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5일 한시-두목杜牧 강남의 봄江南春

강남의 봄 江南春/당唐 두목杜牧


千里鶯啼綠映紅 천리에 꾀꼬리 울고 신록과 꽃 어울리는데
水村山郭酒旗風 수향이나 산촌이나 주점 깃발 펄럭이네
南朝四百八十寺 남조 때의 사찰 사백 팔십 개
多少樓台烟雨中 그 많은 누대가 안개비를 맞고 있네

두목 시에는 특유의 풍류가 서려 있고 어떤 구절은 매우 정채를 띠고 있다. <청명> 시에도 “아이야, 술집이 어디냐고 물으니, 목동이 멀리 살구꽃 핀 마을을 가리키네.[借問酒家何處在, 牧童遙指杏花村.]라는 구절이 있는데 이 시도 어디선가 한 잔 걸친 술꾼의 호기가 묻어난다.

춘향전에 보면 ‘취과양주(醉過揚洲) 귤만거(橘滿車)의 두목지(杜牧之) 풍채로구나’라는 구절이 나온다. 두목지가 술에 취해 양주의 기루 거리를 지나가면 아가씨들이 귤을 던져 수레에 가득했다는 말이다. 진나라 반악(潘岳) 역시 낙양 거리를 지나가면 여자들이 과일을 던져 수레에 가득했다는 척과영거(擲果盈車) 고사가 있다. 반악은 글이나 외모 쪽인 것 같고 두목은 풍채와 풍류 때문이었던 것 같다.

이런 말이 우리나라에는 널리 퍼져 연극 대본 <맹진사댁 경사>에도 유사한 구절이 나온다. 예전에 한문을 같이 공부하던 동료가 자신이 한 배역을 맡았는데 거기에 나오는 두목지가 도대체 누구냐고 물은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목지(牧之)는 바로 두목(杜牧, 803~852)의 자인데 두목은 역대의 전장제도를 모아 놓은 <<통전(通典)>>이란 책을 만든 두우(杜佑)의 손자로 이상은(李商隱)과 같은 시기에 활동했다. 두목의 호가 번천(樊川)인데 우리나라 허난설헌의 호가 ‘번천을 경모한다’는 의미의 경번(景樊)이다. 허난설헌은 남편과는 사이가 좋지 않았고 두목을 아주 존경하여 자신의 호까지 삼은 것이다. 두목의 풍채는 이처럼 우리나라에 널리 알려진 것으로 보인다.

이번 기회에 ‘사백팔십사’의 유래를 한 번 찾아보았다. 이 다섯 글자가 모두 측성이라 평측과 무관할 뿐 아니라 오히려 작가의 취향이 강하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청나라 때 유세기(劉世琦)가 지은 <<남조사고(南朝寺考)>>의 서(序)에 의하면 양(梁)나라 시대에는 사찰이 도합 2천8백40개가 있었고 당시 수도인 남경에 7백여 개가 있었다고 한다. 4백 8십 개의 뚜렷한 역사적 근거가 없다는 말이다.

남조는 진나라가 북쪽 호족에 밀려 장강 이남으로 수도를 옮긴 동진부터 송, 제, 양, 진 기간 동안, 북방 정권 수나라에 통합되기 전까지를 말하는데 이 시기에 모두 건강(建康)을 수도로 삼았다. 건강은 바로 오나라 손권이 도읍한 건업(建業)으로 오늘날 남경에 해당한다. 당나라 때는 이곳을 양주(揚州)로 불렀고 두목은 회남절도사 우승유(牛僧孺) 밑에서 서기를 하며 이곳에 3년 정도 머물렀는데 이 시는 바로 그 때 833년 두목의 나이 31세 때 한창 기루에 드나들 때 지었다.

술집에서 술 마시면서 온갖 이야기를 다 하기 마련인데 남조 시대의 수도였던 양주의 화류계에는 대체로 사찰이 어느 정도라는 말은 돌아다녔을 법하고 두목은 술집에서 사찰의 규모 같은 것을 들었을 확률이 높다. <<南史>>의 순리열전 <곽조심(郭祖深)>에 “도성에 불사가 500여개소가 되는데 웅장하고 화려함을 다했다. 승려가 10여 만이며 물자와 재산이 풍부하다. 각 군현에 소재한 것은 이루 다 말할 수 없다.[都下佛寺五百餘所, 窮極宏麗. 僧尼十餘萬, 資産豐沃. 所在郡縣, 不可勝言.]”는 대목이 있는데, 이 책에 당시 남경의 사찰이 500여개라 하였으니 당나라 시대에 480개라 한 것이 완전히 동떨어진 숫자는 아니다. 숫자가 허구라 하더라도 허구의 문화적 맥락은 있는 것이다. 학식이 풍부한 분의 가르침을 기다린다.

한편 명나라 때 양신(楊愼, 1488~1559)이 지은 <<단연총록(丹鉛總錄)>>을 보니, 두목은 이 구절 말고도 다른 시에 ‘漢宫一百四十五’, ‘二十四橋明月夜’, ‘故鄉七十五長亭’ 이런 식으로 숫자를 쓰기를 즐겨 했다는 것이다. 이 시인의 독특한 언어 취향을 살핀 재미있는 지적으로 보인다. 이렇게 구체적인 숫자를 쓰게 되면 전체를 포괄하는 효과가 있고 시에 독특한 풍취를 더하게 되는 듯하다.

금강산 1만2천봉은 고려시대 이곡의 <<가정집(稼亭集)>>에도 보일 정도로 유서가 깊지만 딱히 무슨 근거가 있는 것은 아니다. 낙화암 3천 궁녀라든가, 박목월의 남도 삼 백리, 서정주의 파촉(巴蜀) 삼 만리, 이런 것은 대개 무슨 수학적이거나 역사적인 근거가 있는 것이 아니다. 정서적 울림을 염두에 둔 일종의 수사법으로 보아야 한다. 그러나 그 숫자의 문화적 맥락은 있는 법이라 그런 점을 역시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회화 작품에 보면 가끔 소중현대(小中現大)나 이와 유사한 말들을 만나게 된다. 이는 큰 자연의 실제 경치를 작은 화폭에 옮긴다는 말이다. 이 시가 꼭 그렇다. 강남 천리에 걸친 아름다운 봄 풍경이 유서 깊은 남조 시대의 건축물들과 어울린 특유의 장관을 28자의 7언 절구에 담아내고 있다. ‘남조사백팔십사’는 바로 그 전체를 포괄해 내는 역할을 하는데 이런 면도 아울러 눈여겨 볼만하다.

이 시는 <<당시배항방>>에 61위에 올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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