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안커袁珂의 중국신화학 대담

대담: 정재서(전 이화여대 중문과 교수)
김선자(연세대 중문과 강사)
정리: 이유진(연세대 중문과 강사)

중국신화학의 거목이 쓰러지다

정재서 : 위안커 선생이 지난 7월에 돌아가셨죠?

김선자 : 네.

정재서 : 그 소식은 어떻게 들으셨습니까?

대담을 나누고 있는 정재서 교수(오른쪽)와 김선자 선생, 사진 ⓒ 조관희, 2001

김선자 : 조관희 선생님을 통해서 중국에서 소식이 온 것을 들었는데, 돌아가셨다고 하니 마음이 안 좋더라구요. 한번쯤 뵈었으면 했는데 기회가 안 닿아서 못 뵀어요. 50년 동안 신화연구만 하셨는데,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고 많이 서운했어요. 오늘 이런 기회로 해서 위안커 선생의 50년에 걸친 연구성과를 얘기할 수 있게 되어서 기쁩니다.

정재서 : 위안커 선생이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으니까 감회라는 게 있는데요. ‘중국신화의 큰 거목이 쓰러졌구나’라는 느낌과 아울러서 중국 신화학이 앞으로 어떻게 변할까, 사실 이 분의 죽음이라는 것이 물론 자연인의 죽음이기도 하지만 중국신화학의 한 시기를 마감하는 큰 의미를 지니고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그 분의 학문적인 생애와 업적, 그리고 학문적인 입장들에 대해서 우리가 정리 해야만이 그것을 바탕으로 해서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길을 모색할 수 있을 겁니다. 그 분이 85세로 돌아가셨으니까 1916년생인데, 쓰촨(四川) 출신으로 화시(華西) 대학을 나오신 걸로 알고 있어요. 이 분이 젊은 시절에는 어떻게 활동하시고 공부하셨나요?

김선자 : 타이완에 잠깐 다녀오신 걸로 알고 있는데요. 위안커 선생의 스승 되시는 분이 쉬서우창(許壽常)이라는 분인데, 그 분이 타이완 국립편역관 일을 하러 가시는데 같이 따라가서 거기서 공부를 좀 하시다가 다시 쓰촨으로 돌아오셔서 그때부터 신화를 본격적으로 공부하기 시작하시면서 자료정리도 하셨어요.

『산해경교주(山海經校注)』와 『중국신화전설(中國神話傳說)』- 중국신화학의 기념비적인 대표작

정재서 : 이 분이 특히 우리 한국 학계에 본격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기념비적인 업적들 때문인데요.

김선자 :『산해경교주』와 『중국신화전설』이 소개되면서 알려지기 시작했는데요. 이 두 책이 사실 신화학계에 있어서 기념비적인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지요.

정재서 : 공교롭게도 두 책에 대해서 저와 김선생님이 중요한 관여를 했어요. 1985년에 제가 처음으로 『산해경』을 번역할 때에 중요한 저본으로 삼았던 것이 위안커 선생의 『산해경교주』이거든요. 그리고 김선생님이 『중국신화전설』을 전인초 선생님과 공역을 하셨지요. 위안커 선생의 중요한 두 가지 업적과 밀접한 인연을 맺고 있는 입장에서 김선생님과 이야기하니 감회가 더욱 새롭네요.

정재서 교수, 사진 ⓒ 조관희, 2001

『산해경교주』의 장점- 현대신화학의 기초 작업, 명확하고 합리적인 해석

김선자 : 그러면 먼저 위안커 선생의 두 가지 업적에 대해서 얘기를 해야 할 것 같아요. 『산해경』이라는 책이 청나라 이후로 오랫동안 연구가 안 되다가 1920년대에 역사를 연구하는 사람들을 중심으로 신화에 대한 관심을 갖기는 했지만 『산해경』에 대해 본격적으로 관심을 갖고 새로운 주석 작업을 했던 사람이 바로 위안커 선생인데요. 선생님께서 『산해경교주』를 저본으로 번역작업을 하시면서 의견이 통했던 부분이나 비판적인 부분에 대해 말씀해 주시죠.

정재서 : 『산해경』이 중국신화학에서 아주 중요한 책인데요. 『산해경』에 대한 주석이 궈푸(郭璞) 이후로는 없다가 명대에 생겨나고 청대에 하오이싱(郝懿行)이 집대성을 했지요. 그리고 현대에 들어와서 위안커 선생이 작업을 하셨는데요. 현대신화학을 위한 기초 작업으로서 상당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데요. 전통 시대의 주석 체계에서 벗어난 현대신화학의 토대로서의 주석 작업이라는 측면에서 굉장히 중요한 작업이지요. 궈푸이나 하오이싱의 주석에서 미진했던 부분, 그리고 그들이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부분들에 대해서 위안커 선생이 상당히 정심(精深)한 작업을 했지요. 그래서 새롭게 발견한 부분들이 많아요. 궈푸이나 하오이싱의 주석만으로는 번역작업이 상당히 힘들었을 텐데, 위안커 선생의 명확하고 합리적인 해석 덕분에 분명하게 의미를 파악할 수 있었습니다. 이런 장점 덕분에 많은 도움을 받았지요.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위안커의 신화해석학에 대한 문제의식도 슬며시 생기더라구요.

김선자 : 그 부분에 대해 구체적으로 말씀해 주세요.

『산해경교주』의 단점- 한족중심주의적인 시각, 경험주의로 환원시키는 경향

정재서 : 위안커 선생의 설명은 명쾌하고 합리적일 뿐만 아니라 모르는 부분은 모른다고 하시지요. 게다가 민속학이라든가 문자학이나 성운학과 같은 전통적인 방식과 현대적인 해석학을 모두 동원하셨는데요. 현대적인 해석학의 방법이 맑스주의 사회학에 기울어진 탓에 단선적인 측면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당시로서는 기초적인 해석을 위해서 상당한 공헌을 했다고 봅니다. 그렇지만 제가 미심쩍었던 것은, 『산해경』은 중국뿐만이 아니라 주변민족들과도 관련된 상호텍스트적인 책임에도 불구하고 너무 중심문화적인 차원에서 해석하지 않았나 하는 점입니다.

김선자 : 한족중심적인 측면이 엿보이는데요. 다른 논문들에서도 일관되게 그런 시각이 나타납니다. 위안커 선생이 주장한 광의(廣義)의 신화 중의 하나가 바로 소수민족의 신화인데요. 소수민족의 신화를 중국신화의 범위에 집어넣으면서 덧붙여 말하기를, “소수민족의 신화는 한족의 신화와 더불어 발생하고 한족의 신화와 보조를 맞추면서 같이 연변하고 발전하고 전승되었다”고 했어요. 1950년대에 『중국고대신화』가 나왔을 때에는 소수민족신화에 대해서는 언급조차 안 하다가 80년대에 나온 『중국신화전설』에서는 광의의 신화 개념을 도입하면서 소수민족신화를 맨 마지막인 9번째에 끼워 넣었는데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수민족의 신화는 한족의 신화와 같이 성장하고 발전하였다는 식으로 한족중심적인 시각은 처음부터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지요. 『산해경교주』에도 그런 시각이 상당히 들어있을 텐데요.

김선자 선생, 사진 ⓒ 조관희, 2001

정재서 : 그게 바로 제가 『산해경』 주석 작업을 하면서 느꼈던 문제의식이지요. 『산해경』에 나오는 숙신(肅愼)이나 고조선(古朝鮮)과 관련된 기록을 예로 들자면, 종래의 주석가들이 해석하지 못한 부분들에 대해서 위안커 선생이 시도한 관점이 상당히 중심주의적이라고 할 수 있는데요. 중원문화의 부속적인 영향관계로 파악하고 피지배관계로써 해석한 시각에 의문을 느꼈습니다. 그리고 신화에 대해 지나치게 경험주의적이고 합리주의적으로 해석한 점도 문제라고 할 수 있는데요. 신화는 분명 일상언어와는 다른 신화의 논리가 있는 것인데, 그것을 신화논리로 풀지 않고 일상의 경험주의로 환원시켜서 해석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것은 아무래도 시대적 한계 때문이라고 봐야겠죠.

기초 작업의 공로는 인정해야, 기초작업을 건너뛰려는 우리 현실을 돌이켜보게 해

김선자 : 그럼에도 불구하고 『산해경교주』는 신화연구자들에게 상당한 공헌을 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신화연구자들이 같은 수고를 되풀이하지 않게 기초적인 작업을 한 그 공로는 정말 위대하다고 하겠죠. 위안커 뿐만이 아니라 중국의 각 학문에 그러한 원로들이 있다는 건 정말 부러운 일입니다. 기초적인 작업을 해주고 자기 삶을 다하는 그런 역할을 하는 선배, 말하자면 거물들이 있죠. 도교학 분야에서는 왕밍(王明) 선생이 바로 그런 분이신데요. 도교의 대표 서적인 『포박자(抱朴子)』와 『태평경(太平經)』, 그러니까 민간도교로서의 『태평경』과 상층도교로서의 『포박자』에 대한 교감을 했거든요. 기초적인 작업이 되어 있기 때문에 후속세대들이 그것을 발판으로 다음 작업을 할 수 있거든요. 그런데 우리의 형편을 비춰 보면 그런 작업을 건너뛴 채로 일본 번역판이나 일본 중역판, 또는 중국 백화 중역판에 의지해서 적당히 그런 작업을 건너뛰고 무조건 앞으로만 가려고 하는 상황이 아닌가 하는 반성을 하게 되구요.

『중국고대신화』에서 『중국신화전설』로―30년에 걸친 끊임없는 증보 작업, 방대한 자료

정재서 : 『산해경교주』 못지않은 이 분의 중요한 업적이 바로 『중국신화전설』인데, 여기에 대해서는 훌륭한 문장과 좋은 역주를 보태셔서 훌륭한 번역으로 위안커 선생의 업적을 더 빛나게 해주신 김선자 선생님의 말씀을 들어봐야 할 것 같습니다. 번역 작업에 착수하신 동기는 무엇이었습니까?

김선자 : 지나친 찬사시구요. 중국신화에 관심을 가지면서 처음 접했던 책이 『산해경』인데, 그때는 위안커 선생의 교주본도 없을 때였어요.

정재서 : 제가 저본으로 한 것도, 그 당시에는 대륙책을 못 구했기 때문에 타이완 이인서국(里仁書局)에서 위안커 선생 이름도 없이 그냥 위안(袁) 주(注)라고만 해서 출판한 것이었지요. 이인서국이 그 당시 좋은 책들을 전문적으로 해적판으로 출판했었는데, 거기에서 나온 위안커 선생의 책을 제가 81년에 구해서 그것을 저본으로 삼았었죠.

김선자 : 그 이전에는 하오이싱이 주석을 단 『산해경』을 보면서 공부했었죠. 그리고 위안커 선생의 『중국고대신화』를 접하게 되었는데요. 상하이상무인서관(上海商務印書館)에서 나온 얄팍한 책이었는데, 대학원에 다닐 때 흥미롭게 봤어요. 이것이 나중에 『중국신화전설』이 되면서 중국의 단편적인 신화를 가지고 이리저리 이어 붙였다는 혐의를 굉장히 많이 받고 비판의 대상이 되긴 했지만 어쨌든 처음부터 끝까지 읽혀지는 중국신화, 그러니까 그 이전까지는 중국에 과연 신화가 있었는가 조차도 모를 때 처음부터 끝까지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그런 책이 있다는 것이 그 당시 새로운 발견이었거든요. 그때는 물론 번역하려는 생각까지는 못했고, 일단 거기에 나오는 내용들하고 위안커 선생이 모아 놓은 자료들의 방대함에 일단 굉장히 놀랬지요. 위안커 선생이 창작한 것이 아니라 오랜 동안의 자료정리 작업을 거쳐서 만들어낸 책이어서 일단은 저본들이 다 있기 때문에 그 방대한 자료에 상당히 놀랬어요. 그리고 타이완 유학을 거치고 한국에 돌아온 뒤에 전인초 선생님께서 한 번 번역해보자고 하셔서 번역을 하게 되었죠. 『중국고대신화』가 80년대에 들어와서 『중국신화전설』 2권이 되었는데요. 30년에 걸친 끊임없는 증보 작업을 통해서 처음에는 중국어로 7-8만자밖에 안되던 것이 나중에 60만 자라는 엄청난 양으로 확대되었습니다.

정재서 :『중국신화전설』로 증익되어서 완성된 게 위안커 선생 몇 살 때지요?

김선자 : 1982년 무렵이니까 거의 환갑이 되었을 때예요.

정재서 : 필생의 대작이군요.

김선자 : 그렇죠. 번역 작업을 시작하면서 보니 상당히 방대한 작업인데다가 번역하는 과정에서 해석이 잘 안되는 부분이 굉장히 많았어요.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하지만 그래도 미진한 부분이 많이 있어서 계기가 되면 좀 더 고칠 생각입니다.

광의(廣義)의 신화론―중국 신화의 토양에 맞는 새로운 범주론, 위안커 신화학의 핵심, 30년에 걸친 텍스트 연구의 결과

정재서 : 처음에는 『중국고대신화』라는 제목이었다가 나중에 『중국신화전설』이라는 제목으로 바뀌게 된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계기가 된 것이 위안커 선생의 중국신화의 범위에 대한 문제였다고 생각해요. 처음에 『중국고대신화』였을 때에는 곤과 우(禹)의 신화에서 책이 끝나는데, 『중국신화전설』로 오면서 하(夏)나라․은(殷)나라․주(周)나라․진(秦)나라 진시황(秦始皇)에서 끝나게 됩니다.

김선자 : 역사전설까지도 들어가게 되죠.

정재서 : 네, 이렇게 역사전설까지도 모두 포함하게 되는데요. 중국신화의 범위에 대해서 상당히 고심한 흔적이 제목을 통해서도 엿보이죠. 저희도 중국신화를 공부하면서 부딪치는 문제인데요. 중국의 신화라는 것이 그리스나 로마의 신화와는 다르지 않습니까? 신화가 고전시대의 신화로 그대로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전승되는 과정에서 사회적 컨텍스트라고나 할까요, 그런 것들이 계속 들어가면서 변화해 가고 그것이 또 다른 새로운 신화로서 문헌에 기록되는 현상이 중국에 많이 있지요. 그뿐만이 아니라 신화와 역사의 관계라든가, 이런 여러 가지 문제들이 상당히 많이 존재하는데 그런 문제들을 해결 짓기 위한 방안으로 위안커 선생이 나름대로 고심을 해서 내놓으신 게 바로 ‘광의의 신화론’이라고 생각해요.

정재서 교수, 사진 ⓒ 조관희, 2001

김선자 : 위안커 선생이 훌륭한 학자인 것은 바로 텍스트 자체에 대한 주석과 정리 작업을 끊임없이 하시면서 그 과정에서 자신의 이론적인 모델을 바꿔나갔다는 거죠. 위안커 선생이 처음에는 스스로 고백하듯이 고전적인 맑스주의 문예관에 입각한 신화관을 가지고 있었거든요. 광의의 신화론에 대한 논의가 나온 게 언제입니까?

정재서 : 1980년대예요.

김선자 : 그렇죠. 상당히 인생의 후반부인데, 그 전까지는 굉장히 고전적인 맑스주의 신화관, 그러니까 일종의 신화소멸론적인 입장을 견지했지요. 과학에 의해서 신화가 대체되고, 일종의 맑스주의 사회분기법의 발전도식에 따라서 사회형태가 바뀌면 신화도 원시신화에서 구석기시대의 신화, 신석기시대의 신화를 거쳐서 역사시대로 들어오면 신화가 종말을 고한다는 진화론적인 역사 분기법에 의한 고전적인 신화관을 가지고 있었죠. 그런데 텍스트와 기본 자료에 대한 정리와 검토 작업을 하면서 맑스주의 신화관에 대해서 스스로 회의를 느끼게 된 거죠. 도식적인 신화발전론, 말하자면 오히려 소멸론인데 거기에 회의를 느끼면서 중국의 상황, 중국의 신화적인 토양에 맞는 새로운 신화의 범주론을 수립해야겠다는 생각을 갖게 된 건데, 저는 이게 굉장히 중요하다고 봐요. 텍스트에 대한 기본적인 천착과 탐구가 굉장히 중요하죠. 우리는 흔히 그런 작업이 이론과 동떨어진 걸로 아는데 사실은 텍스트에 대한 천착은 이론과 서로 조장하는 관계에 있어요. 요즘에는 너무나 이분법적으로 방법론과 고증이 따로따로 존재하는 별개의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어요. 저 자신도 사실은 이론적이고 방법론적인 문제의식은 『산해경』 텍스트 자체에 대한 탐구에서 나온 것이었거든요. 위안커 선생의 경우, 광의의 신화론이라는 이론적 탐색으로 나아가는 과정은 이 분의 30년에 걸친 텍스트 연구의 결과라고 하겠죠.

정재서 : 위안커 선생의 자서(自序)를 보면 자신은 외부적인 영향을 받는 사람이 아니고, 외부의 학문적인 경향이 어떻든 간에 한 곳에 머리를 쳐 박고 공부하는 스타일이라고 해요. 광의의 신화 이론 역시 외부적인 요인에 의한 것이 아니라 30년 동안 텍스트를 공부한 결과이지요. 스스로 밝히기를 처음에는 노트를 작성하다가 그걸로 부족해서 수없이 많은 카드를 만들었다고 해요. 문혁기간 동안에 혁명적인 작업만 강요받았는데 그 작업을 안 하고 『중국신화전설사전』을 만드는 작업에만 열중했다고 합니다.

김선자 : 『중국신화전설사전』에 관한 얘기를 아까 빼먹었는데, 그것도 중요한 업적이지요.

정재서 : 카드를 만들어서 바구니에 담아놓았던 것을 간부 학교에서 공부하고 온 사람들이 혁명 사업은 안하고 이런 걸 하냐면서 카드를 뒤엎은 적도 있다고 해요. 굉장히 어려움이 많았죠. 카드를 만든다거나 지금 보면 아날로그식의 작업을 30년 동안 해오면서 스스로 세운 이론이 광의의 신화 이론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게 바로 80년대에 가장 불꽃 튀는 논쟁을 일으켰던 주제 중의 하나였습니다. 그것에 대한 장단점을 얘기하자면, 신화의 범주를 너무 광대무변(廣大無邊)하게 만들었다는 한마디로만 잘라버릴 수 없는 뭔가가 있죠.

김선자 : 광의의 신화론이라는 요체를 작품으로 실현한 게 바로 『중국신화전설』이죠. 작품으로서 그 이론을 구현한 겁니다. 위안커 신화학의 핵심은 결국 광의의 신화론이라고 할 수 있는데, 장단점을 타진해 봐야 하겠죠. 단순히 평가하기는 어려운데요, 나름대로 철저히 텍스트에 기반하면서 경험을 통해 나온 것이기 때문에 그 성과를 간단히 이론적인 몇 가지 검증으로 평가할 수는 없죠. 제 생각에는 철저히 중국이라는 신화적 토양에서 나온 것임을 일단 존중해야 한다고 봅니다. 그리스․로마신화와 중국신화는 서사성의 본질이라든가 신화적 토양이 굉장히 다르기 때문에 만약에 그리스․로마를 표준으로 하는 기존의 신화 범주론에 의해서 중국신화를 규정짓고 재단하면 사실 신화로서 남아 견딜 수 있는 게 얼마나 되냐 이거죠.

정재서 : 거의 없다고 봐야죠.

김선자 : 그렇죠. 위안커 고심했던 게 바로 그 문제였던 거죠. 사실 우리들 모두 역시 고심해야 할 문제인데, 결국 중국이라고 하는 신화적 토양은 역사와 신화가 그다지 구분되지 않고 같이 융합되어 있는 세계관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신화와 역사가 얼마든지 같이 혼재될 수 있지요. 그런 형국에서 신화만 따로 뽑아낸다는 것은 아주 편협하고 프로쿠루스테스의 침대처럼 억지스러운 결과를 가져오게 됩니다. 광의의 신화론은 기존 서구신화의 협소한 정의 범주를 넘어서서 광의적으로 일부의 역사화된 신화 내용까지도 신화로 포괄하는 입장이지요. 광의의 신화론에서 핵심적인 것은 바로 각 시대마다의 새로운 신화가 발생하고 그것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죠. 그래서 결국 『중국신화사』라는 저작이 있게 된 거 아니겠습니까? ‘중국 신화의 역사’라는 말인데 아주 독특하지요. 신화와 역사는 대립적인 개념으로 쓰이는 건데, 이것을 하나로 묶어 놓은 것이거든요. 여기서 위안커 선생의 미덕으로 꼽을 수 있는 것은 중국신화의 현실적인 토양을 반영하고 존중하려는 입장을 취했다는 점이죠.

광의의 신화론의 문제점―분류 기준의 불명확성, 계급주의적인 관점, 정치적 의도성

정재서 : 그런데 일단 각론으로 들어가면 여러 가지 문제점들이 눈에 띄는데요. 예를 들어서 위안커 선생이 광의 신화의 개념에 집어넣은 내응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첫째, 우리가 일반적으로 신화라고 예기하는 것을 위안커 선생은 협의의 신화라고 얘기했는데, 상고신화 내지 고대신화를 첫 번째에 넣었어요. 그리고 두 번째로 전설을 얘기했는데, 또 다른 분류를 보면 민간전설․풍물전설․불경 인물에 관한 신화를 전설과 따로 구분했어요. 그러니까 협의의 신화, 전설, 그 다음으로는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선화(仙話), 그리고 민간전설, 풍물전설, 불경의 신화에서 마지막의 소수민족신화까지 그야말로 시공을 통틀어서 거의 모든 것을 광의의 신화 범주에 포함시켰어요. 80년대 여러 학자들, 예를 들면 우스전(武世珍) 같은 학자는 몇 번의 글을 써서 비판하길 광의의 신화라는 것이 있긴 있지만 위안커 선생의 광의의 신화는 너무 광대무변해서 도대체 범위가 어디까지인지 종잡을 수 없다고 했지요.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신화에 대한 관점을 완전히 무시해버린 점은 논의의 여지가 있지 않겠냐는 비판이 대두되었는데, 그중에서 특히 문제가 되는 것은 협의의 신화전설․민간전설․풍물전설을 구분하는 데 있어서 전설과 민간전설․풍물전설을 명확하게 구분 짓지 않았다는 거죠. 일반적인 신화․전설․민담의 삼분법도 문제가 있긴 하지만 일반적인 분류법으로 볼 때 전설이라고 해도 될 것을 왜 굳이 신화라는 용어를 사용해야 하는가라는 의문이 생깁니다. 그리고 선화에 대한 시각에도 의문이 드는데요. 위안커 선생은 선화에 대해 굉장한 비판의식을 지니고 있었는데, 초기에는 선화를 신화의 말류 내지 변종이라고 했지요.

김선자 : 신화의 오염이라고 여겼지요.

정재서 : 그 정도로까지 얘기하다가 나중에 와서는 가까스로 선화를 인정했는데, 그 부분에 대해서는 선생님이 하실 말씀이 있으실 텐데요.

김선자 : 중요한 지적을 하셨는데, 광의의 신화가 지닌 한계점들이 있지요. 이 분이 어떤 부분에서는 아주 잡박(雜博)하게 분류하는가 하면 선화 같은 경우에 있어서는 분류의 기준이 아주 계급주의적인 관점에 바탕을 두고 있어요. 특수한 귀족계층이 자신들의 이기적이고 향락적인욕구에 부응하기 위해서 만들어낸 이야기라는 거죠. 이런 계급주의적인 관점은 위안커 선생뿐만 아니라 대륙 신화학계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데요. 적극적 낭만주의와 소극적 낭만주의라는 이분법적인 도식으로 해석하지요. 신비주의적인 것은 다 낭만주의인데, 집단적이고 공리적이며 투쟁적인 것은 적극적 낭만주의이고 개인적이며 소극적이고 이기주의적인 것은 소극적 낭만주의라는 것이죠. 이것은 류다졔(劉大杰)의 『중국문학발전사(中國文學發展史)』에서도 하나의 준칙이 되어 있지요. 그런 경우에는 아주 무단(武斷)적인 관점에 입각해서 신화의 말류라든가 신화에 대한 오염이라면서 타기(唾棄)하는데, 이런 점이 바로 위안커 선생의 시각상의 한계로 느껴집니다.

김선자 선생, 사진 ⓒ 조관희, 2001

그리고 또 중요한 문제점은 중국이라는 풍토를 반영하기 위해서 광의의 신화 개념이 불가피했다고 인정하긴 했지만, 그러나 사실 순수하게 학문적인 의도만이 있었겠는가 하는 점이지요. 중국의 정치적․민족적인 여러 상황들이 상당히 개입되어 있다는 거죠. 중국에서 신화열이 일어나고 신화에 대한 관심이 지금도 이어지는 것은 오늘날 한국사회에 있어서 신화라든가 소위 환상적인 것들이 복귀하는 현상과는 차별성을 지닌다고 생각합니다. 중국에서 일찍부터 신화열이 일어난 데에는 중국이 신화를 통해서 한족중심의 정체성을 장악하려고 하는 의도가 밑바닥에 깔려 있다고 보는 거죠. 그래서 결국 소수민족의 다양한 신화도 독립성을 인정하지 않고 한족 중심의 문헌신화의 체계에 같이 포섭하려고 하는 것이 위안커의 『중국신화전설』 편집 작업에서 아주 강하게 감지된다는 거죠. 기본적인 골격은 문헌신화의 체계고, 그 체계에 소수민족의 신화도 같이 편입되는 것은 정치적으로 얘기하자면 한족 중심의, 중원 중심의 정치 문화에 주변 민족을 같이 편재하려는 의도와 상당히 맞아떨어진다는 것입니다. 위안커 선생이 사실은 당원 아니었습니까? 정치색도 우리가 간과할 수는 없죠.

정재서 : 광의의 신화 개념을 발표할 것인가 고민할 때에 결정적인 도움을 주었던 것이 마오쩌둥(毛澤東)의 『모순론(矛盾論)』입니다. 거기에서 『서유기(西遊記)』의 72변(變)이나 『요재지이(聊齋志異)』에서 여우나 귀신이 인간으로 변하는 이야기까지도 신화에 포함시킬 수 있다고 했는데, 위안커 선생은 바로 마오쩌둥의 이러한 이론에 힘입었던 거죠.

김선자 : 교시를 충실히 계승한 거네요.

정재서 : 나도 역시 광의의 신화론을 자신 있게 펼칠 수 있겠다, 이런 식으로 스스로 밝히고 있어요. 그야말로 마오쩌둥의 이론에 아주 충실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김선자 : 신화적으로 구현한 거죠.

정재서 : 그렇죠. 그리고 『중국신화전설』의 단점 중의 하나로 비판하는 게 바로 한족 중심의 문헌신화를 위주로 해서 소수민족신화를 얹어주는 듯이 했다는 점입니다. 『중국신화전설』 서에서도 밝혔는데요. 흩어져 있는 여러 신화들을 모아서 녹이고 합쳐서 『중국신화전설』이라는 책을 만들어냈다고 했는데, 사실 그건 이데올로기적인 측면에 앞서서 1920대부터 중국의 지식인들이 서구에 대한 열등의식, 컴플렉스를 극복하고자 하는 과정에서 나온 결과물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어요.

김선자 : 소위 체계신화에 대한 컴플렉스죠.

정재서 : 1920년대 황스(黃石) 같은 학자도 그리스 민족처럼 우수한 민족이 없다고 했어요.

김선자 : 마오둔(茅盾)도 그렇고 그 당시 모든 학자가 그랬지요.

체계화된 신화에 대한 갈망의 산물, 국가주의적이고 민족주의적인 시각은 경계해야

정재서 : 체계화된 신화에 대한 몇 십 년에 걸친 갈망이 아마도 위안커 신화의 책을 통해서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죠. 우리 중화민족도 이제 이러한 체계화된 신화체계를 갖게 되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그런 작업이 아니었나 생각됩니다.

김선자 : 저도 이전에 소위 광의의 신화론에 대해 비판적인 논문을 쓴 적이 있는데 긍정도 하면서 부정도 했었지요. 결국은 중국신화라는 것이 사실은 굉장히 ‘상호 텍스트’적이고 다양하며 오늘날 우리가 중국적이라고 하는 정체성이 없던 시대의 산물인데, 이것을 후대에 위안커라고 하는 사람이 하나의 체계성을 부여해서 편집했다는 것이죠. 결국은 중국신화를 단원신화, 조셉 캠벨의 용어를 빌린다면 단원신화화하는 작업, 즉 하나의 체계로 완정하게 서사 도식을 만드는 작업인데요. 위안커 선생의 『중국신화전설』에서 구체적인 예를 들자면 어떤 게 있습니까?

정재서 :『중국신화전설』에서 가장 정채롭고 재미있는 이야기의 하나인 황제(黃帝)와 치우(蚩尤)의 전쟁을 예로 들도록 하지요. 소수민족신화 중에 [묘족 고가(苗族古歌)]라는 서사시가 있는데, 거기에 쟝양(姜央)이라는 주인공하고 뇌공(雷公)하고의 전쟁 이야기가 나와요. 그런데 묘족 서사시에 나오는 등장인물의 전쟁을 가지고 “묘족 서사시에 나오는 쟝양과 뇌공의 투쟁은 곧 황제와 치우 전쟁의 복사판이다”라는 식으로 설명을 하고 있거든요. 이건 아까 얘기했던 것처럼 한족의 신화와 소수민족의 신화는 같은 구조로 발전해갔다는 걸 구현시키기 위해서 그런 식으로 얘기를 풀어나간 거죠. 그리고 이것과는 좀 다른 측면의 문제가 있는데요. 서로 맥락이 끊겨 있는 따로따로 존재하는 신화들을 이어 붙여서 맞지 않는 부분들은 상상력을 발휘해서 이어붙인 부분들이 많이 있는데, 가장 대표적인 것이 바로 이(羿)에 관한 이야기예요. 창어(嫦娥)와 이(羿)의 전설, 이(羿)의 이야기를 보면 굉장히 재미있거든요. 완정된 스토리를 가지고 있고, 이(羿)와 허우이(后羿)라는 다른 인물들에 관한 이야기를 하나로 끼워 맞췄지요.

김선자 : 허우이(后羿)는 역사성이 들어간 인물 아닙니까?

정재서 : 그렇죠. 허우이(后羿)는 역사 속의 인물인데 천신 이(羿)와 연결지어서 완정한 하나의 스토리를 만든 거죠.

김선자 : 그게 무리가 많은 부분이죠. 비약이 심하구요.

정재서 : 그걸 아무 생각 없이 읽다 보면 정말 재미있고 화려한 서사구조를 갖춘 멋진 이야기이거든요.

김선자 : 헤라클레스처럼요.

정재서 : 사실 그걸 부분부분 들여다보면 서로 건너뛴 간극이 있는 부분들을 끼워 맞춰서 하나의 완정한 스토리를 만들었는데, 굳이 이렇게 할 필요가 있는가라는 생각이 들어요. 왜 이렇게 했을까? 그냥 중국신화는 단편적이고 완정한 계보도 없다는 걸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받아들인다고 해서 중화민족의 자존심이 상하는 것도 아닌데 말이죠. 그걸 굳이 그렇게 무리해서 연결지어서 하나의 서사구조를 가진 이야기로 만들어냈다는 것에 대해서는 그야말로 뭔가 의도가 있지 않을까라는 의심을 지울 수 없죠. 그런 맥락에서 위안커 선생의 작업이 국가주의적이고 민족주의적인 시각에서 이루어진 것이라는 혐의를 지울 수 없는데요, 그러한 학문적인 경향이 지금의 소장학자들에게도 발견된다는 것이 굉장히 위험한 것 아니겠어요?

김선자 : 맞습니다. 에드워드 사이드가 이런 비판을 하죠. 그리스․로마신화도 사실 원래는 중근동 지역의 영향을 많이 받은 다원적인 문화의 소산인데, 이것을 후에 유럽의 서구학자들이 단원신화화 함으로써 유럽 중심주의의 관념을 고착시켰다고 비판하거든요. 신화라고 하는 것이 역사와 이데올로기, 국가와 갖는 밀접한 관계성을 우리가 생각해야 합니다. 이것이 신화학자들에게도 영향을 미친다는 점을 말이죠. 신화학자들도 자신의 조국과 민족이 있으니까요. 그래서 신화학을 하지만 ‘학’은 객관적인 학문이지만 ‘신화학자’는 역시 그런 관점을 갖는단 말이죠. 그리스․로마신화조차도 이미 그런 세례를 받았는데요. 우리가 많이 읽고 있는 벌핀치의 그리스․로마신화도 다시 한 번 변형되지 않습니까? 오비디우스 이야기 같은 데에서 이미 미국의 청교도학자인 벌핀치에 의해서 굉장히 기독교식으로 바뀌거든요. 그래서 결국 신화란 과연 어디까지가 믿을 만한 것이고 어떻게 해야 우리가 신화의 진실에 가장 근접하게 도달할 수 있는가 하는 의문에 도달하게 됩니다. 사실 위안커의 『중국신화전설』도 아마 수백 년이 지나면 벌핀치의 『그리스․로마신화』처럼 또 하나의 고전이 되어서 행세할 수 있단 말이죠. 결함을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까 우리가 긍정적으로 평가했던 것처럼 그 자체가 갖는 훌륭한 미덕 역시 있지 않습니까? 우리가 궁극적으로 신화의 진리, 진실성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고 어떤 자세를 가지고 공부해야 할 지 이것이 학인들에게 과제가 될 것 같구요. 그래서 현시점에서 우리가 비판해야 할 부분에 대해서는 예리하게 이면에 감추어진 의도성을 파악하고 비판한 다음에 그 책을 일정 부분 텍스트로 사용할 것인지의 여부를 생각해야 할 것 같구요. 또 지금 말씀하신 대로 그것을 계승한 학자들이 결국 그런 경향을 지니고 있다는 점에 대해서도 주의를 기울여야 될 것 같네요. 어쨌든 중국에서는 이런 논란에도 불구하고 위안커 선생이 거목으로서 한 획을 그었는데요.

정재서 : 대부분 위안커 선생에게 신세를 지지 않은 사람이 없지요.

김선자 : 그럼요. 우리가 후학으로서 그 분의 공과에 대해 얘기하지만 그 분에게 많은 빚을 지고 있다는 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고, 과연 그런 불세출의 학자가 언제쯤 또 나올 수 있겠는가 하는 생각이 들어요. 어떻게 보면 세기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하는 그런 분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말하자면 전통시대에서 현대로 넘어오는 와중에서의 중간자적인 존재인데요.

정재서 : 이어주는 역할을 훌륭히 해냈죠.

김선자 : 그럼요. 루쉰(魯迅)이 얘기한 중간자적인 사람으로서의 역할을 충분히 했다고 보는데, 과연 앞으로 이것을 딛고 중국신화, 나아가서 동아시아 신화학의 독특한 경지를 구현할 자세와 입지가 어느 정도 되어 있는지를 돌아볼 적에 만감이 교차하지 않습니까?

정재서 : 중국의 경우 요즘 위안커 선생 이후의 소장학자들을 보면요.

김선자 : 쳰밍쯔(潛明玆) 선생이라든가.

정재서 : 셰수셴(葉舒憲) 선생, 샤오빙(蕭兵) 선생.

김선자 : 또 마창이(馬昌儀) 선생, 여러 분들이 계시죠.

정재서 : 가장 경계해야 할 것 중의 하나가 문명이나 문화에 대해 이야기하는 학자들이 말하고 있듯이, 아시아에서 가장 국가주의적인 나라가 중국이라고 많이 말하지 않습니까? 21세기를 맞이해서 중국이 커가는 걸 보고 다들 겁을 낸다고는 하는데, 중국이라는 나라가 사실 중심이기를 포기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고 생각해요. 신화를 가지고도 과연 어떻게 이용하는가에 따라서 신화라는 게 나쁘게도 좋게도 얼마든지 이용될 수 있는 것인데요. 중국의 소장학자들이 신화를 체계화시키는 과정을 보면 우리가 소위 알고 있는 삼황오제(三皇五帝) 같은 계보화된 역사 속의 제왕들 뿐만 아니라 우리가 신화 속의 인물이라고 여기는 푸시(伏羲)와 뉘와(女媧)조차도 제왕들 계보의 꼭대기에 갖다 놓는 식으로 신화와 역사의 경계를 무너뜨리고 있어요. 신화도 완전히 역사화시켜서 중화민족의 영광을 구현하기 위한 도구로 사용하게 되는 경향들에 대해 상당히 경계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요즘 동아시아담론에 대해 많이 참여하셔서 아시겠지만 그런 국가주의적인 경계, 선을 무너뜨리지 않는다면 소위 동아시아담론이라는 게 허구가 될 수밖에 없지 않겠느냐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도 역시 마찬가지일 것 같아요. 한국에서 신화를 공부하는 사람들도 그야말로 민족주의적이고 국수주의적인 관점에서만 우리 신화를 해석하고자 한다면 동아시아 삼국이 조화롭게 서로의 다양성을 인정하면서 같이 걸어가기는 힘들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들어요.

김선자 : 일본도 천황사관이 있지 않습니까? 국가주의 신화도 있고. 우리나라도 단군신화를 그런 국가주의적인 관점에서 보는 경우가 있구요. 하여튼 학문외적인 요소들을 잘 견제하면서 신화학을 발전시키는 것이 앞으로 중요한 과제이죠. 현재 한국의 중국신화학에 대해서 할 말이 있을 것 같은데요. 중국과 비교해서 본다면, 텍스트에 대한 기본적인 연구가 상당히 부진하다는 것에 대해 반성해야 하겠고, 그렇다고 해서 이론적인 모색도 활발하지 못한데요. 오히려 중국의 젊은 신화학자들이 상당히 적극적으로 서구이론을 받아들이고 다양하게 연구하고 있어요. 이런 추세로 가면 아마 결국은 모든 분야가 다 그렇지만, 올림픽을 전후해서 중국학도 결국은 무릎을 꿇지 않을까 하는데요. 지금도 뭐 사실 우리가 특별하게 뛰어난 업적을 내놓고 있는 상황은 아닙니다만은 물론 열심히 하시는 분들은 나름대로 자기 분야에서 성취를 거두고 계시지만 전반적으로 아직까지는 한국의 중국학이 변별성을 확보한 건 아니라고 봅니다. 이런 상황에서 텍스트 자체에 대한 기초적인 작업도 소득이 없는데다가 그렇다고 해서 이론적인 탐색이 적극적인 것도 아니고, 그러면 앞으로 올림픽을 전후로 해서 결국 우리는 학문적으로도 대륙에 예속되는 이런 상황이 도래하지 않을까요? 이건 굉장히 걱정스러운 진단인데, 이건 비단 신화학 분야의 문제는 아닐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 점에 대해서도 걱정이 되는데요. 위안커 선생의 성취, 이런 것들을 어떻게든지 딛고서 한국에서의 중국신화학이 좀 더 새로운 모습 경지를 보여줘야 할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정재서 : 신화를 공부하는 이들에게 주어진 숙제지요.

김선자 : 구체적으로 좀 방안이 있습니까? 전망은 어떻습니까?

대담을 진행중인 정재서 교수와 김선자 선생, 사진 ⓒ 조관희, 2001

한국에서의 중국신화학이 나아갈 방향―법고(法古)와 창신(創新)의 조화, 충실한 텍스트 연구에 바탕 한 이론의 탐색

정재서 : 언제나 중요한 건 우리 공부하는 사람들이 늘 고민해온 문제, 바로 법고냐 창신이냐의 문제 아니겠습니까? 법고와 창신, 그걸 갖고 저만 고민하는 줄 알았더니 어느 날 조선시대 박지원(朴趾源) 선생의 글을 보니까 박지원 선생도 이미 그때 고민을 많이 하셨더라구요. 옛것을 따를 것이냐, 아니면 정말 새로운 이론을 가지고 새로운 견해들을 써낼 것이냐. 두 가지를 조화시키는 게 모든 사람들이 바라는 것이었지만 아직 아무도 뭔가를 이루지는 못한 것 같아요. 아까 말씀하신 것처럼 텍스트에 바탕을 둔 작업, 텍스트 자체를 착실하게 이해하고 번역하는 작업, 그것이 법고에 속한다고 본다면 그것을 바탕으로 삼아서 여러 가지 이론들을 탐색해야겠죠. 물론 ‘서구이론을 우리가 다 알 필요가 있느냐, 우리 나름대로 이론을 만들면 되지’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우리 나름대로의 이론이라는 게 어디서 갑자기 떨어지는 게 아니쟎습니까? 남의 이론도 받아들일 수 있으면 다 받아들이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자긍심이라고 생각해요. 누군가 그렇게 얘기했데요. 자존심과 자긍심의 차이가 무었이냐? 나 잘났다, 그리고 남의 것을 흰눈으로만 쳐다보는 건 자존심이지만 나 잘났다, 그리고 남의 것도 받아들일 수 있는 넓은 마음을 가질 수 있다면 그건 자긍심이다. 자존심과 자긍심의 차이는 그렇다, 이런 식으로 얘기하는 사람도 있던데요. 텍스트를 바탕으로 수많은 이론들을 받아들여서 새로운 작업들이 될 수 있으면 계속해서 가능한 한 많이 나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비록 그것이 말도 안 되는 이론, 그야말로 설익은 창신에 불과할지라도 그런 것들이 자꾸 나와야만 뭔가 새로운 자극을 통해서 서로 상승작용을 일으킬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해 봅니다.

김선자 : 중국신화를 연구하는 우리들에게 위안커 선생의 이런 업적들은 이미 텍스트가 되어 있는 거죠. 우리들은 착실하게 그 분의 업적에 대해 충분히 섭렵하고 분석하면서 텍스트에서 생겨난 문제의식을 가지고 그 문제의식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여러 이론적인 것들을 선별적으로 우리식으로 자기화하면서 만들어나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정재서 : 그렇죠. 열린 시각으로, 비판적으로.

김선자 : 정체성이라고 하는 것을 너무 기원주의적으로 볼 게 아니라 역사적으로 하나의 형성되는 과정적인 것이라고 봐야겠죠. 정체성이라는 것, 어떤 고정불변한 것이 어디 존재해 있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그래서 결국 위안커 선생이든 다른 서구 이론이든 기본적으로 우리가 일단 철저하게 섭렵하고 그 위에서 우리가 스스로 문제의식을 느끼고 그러면서 우리의 길을 찾아나가야 하겠죠. 그런 의미에서 위안커 선생은 다시 한 번 우리가 음미해야 될 영원한 텍스트로서 이미 훌륭한 고전으로 남아있는 그런 분이 아닌가, 이렇게 생각합니다.

정재서 : 다시 한 번 고인의 명복을 빌면서 오늘 대담 이 정도로 끝내겠습니다.

김선자 : 그러죠.

정재서 : 수고하셨습니다.

김선자 : 수고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