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5일 한시-맹교孟郊 객지에 있는 자식의 노래遊子吟

객지에 있는 자식의 노래遊子吟/당唐 맹교孟郊

慈母手中線 어머니 손에 있던 실은
遊子身上衣 객지에 있는 자식의 옷
臨行密密縫 집 떠날 때 촘촘히 바느질하는 건
意恐遲遲歸 객지에서 오래 머물까 걱정 때문
誰言寸草心 누가 조그만 풀의 마음으로 
報得三春暉 봄날 햇빛에 보답한다고 하리

《고문진보》에 <송맹동야서(送孟東野序)>라는 한유(韓愈 : 768~824)의 명문이 있다. 사물이 불평불만이 있기 때문에 소리가 나듯이 시도 그렇다는 아주 대단한 글이다. 이 글만 보면 한유가 맹교에게 가르치는 것 같지만 실제 맹교(孟郊 : 751~814)가 한유보다 17살이나 많다. 한유는 28세부터 벼슬을 했고 맹교는 50살에 겨우 진사에 붙어 54세에 지금의 강소성에 해당하는 율양현위(溧陽縣尉)로 부임하게 된다. 그런데 이들이 이런 식으로 나이를 초월하여 교유할 수 있는 것은 둘이 망형지교(忘形之敎)를 맺었기 때문이다. 망형지교는 형체, 즉 세속적인 나이, 신분 이런 걸 떠나서 정신적으로 사귀어보자는 것이다. 오늘날 가끔 취미 동아리에서 보이기도 하지만 대개는 결국 나이나 신분을 따지는 것으로 돌아오니 쉽지 않은 사귐이 분명하다.

하여튼 이 글 마지막에 보면 ‘맹동야가 지금 강남으로 가는데 좀 불만스러운 구석이 있어 자신이 명이 하늘에 달렸다는 내용으로 위로한다.’는 내용이 나온다. 여기서 말하는 강남이 바로 맹교의 첫 직장인 율양이다. 현위는 현령 밑에서 치안을 담당하는 사람이니 오늘날로 치면 지방 어느 군의 경찰 서장쯤 되는 지위이다. 이 시는 바로 이 때 지어진 것으로 800년 맹교의 나이 54세에 해당한다.

맹교는 이 시에 주석을 달아 어머니를 율양현으로 모시고 와서 지었다.(迎母溧上作)라고 하였다. 맹교의 집은 본래 절강성 덕청(德清)에 있는데 율양서는 서울서 평양 정도 거리가 되는 곳이다. 그러니까 객지를 떠돌면서 간난신고 끝에 첫 직장을 잡아 어머니를 모셔 와서 이 시를 지어 바친 것이 된다.

이 시만 보면 집을 떠나는 상황을 염두에 두고 지었거나 아니면 객지에서 어머니 은혜를 생각하며 지은 것으로 상상할 수 있지만, 실제로는 그래도 어머니에게 따뜻한 밥에 깨끗한 술 한 잔이라도 올릴 수 있는 처지가 되어 지은 것이다. 실제로도 문학 작품은 대개 안온한 시기에 많이 지어진다. 사람이 너무 궁핍하고 곤란한 상황에 처해 있으면 문학적 경험은 쌓일지 모르나 실제 작품을 짓기는 어렵다. 나의 경험 역시 그러하다.

첫 두 구는 ‘어머니가 바느질을 하여 길을 떠나는 아들의 옷을 짓는다.’라는 의미보다는 ‘객지에서 내가 입고 있던 옷은 어머니가 집 떠날 때 손수 지어 준 옷이지.’ 이런 의미로 보인다. 3, 4구는 맹교가 지은 다른 시 <원유(遠遊)> 가 참조가 된다. 그 시에 “오래도록 길가에서 밥을 먹고 집에서 입고 온 옷 다 해어졌네.(長爲路傍食, 著盡家中衣)”라는 구절이 있다. 이 말을 참조하면 어머니가 옷을 꼼꼼하게 바느질한 건 객지 생활이 오래되면 우리 아들이 이 옷을 오래 입어야 하기 때문에 더욱 신경을 쓴다는 말로 이해된다.

마지막 정리하는 말에 쓰인 ‘誰言(누가 ~ 하리오.)’이 <<고문진보>>에는 ‘難將(~로 하기 어렵다.)’으로 되어 있다. 난장의 평서문보다는 ‘수언’으로 쓴 의문문이 더욱 감정을 고조시킨다. 그래서 그런지 대체적으로 ‘수언’으로 되어 있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이 시의 제목을 <길 떠나는 아들의 노래>라거나 <나그네의 노래> 이렇게 하면 시의 내용과 잘 어울리지 않는다.

‘길 떠나는’보다는 ‘먼 객지에 있는’이 실상에 부합한다. 그리고 나그네라는 말에는 ‘정처 없다.’라든가 ‘길 가는 사람’ 등의 의미가 흔히 담겨 있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유자(遊子)는 ‘집을 떠나 멀리 있는 자식’이라는 의미이다. 구체적 표현은 다양하게 할 수 있겠지만 그 의미는 대략 ‘먼 객지에 나가 있는 아들이 어머니의 은혜를 생각하는 노래’라는 의미가 담겨야만 한다.

소식이 맹교와 가도(賈島)의 시를 두고 ‘맹교의 시는 차갑고 가도의 시는 수척하다(郊寒島瘦)’고 말한 적이 있다. 신산스런 지난날을 돌아보며 어머니에게 바치는 이 시는 천고에 형편이 여의치 않은 사람들에게 더욱 공명을 일으키니, 한유가 말한 대로 정말 시로써 만고를 울렸다(鳴)라고나 할까. (사진 출처 Baid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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