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메이린陳美林 교수와의 대담

박계화(朴桂花 延世大 中文科 講師) 진행/정리

천메이린 교수, 사진 ⓒ 조관희, 2006

[진행자의 말] 천메이린(陳美林) 교수는 우리에게 저명한 『유림외사』 연구자로 알려져 있다. 1999년 5월 27일부터 29일까지 거행된 계명대 개교 35주년 기념 학술대회에 초청되어 강연을 한 뒤, 다시 고려대 중국학연구소에서 초청강연회를 가졌다. 이 기회를 빌어 천메이린(陳美林) 교수와의 대담의 자리를 마련한 것이다.

박계화 : 안녕하세요? 이년 전 ‘삼국지 역사 기행’ 도중 난징(南京)에 들렀을 때 선생님과의 짧은 만남이 아쉬웠는데 이렇게 서울에서 다시 만나 뵙게 되어 정말 기쁩니다. 계명대 학회에 참석하시기 위해 오신 바쁜 일정임에도 불구하고 선생님의 좋은 의견을 듣고자 이러한 자리를 마련하였습니다. 우선 한국의 소설학회 회원들에게 선생님의 간략한 약력과 지금 활동하고 계시는 분야를 소개해 주시기 바랍니다.

천메이린 : 저는 1932년 남경에서 태어나 1953년 저장대학(浙江大學) 원문학원(原文學院) 중국문학과(中國文學系)를 졸업하고 그 후 계속 교직에 종사하고 있습니다. 현재 난징(南京)사범대학에서 가르치고 있으며 7명의 박사생을 지도하고 있고 또, 중국『유림외사』학회부회장과 쟝쑤성(江蘇省) 명청소설연구회 회장직을 맡고 있습니다. 20여 년 동안 22권의 저작을 출판하고 200여만 자의 논문을 발표하였지요. 근래에도 톈진(天津) 백화문예출판사(百花文藝出版社), 타이완(臺灣) 삼민서국(三民書局) 등에서 출판하려는 연구서를 집필 중입니다. 『유림외사』에 관한 것뿐만 아니라 중국 고대 소설사, 희곡 방면의 책들입니다. 아직 완성하지 못한 과제들이 많지요. 금년 안에 70여만 자 분량의 논문집을 완성시키려 하는데, 제목은 『청량문학(淸凉文集)』으로 할 생각입니다. 20여 년간 발표한 논문 중 중요한 것을 뽑아서 실으려 합니다.

박계화 : 『청량문집(淸凉文集)』이라고 이름 붙이시는 데 무슨 이유가 있으십니까?

천메이린 : “청량(淸凉)”이라고 한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지요. 첫째는 제가 살고 있는 곳 부근에 청량산(淸凉山)이라는 산이 있기 때문이고요, 둘째는 학문을 하는 이는 “청량함”을 간직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학문을 하는 사람은 떠들썩하고 외재적인 요소에 휩쓸려서는 안 되는 법이에요. 내적으로 고요하게 연구해 나가는 과정 속에서 행복을 느끼게 되지요. 좋은 문장이란 등받이 없는 작은 의자에 앉아서 써내는 것이지, 나가서 장사에 신경 쓰거나 관리가 되려고 돌아다니면서 써내는 것이 아닙니다. 문장은 고치면 고칠수록 좋아지는 것이지요. 옛 말에 “문장은 백번이라도 고쳐야 하고, 성인과 명인은 보잘 것 없는 의자에 앉아야 한다(文章不厭百回改, 板凳要坐聖名人)”이라는 말도 있지 않나요? 진정한 독서인은 내적으로 청량하고 생활이 간단해야 합니다. 저는 피로할 때면 청량산으로 산보를 나간답니다. 사람도 적고 조용해서 정신을 맑게 해 주지요. 제가 청량산에 관해 쓴 산문이 『광명일보(光明日報)』 등에 실린 적도 있어요. 참, 『유림외사』에도 청량산이 나오지요.

선보쥔沈伯俊 교수와 함께 한 천메이린 교수, 사진 ⓒ 조관희, 2001

박계화 : 저희들은 선생님께서 『유림외사』 전문가라고 알고 있는데요. 그 외에 관심을 가지고 계시는 분야가 또 있으십니까?

천메이린 : 사실 저는 『유림외사』 전문가가 아니에요. 『유림외사』에 관한 저작은 22개 저작 중 1/3 정도이고 기타 다른 방면이 2/3를 차지하지요. 논문도 마찬가지로 『유림외사』 관련 논문은 전체의 1/3 정도랍니다. 나머지는 두시(杜詩), 희곡, 시문(詩文), 문화사상사(文化思想史), 동방 한문학(漢文學), 당대(唐代)의 유(儒), 불(佛), 석(釋)에 관한 문장 등등이지요. 1995년 한국의 외국어대학 『중국학연구』에 실린 저의 논문도 「유가가 문학에 끼친 영향을 논함(試論儒學對文學之影響)」이라는 글이었어요. 『유림외사』에 대한 글이 많기는 하지만 제가 전문가라고는 말할 수 없지요. 또, 지금 지도하고 있는 박사반 학생 중 한 명은 팔고문에 관해 연구하고 있습니다. 과거제도가 신해혁명으로 인해 없어지기까지 사실 팔고문은 글쓰기의 기본이었거든요. 팔고문은 송대(宋代)에 형성되었지만 명대(明代)에 본격적으로 유행하여 5-600년간 쇠퇴하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글쓰기 연습은 문학 학습의 기본 공력이 되었고 중국 문학에도 많은 영향을 주었지요. 특히 희곡과의 영향 관계는 매우 밀접합니다. 구조상 서막-발전-고조-결말(대단원) 식의 모습이라든지, 문체상 대언체(代言體) 즉 1인칭이 아니라 3인칭으로 기술하는 것은 팔고문이나 희곡이나 비슷하지요. 과거제도에서 팔고문은 문제가 된 부분이기는 하지만 문학과의 관계에 있어서 연구할 가치가 충분하다고 봅니다. 명대의 대표적인 문장 형태로 문학가 중 리줘우(李卓吾)나 탕셴쭈(湯顯祖) 등도 팔고문에 아주 능했지요. 자신의 지식을 문학적으로 표현해 내는 기교를 단련시키는 데 팔고문의 역할이 아주 컸다고 봅니다. 제가 연구하는 것은 그러니까 『유림외사』뿐만 아니라 중국 고대문학, 그 중에서 주로 명청소설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루더차이魯德才 교수와 함께 한 천메이린 교수, 사진 ⓒ 조관희, 2001

박계화 : 『유림외사』에도 팔고문의 폐해를 제재로 한 부분이 있는데, 선생님 말씀을 듣고 보니 폐해뿐만 아니라 긍정적인 영향도 고려해 보아야 하겠군요. 선생님의 연구 경향을 보아도 알 수 있듯이 중국에서는 한 장르에 대해서만 연구하지는 않는 것 같아요.

천메이린 : 그렇습니다. 작년에 졸업한 제자도 한 명은 명청 문예사조에 관해, 한 명은 『좌전(左傳)』에 관해, 또 다른 한 명은 고대 소설에 관해 논문을 썼습니다. 금년의 지도학생도 한 명은 팔고문에 관해, 또 한 명은 샤징취(夏敬渠)의 『야수폭언(野叟曝言)』에 관해 연구하고 있어요. 『야수폭언』은 루쉰(魯迅)이 『중국소설사략』에서 청대재학소설(淸代才學小說)의 으뜸이라는 데 동의한 소설이지요. 사실, 소개하고 있는 4권의 재학소설을 살펴보면, 『야수폭언』을 지은 샤징취(夏敬渠)는 저장(浙江) 장인(江陰) 사람이고 『담사(蟫史)』를 지은 투선(屠紳) 역시 저장(浙江) 장인(江陰) 사람입니다. 『경화연(鏡花緣)』을 지은 리루전(李汝珍)은 즈리(直隸) 다싱(大興) 사람이지만, 『연산외사(燕山外史)』를 지은 천츄(陳球)도 쟈싱현(嘉興縣) 북쪽 슈쉐이(秀水) 사람 즉 저장(浙江) 사람이에요. 이 네 권의 책을 모두 재학소설로 볼 것인지에 대해서는 서로 다른 의견들이 있기는 하지만, 작가들의 지식적 측면을 많이 드러내고 있다는 것은 사실이고 공교롭게도 이들 작가 중 셋이 저장(浙江) 사람이라는 것은 주목해 봐야 할 것 같습니다.

명청시대 장쑤(江蘇), 저장(浙江) 일대의 경제 발전이 매우 빨랐으며, 문화 수준도 비교적 높았지요. 과연 이 일대의 작가와 소설가의 학문 수준이 높았는가 하는 것은 당시의 문화현상에 관한 연구를 통해 알아 볼 수 있습니다. 이전의 문인 작가들은 대학자인 경우가 대부분이었습니다. 지금의 상황과는 많이 달랐지요. 지금의 소설작가들은 작품을 써 내기는 해도 학자는 아닌 경우가 대부분이니까요. 명청대의 경제, 문화가 발달한 지역의 일부 소설가는 전통 문인들처럼 부단히 문화적 소양을 키우고 그것을 소설 속에 반영하려고 노력했었다고도 보여 집니다. 이러한 관점으로 샤징취(夏敬渠)를 연구해 보는 것도 의미가 있겠지요. 하나의 소설을 소설집으로서만 연구하는 것에서 벗어나 좀 더 넓게 문화와 관련시켜 연구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박계화 : 그렇군요. 조금 전에 선생님께서 스스로 『유림외사』 전문가라고 말할 수는 없다고 하셨지만 그래도 선생님 연구의 1/3을 차지하니 상당히 많은 노력을 기울인 부분이라고 할 수 있는데, 『유림외사』를 연구하게 되신 특별한 동기가 있으신지요?

천메이린 : 저는 처음에 소설이 아니라 희곡으로부터 연구를 시작했습니다. 60년대 초였지요. 29살 때 리위(李玉)의 『청충보(淸忠譜)』에 관해 쓴 것이 저의 첫 번째 저작이었어요. 그런데 이 첫 저작은 완성되고도 바로 출판되지를 못했지요. 문혁(文革)이 시작되었기 때문이에요. 차라리 출판되지 않은 것이 다행이었어요. 『청충보(淸忠譜)』는 동림당(東林黨)과 시민들이 위엄(魏閹) 일파에 반항하여 투쟁한 것을 칭송한 것인데 당시에 출판되었으면 제가 어떻게 되었을지 아무도 모를 일이지요. 그래서 이 책은 문혁이 끝나고 제 나이 40이 넘어서야 출판되었습니다.

샤오샹카이蕭相愷 선생과 함께, 사진 ⓒ 조관희, 2002

『유림외사』 연구는 아주 우연한 기회에 시작하게 되었어요. 문혁 기간 중 인민문학출판사에서 『유림외사』를 정리 출판하려한다고 그 작업을 위탁해 왔는데 3-4명씩 소조(小組)를 이루어 작업을 진행했습니다. 순전히 일의 필요로 인해 시작한 것이지요. 당시 비림비공(非林非孔)의 구호 하에 『유림외사』도 반유교(反儒敎)의 입장에서 기술하라고 요구하였는데, 저는 도저히 이것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저는 같이 못하겠다고 하였지요. 각자 자기 것을 하자고 말하고는 저는 저 나름대로 연구를 진행시켰고, 그 성과물들은 문혁이 끝난 후 『오경재연구(吳敬梓硏究)』라는 한 권의 책으로 나오게 되었습니다.

박계화 : 문혁(文革)이라는 시기가 선생님의 연구 방향에 큰 영향을 미친 셈이네요. 최근에 『유림외사』 국제학술대회도 열렸던 것으로 아는데, 최근 유림외사 연구 상황은 어떻습니까?

천메이린 : 1996년에 양저우(揚州)에서 “국제『유림외사』학술 연토회”가 열렸었지요. 국내외 40여 명의 학자가 참석하여 30여 편의 다양한 논문이 발표되었습니다. 그 후 요즘 들어 출판된 책이나 논문은 그리 많지 않은데, 비교적 중요한 것으로 장진츠(張錦池) 선생의 「유림외사의 기전성 구조형태를 논함(論『儒林外史』的紀傳性結構形態)」이 있지요. 「유림외사 인물론(『儒林外史』人物論)」이 최근에 중화서국(中華書局)에서 출판되었고, 산동인민출판사(山東人民出版社)에서 「각가해독 유림외사(各家解讀『儒林外史』)」가 나왔습니다. 이 책은 논문 선집으로 20여 편이 수록되어 있는데, 저의 논문도 2편이 들어있어요. 하나는 『오경재연구(吳敬梓硏究)』에도 수록되어 있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1984년에 발표한 「유림외사 인물의 진퇴장(『儒林外史』人物的進退場」)이라는 글입니다.

박계화 : 외국학자들의 『유림외사』에 대한 관심도 비교적 높은 편인 것 같은데 그들의 연구 방법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천메이린 : 사실 외국학자들의 연구동향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거의 없습니다. 다만 지난 번 학술연토회 때 조관희 선생이 『유림외사』가 풍자소설인가 아니면 현실주의소설인가에 대해서 발표를 하였는데 이 두 가지가 서로 다른 범주로서 서로 대립되는 것이 아님을 주장한 것으로 저도 이에 대해 동감하는 바입니다. 서양학자들의 다양한 시각과 방법론은 많은 자극과 흥미를 불러일으킵니다. 아마도 서로의 문화적 특징이 다르기 때문에 그렇겠지요. 그러나 한 작품을 연구하는 데 있어 진정한 정신을 파악하지 못하고 방법만 따라하다가는 “발을 깎아 신발에 맞추는 격(削足適履)”이 되기가 쉽습니다.

박계화 : 그럼 이번에는 선생님께서 중국문학을 연구하시는 방법과 입장에 대해 좀 말씀해 주시지요.

천메이린 : 한가지로 말씀드리기는 어렵지만 저는 중국의 전통적인 연구방법도 이용합니다. 가장 기본적인 입장은 문헌학적 방법으로 문학을 연구하는 것을 지지한다고 할 수 있지요. 문헌학 적으로 정밀하게 연구해 나가야 실제에 맞는 결과를 얻을 수 있습니다. 서양의 방법론에 대해서는 잘 모르기 때문에 뭐라 말할 수 없지만 저는 루쉰(魯迅)의 “나래주의(拿來主義)”를 찬성합니다. 즉 사용하여 문제를 설명할 수 있으면 그 방법을 취하고 설명할 수 없으면 취하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또 근거 없이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하고 소란스럽게 만드는 연구방법에 대해서도 반대합니다.

샤오샹카이 선생과 함께 한 천메이린 교수, 사진 ⓒ 조관희, 2006

박계화 : 앞으로의 연구 계획은 어떠하신지요?

천메이린 : 앞으로 2-3개의 과제가 남아 있는데, 우선 『유림외사』의 연구사를 다시 써 보려고 합니다. 명청소설 교주(校注) 작업도 계속하고요. 45년 이상 학교에 몸담고 있었는데 아직 수업도 많고 일도 많아서 퇴직을 할 수가 없네요. 몸을 늙었지만 늘 젊은 연구자들과 함께 있으니 마음은 아직 젊은이 같아요. 젊은 연구자들의 요구가 만만치 않지만 저는 그들과 함께 있는 것이 즐겁습니다. 그들의 한 두 마디가 저의 경직된 사고를 일깨워 주거든요.

박계화 : 2001년은 오경재 탄생 300주년으로 알고 있는데, 국제 학술 대회나 다른 어떤 활동을 계획하고 계시는 것은 있는지요?

천메이린 : 아쉽게도 아직 계획하고 있는 것이 없습니다. 가장 주요한 것은 재정적인 문제이지요. 지금 안후이성(安徽省)에 지원을 요청하고 있습니다만 어떻게 될지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 만약 개최하게 된다면, 한국의 중국소설학회 회원들도 많이 참석해 주시길 바랍니다.

천메이린 교수, 사진 ⓒ 조관희, 2006

박계화 : 마지막으로, 선생님께서 저희 소설학회에 하시고 싶은 말씀이 있으시면 좀 해주십시오.

천메이린 : 한국의 중국소설학회에서는 좋은 일을 많이 하고 있는 것 같아요. 1년에 4회의 회보 발간, 학술발표 등등. 사실 소설은 시사(詩詞), 산문(散文) 등 다른 장르에 비해 제재의 범위도 훨씬 넓고 생활의 반영 정도도 강합니다. 시사(詩詞), 산문이 소설을 포괄하지는 못하지만 소설은 이들을 모두 포괄할 수 있지요. 그러므로 소설 연구도 이들에 비해 훨씬 활발해야 한다고 봅니다. 제가 몸담고 있는 강소명청소설연구회(江蘇明淸小說硏究會)는 연구소 소속으로 전문 학회가 아니라서 그리 자유스럽지는 못하지만 한국의 중국소설학회와 많은 교류를 통해 서로 도움이 되기를 바랍니다.

박계화 : 예. 저희들도 그렇게 되기를 바랍니다. 긴 시간 동안 좋은 말씀 들려 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

[엮은이 주: 이 글은 원래 『중국소설연구회보』 제36집(1998년 11월)에 실린 것을 엮은이가 수정 보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