨났다. 한 여자는 한 남자만의 짝이 될 수 있었다. 동시에 많은 여자와 남자들은 서로 짝이 바뀌기도 했다. 그러나 이 같은 한 남자와 한 여자의 혼인도 장기적으로 고정된 것이 아니라 사람이 바뀔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고대 사회에서는 누가 아버지인지 알 수 없었고 어머니만을 알 수 있었다. 그래서 선고시대(先古时代)는 씨족사회이며 모계사회였다. 모계사회에서는 모든 것이 여성 위주로 진행되었다.

여기에서 다시 발전하여 일부일처제(一夫一妻制)가 실행되었다. 한 여자가 처가 되면 고정되어 장기적으로 한 남자의 아내가 되는 것이다. 남자도 고정되어 한 여자의 남편이 되었다. 일부일처제가 출현하자 아버지를 모르고 어머니만 아는 현상은 나타나지 않게 되었다. 거기에 노동 분업의 발전과 변화로 인해 남자가 주요한 노동자로 등장하면서 역할이 커졌고 지위도 높아졌다. 그러므로 모계사회는 점차 부계사회로 발전, 변화했다.

모계사회․부계사회 초기에는 모두 여전히 씨족사회였다. 옛 씨족사회 시대에는 인류가 평등하고 자유로웠다. 이 시대의 생산력은 그다지 높지 않아서 생산물은 겨우 먹기에 족할 만큼만 생산되었다. 잉여물이 없으므로 잉여 재산도 없었고, 자연히 재산의 사유 개념도 없었다.

일부일처제가 실행된 후 아이들은 모친뿐만 아니라 부친도 알게 되었고 부친이 자녀를 지배할 수도 있게 되었다. 사냥과 전쟁에서 남자들의 역량은 여자들에 비해 컸고 역할도 명백했다. 또 생산력의 발전에 따라 노동의 산물은 모두가 쓰고도 남았다. 그에 따른 잉여재산의 출현은 큰 사건이었다. 잉여재산이 생김에 따라 사유재산이 생기고, 재산의 사유 개념과 사유 제도도 생겨나게 되어 인류 사회에 큰 변화가 일어났다.

이렇게 해서 씨족사회에서 노예사회로 향하게 되었다. 노예의 근원은 전쟁이었다. 한 씨족과 다른 씨족 사이에 끊임없이 다툼이 생겨 결국 전쟁이 발생하게 되고, 그 전쟁의 결과 포로가 생기게 된다. 그 포로에게 노동을 시키되 노동은 많이, 소비는 적게 하도록 하고 그 소득을 본인이 향유하지 못하고 바치도록 함으로써 그 포로는 노예가 된다. 이렇게 하여 노예주와 노예가 나타나 노예사회가 출현하게 된 것이다.

모계사회는 약 수십 만 년 동안 장구하게 지속되었다. 그러나 이 장기간의 역사 과정에 대해는 기록도 사료도 없으므로, 역사서라 할 만한 것 역시 없었다. 모계사회 형성의 주요 원인은 아이가 아버지를 모르는 채 단지 그를 낳고 먹이며 키워 준 어머니만을 알았다는 데 있다. 역사적 기록이 없으므로 모계사회는 분명하게 알 수 없으며, 단지 부계사회와 그 발전만을 알 수 있다. 원시 씨족사회의 상황을 알아보려면 사회 발전사에만 의존할 수밖에 없다.

이제 중국의 고대 사회에 대해 이야기해 보자.

아주 오래 전의 중국 사회에는 성(姓)과 씨(氏)가 있었다. 성과 씨는 구별되는 것으로 여자는 성을, 남자는 씨를 사용했다. 성은 어머니의 것이며 여인의 것이었으므로 대대로 전해졌다. 씨는 남자의 것이기 때문에 하나의 성에는 다른 씨가 있었다. 고대의 씨 가운데 어떤 것은 관명(官名)이었고, 또 어떤 것은 지명(地名)이었다. 또한 남자도 ‘호(号)’를 사용할 수 있었다.

중국의 고대 성 가운데 현재까지 볼 수 있는 것으로는 ‘지(姬)’․‘장(姜)’․‘웨이(女为)’․‘쓰(姒)’… 등이 있는데 모두 계집 녀(女) 자가 들어 있다.

고대 남자들의 씨 뒤에는 이름을 붙였고 여자의 성 뒤에도 이름을 붙였는데, 여자들은 일(一)․이(二)․삼(三)……과 같은 항렬을 자신들의 이름으로 삼았다. 여자들은 출가하면 이름을 쓰지 않았다.

또한 한 여인이 출가하면 여동생도 같은 왕(王)이나 후(侯)에게 시집을 갔다. 이것은 군혼제의 흔적인 듯하다. 이런 상황은 서주(西周)와 춘추 시기 모두에 있었다. 서주 시기의 시 모음집인 《시경(诗经)》 가운데 「한혁(韩奕)」이라는 시가 있다.

한후가 맞이하는 배필이 될 이 ……
뒤 따르는 신부들은
고요하고 단정하기 구름 같더라
한후께서 뒤돌아 보시었더니
눈부신 그 빛 문에 가득 찼도다
(韩侯娶妻 …… 诸娣从之 祁祁如云. 韩侯顾之 烂其盈门.)

이 시는 일부다처제(一夫多妻制)를 증명하고 있는데, 여인은 여전히 군혼제의 잔존물이었다.

중국의 고대 사회에 관해서는 상세한 자료가 없다.

1966년 1월 16일, 구졔강 선생이 계속하여 중국 고대 사회에 대해 이야기했다.

고대 중국의 씨족사회 모계사회 시대의 각 씨족은 자신들의 선조가 있었다. 이때의 씨족이란 이른바 자신의 선조, 즉 신(神)이다. 이 신이 한 씨족의 진정한 종조(宗祖)는 아니었다.

그 당시의 ‘씨족’은 종교 식으로 연합된 것으로, 혈통이 온전하게 대대로 전해진 것은 아니었다. 한 씨족은 다른 씨족을 불러들일 수 있었고, 몇몇 씨족의 연합은 ‘포족(胞族)’이라고 일컬었다. 포족은 또 다른 포족과 연합할 수 있었고 여러 포족이 연합한 것을 ‘부락(部落)’이라고 칭했다. 여러 부족이 연합한 것을 ‘연맹(聯盟)’이라고 불렀고, 연맹은 ‘국가’로 발전했다. ‘국가’의 형성은 씨족 사회로부터의 이탈을 의미했다. 씨족사회는 유동적이지만, 국가는 지역적이며 고정적이기 때문이다.

씨족사회 시기의 사람들은 평등했지만, 국가가 출현하자 인류 상호간의 평등은 소실되고 말았다. 사람 사이의 불평등이 나타나 인민은 귀족 노예주의 통치 대상이 되었다. 귀족 노예주 통치자 가운데 최고(最高)의 사람이 국왕, 황제였다. 이들은 말하자면 하늘의 아들로서 가장 존귀한 존재였다.

국가의 통치자가 반드시 같은 씨족인 것은 아니었다. 통치자는 자칭 하늘의 아들이라 했고, 상제(上帝)로서 많은 신들을 주관한다고 여겼다. 통치자는 자신을 가장 존귀한 신으로 간주했다.

국왕은 신권(神权)․족권(族权) 그리고 군권(军权)의 혼합체가 되었다. 이를테면 주나라 때의 왕은 각각의 족에게 분봉하여 자신이 각 족의 존장(尊长)이 되었다. 왕의 권력은 매우 커서 모든 권력이 그 한 사람에게 집중되었는데, 이로부터 노예사회 제도가 생겨났다.

노예사회 제도는 고기나 짐승을 잡는 것과 같은 노동의 발전, 즉 경제적인 원인에서 생겨났다. 잉여물이 생기고 사유재산이 생김과 동시에 전쟁으로 포로가 생기면 노예가 되었다. 씨족사회 초기에는 여성이 우두머리였으나 후기에는 남성으로 바뀌었다.

이제 중국 모계사회의 남아 있는 흔적에 대해 이야기해보자.

중국의 모계 씨족사회는 그것에 관한 사료가 없고 문자로 기록된 것도 없으므로 선사 시대에 속한다. 하지만 이것은 역사 시대의 남아 있는 몇몇 흔적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것은 󰡔시경󰡕의 민가에서도 얼마간 찾을 수 있는데, 상대(商代)에 관한 고시 두 수(首)가 있다. 첫 번째 시는 「현조(玄鸟)」다.

하늘이 제비에게 분부하시어
내려가 상의 선조 설을 낳게 하사
망망하게 넓은 은 땅에 살게 했네
(天命玄鸟 降而生商 宅殷土芒芒)

玄鳥,사진 출처 活動行

두 번째 시는 「장발(长发)」이다.

천지가 홍수로 망망할 때에
대우께서 천하를 다스리시고
여러 대국 경계를 정했으며
국토를 널리 멀리 펼치셨도다
그때에 유융 나라 번창하나니
천제는 그 딸에게 상을 낳게 하셨네
(洪水茫茫 禹敷下土方 外大国是疆.
幅陨旣长 有娀方将 帝立子生商)

이 시대의 인류는 이미 남자가 존장, 우두머리가 되었다. 이 󰡔시경󰡕의 두 시는 상(商)과 상 왕이 하늘에서 내려온 것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에게 모친은 있었으나 부친은 없었다.

󰡔여씨춘추(呂氏春秋)󰡕에도 기록이 있다.

유융씨에게는 두 딸이 있었는데 참으로 아름다워, 부친은 딸들이 마땅히 천자에게 시집가야 한다고 말했다. 그래서 높은 대를 지어 놓고 상제에게 이 두 딸아이를 보라고 청했다. 상제는 ‘현조(玄鸟):제비)’에게 알 두 개를 주어 내려보내 물어다가 높은 대에 올려놓게 했다. 큰딸은 그 알을 삼키고 뒤에 「설(契)」을 낳았다. 「설」은 남자 아이였다. 설에게는 부친이 없었고 모친은 유융씨였다. 상에서는 설을 시조로 여겼다.

이 글의 의미는 앞서 󰡔시경󰡕에서 말한 것과 같은 것인데, 모두 천명(天命)으로 현조가 대지로 내려와서 상의 왕을 낳았고, 상 왕은 단지 유융씨인 어머니만을 알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부친이 누구인지는 모른다. 말하자면 그의 부친은 마땅히 하늘, 즉 신이라는 것이다.

은(殷)․상(商)의 갑골문에도 이런 내용의 글이 있다. 하나는 󰡔비을(妣乙)󰡕이다. 이것은 특별히 모성(母性)을 제사하는 제문으로 제사의 대상은 유융씨일 수도 있고 현조일 수도 있다. 그러므로 이르기를 설은 아비 없이 낳았고, 상제가 낳은 것이라 하는 것이다.

이러한 것들은 모두 모계사회의 흔적으로 모계사회 시기의 사람들은 모친만 알았지 부친은 몰랐다는 것을 설명한다.

위에서 말한 부분은 상대에 관한 것들이다. 다시 주대에 관한 것을 이야기해 보자. 주대에 관한 것도 《시경(诗经)》 가운데에서 두 수를 찾아볼 수 있다. 첫째는 「생민(生民)」이다.

주 나라의 조상을 낳으신 분은
고신 씨의 후비인 강원이셨네
애초의 낳으심은 어떠했나
정성 들여 제사를 받들고 모셔
아들 없는 재앙을 물리치시고
천제 발자국 밟고 태기 있으매
하늘의 은총이 더하셨도다
잉태하신 후로도 몸 삼가셔
마침내 낳으시고 키우셨으니
그 분이 바로 시조 후직이셨네
(厥初生民, 时维姜嫄, 生民如何, 克禋克祀, 二弗无子, 履帝武敏歆, 攸介攸止, 载震载夙, 载生载育, 时维后稷) (기록자 주: 위에 기록한 시와 해석은 모두 구 선생이 말하고 쓰고 해석한 것이다. 아래에 기록한 것도 모두 그렇다.)

또 「비궁(閟宫)」이 있는데 역시 주대에 관한 것이다.

빛나는 강원께서는
그 덕망에 조금도 티가 없으셔서
그 천제께서 그 몸에 영험 내리니
사소한 재앙조차 해 됨이 없네
태기가 있으신 후 달이 찬 다음
주의 시조 후직을 낳으셨도다
(赫赫姜嫄 其德不回 上帝是依 无灾无害 弥月不迟 是生后稷.)

이 시는, 주 왕과 그 선조는 바로 천상의 신이 강원이란 여성이 마음에 들어 그녀로 하여금 낳게 한 것이라는 사실을 말하고 있다. 그래서 주의 왕과 주의 선조는 모두 신의 뜻으로 강생한 것으로, 여기서도 어머니에 대해는 언급하고 있으나 아버지는 거론하고 있지 않다.

이것은 《사기》에도 기록되어 있다. 《사기》에 강원은 제곡(帝喾)의 후비로서 제곡과 함께 산보하다가 (후인들은 제곡을 인류의 제왕이라 말하지만 실제로 이런 인물, 이런 제왕은 없었다) 거인(巨人)의 발자국을 보았는데, 그것을 보고는 임신하게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주대의 왕은 스스로 자신의 모성(母性)의 선조가 ‘강원’이라 여겼다고 말하고 있다. 주 왕은 또 그들 최초의 남성 선조가 ‘후직’이라고 생각했다. 이로 볼 때, 이른바 남녀 선조는 모두 없었던 것이다.

‘후직’은 무엇인가? 농사의 신, 즉 농신으로, 직은 정미(精米)다. ‘강원’은 어떻게 된 것인가? 주 왕은 언제나 강 성(姓)의 씨족과 통혼했으므로 최초의 여성 선조를 ‘강원’이라 미루어 생각했던 것이다. ‘원(嫄)’은 ‘원(源)’으로, 곧 주 왕조의 근원을 말한다.

위에서 말한 《시경(诗经)》 의 기록을 보면 상과 주 두 조대 제왕들의 선조는 모두 여성이다. 상의 여성 선조는 유융 씨이고 주의 선조는 강원인 것이다. 하지만 상과 주의 부계, 즉 남성 선조로는 의거할 만한 것이 없고 상과 주 제왕의 집안도 명백하지 않다.

이 시기, 즉 상과 주는 모두 국가로서 ‘씨족’, ‘부락’, ‘연맹’과 같은 상고 시대가 아니었다. 이 시기는 이미 씨족사회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었다. 하지만 씨족사회, 모계사회 때의 남아 있는 흔적은 약간씩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