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5일 한시-석문향釋文珦 내가 은거하는 곳幽處

내가 은거하는 곳幽處/송宋 석문향釋文珦

幽處絕煩喧 그윽한 이곳 소란함은 없고
白雲常在門 흰 구름 늘 문에 걸쳐 있네
高歌動澗壑 큰 노래 소리 골짝을 울리고
空境外乾坤 빈 이 곳은 세상 밖의 세상 
洗眼菖蒲水 창포 잎의 이슬로 눈을 씻고
輕身枸杞根 구기자 뿌리 먹어 몸 가볍네
閑中存至樂 한가한 가운데 지락이 있나니
難與俗人言 속인들과는 말하기 어렵네

승려 문향(文珦, 1210~1290 약간 초과)은 지금의 항주 서쪽 임안(臨安) 근처에 있는 오잠(於潛) 사람으로 어려서 항주에서 출가하여 동남방을 두루 돌아다닌 승려이다. 자신이 지은 시에 제영시가 300이요, 돌아다닌 곳이 4천리라 한 표현이 있다. 나중에 어떤 일로 감옥에 갇혔다가 나온 뒤로는 행적을 감추었는데 죽을 때 나이가 80여세라고 한다. 호는 잠산노수(潛山老叟)이고 문집 《잠산집(潛山集)》이 있다.

이 시인의 문집은 12권인데 일별해 보면 산수에서 은거하고 소요하는 즐거움을 노래한 것이 많다. 음시와 독서 산보가 주로 일과였던 것 같은데 한국의 승려들 시와는 다르게 은거하는 독서인 같은 인상을 준다. 조용히 음미해 볼만한 시가 많다.

구기자는 본래 국화와 함께 기국(杞菊)이라 병칭하며 장수의 소재로 시문과 회화에 많이 보이지만 창포가 눈을 밝게 한다는 것은 낯설다. 찾아보니 창포에는 ‘통구규(通九竅)’라 해서 눈, 코, 귀, 입 등 인체에 있는 9개의 구멍을 잘 통하게 하고 ‘명이목(明耳目)’이라 해서 눈과 귀를 밝게 해 주는 약성이 있다고 한다. 명나라 때 의학자 이시진(李時珍)의 《본초강목(本草綱目)》에 ‘잣나무 잎의 이슬과 창포 잎의 이슬로 매일 아침에 세수를 하면 눈이 밝아진다.’라고 하였다. 옛날 학자들이 책상에 창포 화분을 둔 것은 이 때문이다. 이 시인이 말한 것도 이런 맥락으로 보인다.

아무도 없는 골짜기에서 큰 소리로 노래하면 사방에서 울려 더욱 신이 나고 멀리 내지르면 자신의 소리가 메아리가 되어 돌아온다. 세속과 멀어진 자신만의 공간은 또 다른 별세계이다. 밤늦게 등잔 아래서 책을 읽느라 뻑뻑해진 눈알은 창포물로 씻으면 다시 맑아지고 구기자 뿌리를 다려 먹으니 폐와 혈관이 원활하고 기운이 나서 몸도 가볍다. 한가하게 자연 속에서 내면의 충일함을 즐기는 이러한 삶을 성공을 위해 밤낮으로 경쟁하는 속인들에게 말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승려보다 더 승려다운 가식 없는 시어에서 은자의 체취가 흔흔히 풍긴다. 별도의 한 시경(詩境)을 연 이런 시인을 알게 되어 기쁘다.

四川 黄金峡, 사진 출처 成都自助游 soh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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