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시화의-위응물韋應物 풍수에서 유하에게 부치노라灃上寄幼遐

풍수에서 유하에게 부치노라灃上寄幼遐 /위응물韋應物

寂寞到城闕, 쓸쓸하게 장안에 갔다가
惆愴返柴荊. 슬퍼하며 시골집으로 돌아온다.
端居無所爲, 평상시 하는 일 없어
念子遠徂征. 멀리 떠나간 그대 걱정하노라.
夏晝人已息, 여름 대낮에 다른 사람들 쉬지만
我懷獨未寧. 내 마음만 홀로 편치 않구나.
忽從東齋起, 갑자기 동쪽 방에서 일어나
兀兀尋澗行. 몽롱하게 산골 물 찾아 떠난다.
罥挂叢榛密, 덩굴 우거진 숲 개암나무 무성하고
披玩孤花明. 숲 헤치며 감상하노라니 꽃송이 환하다.
曠然西南望, 드넓은 서남쪽 바라보며
一極山水情. 산수자연의 정 만끽한다.
周覽同游處, 두루두루 함께 노닐던 곳 유람하니
逾恨阻音形. 갈수록 소식 없는 그대 모습 한스럽다.
壯圖非旦夕, 장대한 포부 금방 이루기 어려우니
君子勤令名. 군자는 좋은 명성에 힘써야 할 터.
勿復久留燕, 다시 오랫동안 연 지방에서 머물며
蹉跎在北京. 북경에서 허송세월하지 말기를.

[해제]

시제의 ‘풍(灃)’은 당대 장안성의 서남쪽에 있었던 위수(渭水)의 지류 풍수(灃水)을 말한다. 그리고 ‘유하(幼遐)’는 위응물의 친구 이담(李儋)의 자이다. 이담은 일찍이 전중시어사(殿中侍御史)를 역임했으며 건중(建中) 연간에는 태원(太原) 마수(馬燧)의 막부에 있었다. 위응물이 이담에게 써준 시가 제법 많은 걸로 봐서 가장 친밀한 시우였던 것 같다. 이 시는 건중 원년 여름에 풍수 가의 선복사(善福寺)에 한거할 때 지었는데, 당시 이담은 ‘북경’(지금의 태원)에 있었다. 당 현종은 태원에 행차하여 이곳에 ‘북도(北都)’를 세웠으며 천보 원년에 이름을 ‘북경으로 바꾼 바 있다.

‘주람동유처(周覽同游處)’ 구절을 통해 이담은 풍수에 이르러 위응물과 함께 산수자연을 감상하며 노닌 적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 때 적은 시가 <풍수에서 유하와 함께 달밤에 서쪽 언덕에 올라 꽃을 감상하며(灃上與幼遐月夜登西岡玩花)>이다. 이렇게 위응물은 이곳 풍수 선복사에서 지내다가 이듬해 4월에 비부원외랑(比部員外郎)으로 임명되어 풍수를 떠나게 된다.

灃水, 사진 자료 Baidu

오언고시 상 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