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준헌黃遵憲의 「스리랑카의 와불상」 : 넓어진 시야, 확장된 ‘시’의 경계

무술변법戊戌變法의 실패 후 일본에 망명해 있던 양계초梁啓超(1873~1929)는 1900년 초, 미국 행 배 위에서 ‘시계혁명詩界革命’의 필요성을 역설합니다. 그리고 1902년부터 자신이 발행하던 󰡔신민총보新民叢報󰡕라는 잡지에 「음빙실시화飮冰室詩話」를 연재하기 시작하지요. ‘시의 세계를 혁명적으로 변화’시키기 위한 비평 차원에서의 실천이라고 하겠습니다. 자신의 관심은 옛 시가 아니라 ‘동시대’의 시에 있음을 천명한 양계초가 발굴해낸 ‘시계혁명’의 으뜸가는 모델이 바로 황준헌黃遵憲(1848~1905)이었습니다. 양계초는 「시화」를 통해 황준헌의 시를 자주 소개하면서 평하고 있는데 제일 먼저 거론한 작품이 바로 「석란도와불錫蘭島臥佛」 즉 「스리랑카의 와불상」입니다.

스리랑카 폴로나루와의 와불상

황준헌은 일찍부터 천 수백 년 동안 답습되어 온 시의 형식, 제재 및 언어에 얽매이지 않으리라고 선언했습니다. 시가 비록 ‘작은 도(小道)’이긴 하지만 이렇게 지어진 시라면 읽는 사람들의 정신의 경계를 확장시키고 세계의 흐름을 바꾸는데 기여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지요. 이러한 입장을 가지고 있던 그가 외교관으로서 새로운 세상을 경험하면서 지어낼 수 있었던 작품이 바로 이 「스리랑카의 와불상」과 같은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이미 일본과 미국을 체험한 바 있던 황준헌은 1890년 설복성薛福成의 부관으로 유럽을 향한 여정에 오릅니다. 홍콩, 싱가포르 등의 항구를 거쳐 스리랑카에 들르게 되는데 뭍에 내려 오래된 와불상을 구경하게 되지요. 이때의 경험과 감회를 바탕으로 이 시를 짓게 됩니다. 양계초는 「음빙실시화」에서 다음과 같이 이 시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내 생각에 지금 이후로 세계의 진보가 이전 시대를 훨씬 넘어설 것임은 자명한 사실이다. 이러한 즉, 지금의 인물이 어찌 옛 사람보다 못하다 하겠는가? 내 평생 시를 논하면서 황준헌에게 가장 이끌렸는데, 그의 전집을 내지 못하는 것을 한탄하여 왔다. 근래에 남양南洋의 모 신문이 그의 예전 작품 한 편을 수록하였는데, 환히 빛나는 이천 여 마디로 참으로 이전에는 없던 특이한 구조라 할 만하다. 호머, 셰익스피어, 밀턴, 테니슨의 작품은 내 읽을 수 없었으니 함부로 견줄 수는 없겠으나, 중국의 경우라면 내 감히 시가 있은 이래 초유라고 말하겠다. 문장으로 치고 명명한다면 나는 ‘인도근사印度近史’, ‘불교소사佛敎小史’, ‘지구종교론地球宗敎論’ 또는 ‘종교정치관계설宗敎政治關係說’이라고 제목을 붙이고 싶지만 이것은 어쨌든 시이지 문장은 아니다. 이와 같은 시가 있다는 것에 대해 중국문학계는 충분히 자부할 만하다. 이에 서둘러 기록하여 시계혁명군詩界革命軍의 청년에게 제공하노라.(「음빙실시화」 제8조)

어떤 시이길래 양계초가 이렇듯 찬사를 아끼지 않았을까요? 일부를 감상해 보도록 하지요:

<제1장>
큰바람이 서북으로부터 불어와
하늘을 흔들어 바다의 파도는 흙빛이 되었고,
헤아릴 수 없는 세계들로부터 비롯한 티끌은
한 알 한 알 국토를 이루는 흙먼지 되었도다.
……
나의 여정은 구진九眞을 지나
그 다음으로는 싱가포르에 정박했네.
보르네오에서 좌우를 조망하니
여러 섬들이 벌레처럼 모여 있다.
모두 서도西道의 주인에게 귀의하여
모조리 뽑아버렸네 한漢의 붉은 기치를.
밤낮으로 흥망을 생각하며 흘린 눈물
바다의 물방울 수 보다 많으리.
가고 가네, 다시 가고 가네,
이윽고 스리랑카에 이르렀네.
大風西北來, 搖天海波黑; 茫茫世界塵, 點點國土墨.……我行過九眞, 其次泊息力; 婆羅左右望, 群鳥比蟣蝨; 咸歸西道主, 盡拔漢赤幟. 日夕興亡淚, 多於海水滴. 行行復行行, 便到獅子國.(「음빙실시화」 제8조)
 
<제3장>
……
저 불법의 교화력으로 치자면
여러 오랑캐가 오히려 무서워 떨 판.
불법이 비추인 곳을 다 모으면
아홉 주보다도 넓을 것이네.
남쪽 끝으로는 주파朱波까지,
북쪽 끝으로는 말갈의 땅 너머까지 이르렀네.
동쪽 끝으로는 일본으로 건너가
천황은 모두 승첩에 올랐다.
이 지방에서는 부처의 치아를 보호한다 하고,
저 고장에서는 부처의 뼈를 모신다 하네.
어떤 이가 바리때의 인연을 얻었는가,
그 날이 바로 경축할 길일이로다.
자색과 금색의 계단을 장엄하게 꾸미고,
흰빛 은으로 지어진 궁궐을 공양하였다.
바다가 넘칠 만큼의 많은 기름을 태우고,
천둥이 치듯 금방울을 울린다.
향이 자욱하고 깃발이 나부끼며,
아홉 하늘과 아홉 땅이 환히 밝혀진다.
오백의 호랑이와 사자 그리고 코끼리,
온 땅에서 보살을 영접하네.
이러한 공덕의 성대함
천만 겁을 경과할 것이오,
그 비호에 의지하는 나라
금 사발이 영원히 깨어지지 않으리라 하였네.
허나 누가 알았으랴, 서쪽 땅의 장사치가
손에는 무기도 들지 않은 채,
부처가 강생한 땅을
하루아침에 모조리 겁탈할 줄을.
……論彼象敎力, 群胡猶震慴. 綜佛所照臨, 竟過九洲闊. 極南到朱波, 窮北踰靺鞨. 大東渡日本, 天皇盡僧牒. 此方護佛齒, 彼土迎佛骨. 何人得鉢緣, 某日是箭節. 莊飾紫金階, 供養白銀闕. 倒海然脂油, 震雷響金鈸. 香雲幢幡雲, 九天九地徹. 五百虎獅象, 徧地迎菩薩. 謂此功德盛, 當歷千萬劫. 有國賴庇護, 金甌永無缺. 豈知西域賈, 手不持寸鐵; 擧佛降生地, 一旦盡劫奪.(위와 같음) **

양계초가 이 시에서 우선 주목한 바는 그 ‘규모’와 ‘제재’라고 하겠습니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긍정한 바는 이로부터 비롯되는 ‘서사’의 힘과 ‘기세’의 미학입니다.

우선 그 규모를 한번 볼까요? 이 시는 다섯 음절이 한 구를 이루며 구의 수에 제한이 없고 한 구절 내 음절의 배치와 각운의 변화가 비교적 자유로운 오언고체五言古體의 시입니다. 오언구가 모두 432구이니 글자 수로 치면 2,160자이지요. 중국시가사에서 가장 긴 시로 통상 한漢 나라 때의 「공작동남비孔雀東南飛」를 꼽습니다만, 그 시가 353구에 1,765자이니 「스리랑카의 와불상」이 훨씬 긴 셈이지요. 규모가 이렇습니다. 이것은 일반적인 중국시의 전통에서 볼 때 분명 파격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중국의 시는 분명 서정적인 단시가 중심이었지요.

일반적으로 ‘규모’는 기세를 암시하지요. 하지만 그 규모가 반드시 기세로 이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양계초가 규모를 중시한 것은 그것이 기세를 확보하는 중요한 전제가 될 수 있기 때문이었지만 아무리 규모가 크더라도 「공작동남비」처럼 ‘아녀자’의 감수성을 위주로 하는 것은 높이 치지 않았습니다. 양계초가 이 시에서 주목한 바는 그렇기에 그 규모에 덧붙여 그 제재와 ‘남성적 서사성’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이 시는 스리랑카의 콜롬보 항 남쪽 7킬로미터 쯤 되는 곳 산 속에 있는 와불상에 대한 묘사에서 시작하여 인도를 포함한 이 지역의 역사, 불교 등 아시아 종교의 역사 그리고 유럽의 해양 진출 이후 침탈의 역사를 그리고 있습니다. 양계초가 지적한대로 한편의 ‘종교정치관계론’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상세하지요. 그러나 형식상 분명 ‘시詩’이고 여기에 덧붙여 읊고 있는 대상에 대한 작자의 감개가 군데군데에서 물씬 묻어 나오기에 역사 저술이라고 할 수는 없겠습니다. 그렇지만 이 시의 힘이 그 ‘서사성’에서 나온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 서사는 남성적 시각에서 이루어지는 ‘힘의 관계’에 대한 서사입니다. 규모와 제재 그리고 남성적 서사성, 이 삼자가 바로 양계초가 찬탄하는 ‘기세’의 원천일 것입니다.

양계초가 시를 통해 남성성이 구현되기를 갈망한 것은 당시 개혁가들이 중국의 나약함을 비판하며 스파르타식의 무혼武魂을 강조하고 있던 것과 상통합니다. 위진남북조魏晋南北朝를 거치면서 형식이 완비된 이래 ‘시詩’는, 특히 율시律詩와 절구絶句는 중성성의 발현인 경우가 많았습니다. 양계초는 중성의 미학을 담지하는 장르인 시가 남성적 미학을 담지하는 장르로 거듭나기를 갈망했던 듯합니다.

서구의 압도적인 포화를 매개로 ‘근대’를 맞이하게 된 중국인들에게 견고한 병선과 성능 좋은 대포(堅船利炮)는 최대의 관심사였다.(「철갑거공鐵甲巨工」, 『점석재화보』, 1886)

더 중요한 것은 ‘서사성’에 대한 강조라고 생각됩니다. 시와 서사성은 어떤 관계가 있을까요? 중국에는 역대로 서사적인 운문이 거의 없었습니다. 문인들의 자기 인식이 확고해 지기 시작한 한대漢代는 바로 서정 단시가 형성된 시기이기도 합니다. 황제 권력이 만들어내는 공식적 서사와는 다른 대안적 서사가 사실 상 불가능한 혹은 위험한 선택이었던 상황에서―사마천司馬遷과 무제武帝의 대립은 이 점에서 매우 상징적이라고 생각됩니다만― 세계의 상像을 구축하려는 서사적 열망은 <비판․원망의 정서>로 내화되고 그것이 완전한 이상 세계를 상징하는 <응축된 미적 형식>과 결합한 것이 <시詩>의 세계가 아닐까요? 결국 시란 일종의 문학적 ‘화해’ 혹은 ‘타협’의 장이었다고 보는 것이지요. **

명대明代에 들어와 문인들이 서사의 가능성을 새롭게 발견하는 것은 이들과 황제권력 사이의 관계에 다소간 변화가 생겼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특히 명청대明淸代 강남江南 지역의 중하층 문인들은 많은 경우 과거제를 매개로 한 황제권력과의 유착으로부터 벗어나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여기에서 자신들의 서사를 구축․향유할 가능성이 잉태되는 것이지요. 명청대를 거쳐 황제권력은 각종 서사물의 판각과 유통에 대해 끊임없이 제재를 가하려고 했지만, 풍몽룡馮夢龍과 같은 이들은 적극적으로 민간의 서사를 문인의 것으로 만들어갑니다.

풍몽룡과 같은 성향의 문인들이 ‘화해’․‘타협’의 산물로 출발했고 시대를 내려오면서 고착되어 버린 ‘시’의 진정성을 부정한 것은 필연적인 결과로 보입니다. 이미 굳어버린 장르에 새로운 서사의 힘을 부여하는 것은 불가능했겠지요. 이들이 주목하는 운문은 그렇기 때문에 산가山歌와 같은 민간운문이었습니다.

바야흐로 변혁의 시대에, 황준헌이 상투적인 시의 진정성에 의구심을 표하면서 장편의 서사시를 비롯하여 민가와 새로운 가사체 운문에 관심을 가졌다는 바로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양계초는 소설계혁명이라는 구호를 통해 서사 장르의 힘을 강조함과 동시에 시에도 서사적 힘을 부여하길 원했으며 그 모델을 황준헌에게서 찾았던 것이지요.**

「스리랑카의 와불상」. 응축적인 당시唐詩의 미학이나 사변적인 송시宋詩의 미학에 익숙한 사람들에게는 ‘시’로 여겨지기 힘든 작품입니다. 터무니없이 길며 시로 표현하지 않았던 내용을 다룬 「스리랑카의 와불상」, 그리고 그에 대한 찬사. 이는 서사성이 탈각된 전통시의 경계를 확장하고자 한 시도가 아니었을까요?

민정기

* 이 작품은 黃遵憲의 시집인 『人境廬詩草』 권6에도 실려 있는데, 글자가 다른 부분이 더러 있다. 이 점 참작했다. 번역은 일차적으로 錢仲聯의 『人境廬詩草箋注』를 근거로 하였으며, 마찬가지로 錢仲聯의 주석에 주로 근거한 최종세의 역주(「黃遵憲의 시 『錫蘭島臥佛』에 대하여」, 『中語中文學』 제8집, 1986, 6~32쪽)를 참고하였다. 시의 전모는 최종세의 번역을 참조할 것.

** 시와 서사성의 관계에 관한 이와 같은 해석은 김상호, 「전통 시기 중국 지식인과 詩文學의 존재 방식에 관한 검토」(『中國文學』 제36집, 2001년 11월)에서 시사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