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5일 한시-두보杜甫 배로 여행하는 밤에旅夜書懷

배로 여행하는 밤에旅夜書懷/당唐 두보杜甫

細草微風岸 작은 풀 산들바람 부는 언덕
危檣獨夜舟 높은 돛 밤에 홀로 정박한 배 
星垂平野闊 광활한 평야 위 별들은 떠 있고
月湧大江流 흐르는 장강 물 달빛은 일렁이네
名豈文章著 이름을 어찌 문장으로 드러낼까
官應老病休 관직도 늙어 병들면 쉬어야지
飄飄何所似 떠도는 내 신세 무엇과 같은가
天地一沙鷗 천지에 떠도는 한 마리 갈매기

765년 두보 나이 54세, 두보는 자신을 돌보아 주던 절도사 엄무(嚴武)가 죽자 성도의 초당에서 배를 타고 선상 생활을 한다. 이 시는 충주(忠州), 즉 지금의 사천성 충현(忠縣)에서 장강을 따라 운안(雲安), 즉 지금의 운현(雲縣)으로 가는 도중에 밤에 강가에 배를 정박하고 지은 시로 알려져 있다.

앞 절반은 대체로 밤에 배를 정박하고 바라본 경관을 묘사했고 뒤의 절반은 자신의 현실적 처지에 대한 회포를 드러내고 있다. 경관 부분에는 자신의 은유와 포부가 어려 있고 회포 부분은 상당히 침울한 자괴감이 묻어 있다.

미풍에 흔들리고 있는 작은 풀이나 작은 배에 높이 솟은 돛대는 두보 자신의 모습을 닮아 있다. 이러한 모습은 광활한 평원 위에 떠 있는 별들과 달빛을 안고 넘실거리며 흐르는 대강의 물과 대비되어 더욱 왜소하다. 두보는 자괴감에 휩싸여 ‘꼭 문장으로 세상을 떨쳐 울려야만 하는가? 남들 다 자리 잡은 이 나이에 벼슬해서 뭐 하겠나!’하는 자조어린 말까지 중얼거린다. 급기야 자신을 천지간에 날고 있는 저 강가의 한 마리 갈매기로 지목하며 탄식한다.

‘星垂平野闊’과 ‘月湧大江流’를 ‘별들이 떠 있어 평야가 광활하고, 달빛이 일렁여 장강 물 흐르네’라고 해석하는 것은 밤하늘에 떠 있는 무수한 별들을 보고 이곳이 드넓은 평야인 것을 알고, 달빛이 물에 비치어 함께 흘러가는 모습을 보고 장강이 흘러간다는 것을 안다는 생각에 기반하고 있다. 그러나 그렇게 해석하면 웅혼한 이 시구의 의미가 크게 축소될 뿐만 아니라 ‘별이 떠 있고 달빛이 일렁인다.’고 강조한 의미가 사라진다. 두보의 시뿐만 아니라 대구를 쓰는 시의 문법에는 이런 구가 많이 나오는데 당연히 뒤의 3글자를 먼저 해석하고 앞 2글자를 해석해야 한다. 그러면 당연히 ‘활(闊)’과 ‘류(流)’는 바로 앞의 말을 수식하는 것을 알게 된다.

‘名豈文章著’를 문장 말고도 두보는 정치에 큰 뜻을 품었다고 이해하고, ‘官應老病休’ 역시 이제 늙고 병들었으니 관직에 대한 꿈도 접어야 한다는 뜻으로 이해한 주석가들이 있다. 만약 이렇게 해석하면 앞뒤의 뜻이 바로 연결되어 대구의 의미가 줄어들 뿐만 아니라 시로 세상에 이름을 남겨보겠다고 한 두보의 포부와도 맞지 않는다.

이 말은 일종의 반어법으로 읽어야 한다. 필자가 몸담고 있는 기관이 너무도 마음에 안 들어, 어느 날 지기(知己)에게 탄식하면서 ‘요즘 세상에 공부는 해서 뭐하겠어? 이제 나이도 많고 번역도 그만 해야지!’이렇게 말하는 것과 같다. 이 말을 ‘아, 이 사람은 공부에 뜻이 없고 이제 번역도 나이가 들어서 쉬려고 하나 보다.’라고 이해한다면 말을 알아듣는 사람이라 할 수 있겠는가! 혹 앞의 말을 ‘내가 문장으로 이름난 게 뭐가 있어?’ 이런 자조로 이해한다면 이는 잠시 생각할 여지가 있다. 그러나 이 또한 ‘문장으로 후세에 이름을 남긴다.’는 ‘입언(立言)’에 비추어 보면 자의적 해석으로 보인다.

두보가 3년 전에 쓴 시 <객정(客亭)>에 “성상의 조정엔 버려진 인재 없지만 늙어 병들어 이제 노인이 되었네. 얼마간 남은 인생 떠도는 망초처럼 내맡기네. [聖朝無棄物, 老病已成翁. 多少殘生事, 飄零任轉蓬.]”라고 한 말도 완전한 안분지족(安分知足)이라기보다는 자기 위안이 담겨 있고 심층에는 뜻을 이루지 못한 회한이 서린 말이다.

두보의 이 말은 <객정>의 시와 연관해서 보면 자신이 문장으로 이름을 남길 가망이 적고 관직에 나가 뜻을 펼 기회도 다시 오지 않을 예감을 느끼면서 그 책임을 누구에게 돌릴 수도 없어 자신을 돌아보고 자괴감에 젖어 한 말로 보인다.

정말로 두보가 입언의 의지를 포기한 말이라 본다면 무엇 하러 시에 이런 말을 적는가? 이 말은 자신이 아직 문장으로 세상에 이름을 날리고 싶은 의욕이 식지 않았을 뿐 아니라 관직도 기회만 되면 받아서 포부를 실현하고 싶다는 말을, 슬프게 속으로 울면서 한 말이다. 뜻은 있으나 현실이 따라 주지 않기에 회재불우(懷才不遇)의 비탄을 이런 방식으로 토로한 것이라 본다.

필자는 애잔하기까지 한 이 시에서 ‘늙은 준마가 마구간에 누웠으나, 뜻은 천리를 달리고자 한다.[老驥伏櫪, 志在千里]’는 기상을 읽는다. 50대 중년의 시인 중에 어느 누가 ‘광활한 평야 위에 별들은 떠 있고, 흐르는 장강 물에 달빛은 일렁이네.’와 같은 큰 포부를 가지고 있단 말인가? 어느 누가 문장으로 이름을 후세에 남기지 못할까 걱정되어 비탄에 잠긴단 말인가.

큰 포부가 있기에 오히려 깊은 자괴감이 들어 자신을 한 마리 갈매기라고 한 것이다. 비탄이 깊은 것은 그만큼 포부가 크기 때문이다. 문장에 대한 포부가 없는 사람은 이런 말 자체를 안 한다. 달 밝으니 고기 잡아 술 먹기 좋구나! 이런 바보 같은 말만 하고 사람 좋다는 소리 들으면 기뻐할 뿐이다.

長江 사진 출처 catincu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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