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시, 계절의 노래-[송] 양만리 보리밭麥田

보리밭麥田/ [송] 양만리

가없는 초록 비단
구름 베틀에 짜여서

전폭의 청라가
땅 옷이 되었네

이것이 농가의
진정한 부귀이니

눈꽃이 다 녹자
보리 싹이 살찌네
無邊綠錦織雲機, 全幅靑羅作地衣. 個是農家眞富貴, 雪花銷盡麥苗肥.

인동초(忍冬草)라는 풀이 있듯이 보리도 겨울을 견뎌내는 식물의 하나다. 봄에 씨를 뿌리는 보리가 없는 건 아니지만 보통 가을에 파종한다. 이런 연유로 보리는 겨울 추위를 고스란히 견딘 후 봄을 맞는다. 겨울 추위를 견디는 과정에서 땅에 낀 서리발이나 얼음 때문에 보리 뿌리가 떠들리는 현상이 생긴다. 이를 방지하고 보리의 착근(着根)을 돕기 위해 늦겨울이나 초봄에 보리밟기를 한다. 새봄이 되면 땅에 튼튼하게 뿌리 내린 보리가 푸릇푸릇 새 생명을 뽐낸다.

이 시에서 시인은 초봄 끝도 없이 펼쳐진 푸른 보리밭을 초록 비단(綠錦)과 푸른 비단(靑羅)으로 비유했고, 흥미롭게도 그런 비단을 짜는 베틀을 ‘운기(雲機)’라고 표현했다. 직역하면 구름 베틀이다. 아득한 지평선 끝에 솟아오른 구름 봉우리를 베틀에 비유했다. ‘운기(雲機)’를 단순하게 그냥 베틀로 해석하기도 하지만, 푸른 비단을 구름 베틀에서 짰다고 보는 편이 시의 구도에 더 적합하다. 수직으로 치솟은 하얀 구름 베틀과 거기에서 직조되어 수평으로 끝없이 펼쳐진 초록 비단 구도가 이 시의 색채감을 더욱 돋보이게 하기 때문이다. 그 비단이야말로 무채색 대지를 덮어주는 새 생명의 봄옷이다.

옛날에는 봄이 되어 가을에 거둔 곡식이 떨어지고 아직 햇보리조차 나지 않은 시기를 흔히 춘궁기(春窮期) 즉 보릿고개라고 불렀다. 먹을 것이 없어서 햇나물이나 나무뿌리로 요기를 해결했다. 내 어릴 때도 저녁은 대개 멀건 나물죽을 먹었다. 이런 시절 겨울을 견디고 푸르게 땅을 덮은 보리 싹은 이제 보릿고개가 얼마 남지 않았다는 위안을 준다.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흐뭇하다.

더러 ‘옛날 보리밥집’이란 간판을 내건 식당이 있어서 옛날 꽁보리밥 생각에 들어가보지만 옛날 맛은 거의 느낄 수 없다. 이미 나의 추억 속에서 고통은 걸러지고 꿀맛으로 미화된 보리밥을 이 세상 어디서도 찾을 수 없는 탓일 게다. 흔히 ‘청보리밭’으로 미화된 현대의 보리밭 이미지에도 보릿고개나 보리 까끄라기의 고통보다는 푸른 보리밭의 낭만만이 가득하다. 그것은 이제 거의 사라진 추억 속의 유토피아일 뿐이다.(사진출처: 易車/圖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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