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시화의-왕유王維 복양태수 최계중 형이 은거하는 앞산에서의 감흥崔濮陽兄季重前山興

복양태수 최계중 형이 은거하는 앞산에서의 감흥崔濮陽兄季重前山興/
왕유王維

秋色有佳興, 가을빛에 아름다운 감흥 이니
况君池上閑. 하물며 그대 연못가에서 한가롭게 지냄에랴.
悠悠西林下, 유유히 서쪽 숲 아래에서도
自識門前山. 저절로 문 앞산임을 알겠다.
千里横黛色, 천리까지 검푸른 빛 가로누웠고
數峰出雲間. 수많은 봉우리 구름 사이로 솟았다.
嵯峨對秦國, 험준한 산세는 진나라 땅을 마주하고
合沓藏荆關. 겹겹의 구릉은 사립문을 감춘다.
殘雨斜日照, 남은 빗방울 위로 비낀 햇살 비추고
夕嵐飛鳥還. 저물녘 이내 속으로 나는 새 돌아간다.
故人今尚爾, 친구는 지금도 오히려 이와 같은데
嘆息此頹顔, 노쇠한 내 얼굴을 탄식하노라.

[해제]

최계중(崔季重)은 하북 청하(淸河) 사람으로 천보 20년에 복양태수(濮陽太守)로 임명되었다. 복양은 복주(濮州)로 천보 원년에 복양군(濮陽郡)으로 고쳤으며 소재지는 지금의 하북성 동남부, 산동 증성(鄫城) 북쪽이다. 최계중은 복양태수를 지낸 뒤 왕유의 남전산 망천장 동쪽 산장에서 은거했다. 당시 두 사람은 자주 어울렸는데, 이 시는 바로 그때 왕유가 최계중에게 지어준 시다.

두보도 일찍이 중양절에 남전의 최 씨 산장에서 보낸 적이 있다. 진이흔(陳貽焮) 선생의 고증에 의하면, 최씨 산장은 ‘최씨 동산초당(崔氏東山草堂)’이며 최씨는 최계중이고 왕유의 손위 처남(외삼촌 아들)이라고 한다. 최씨 산장은 왕유의 망천장과 동서로 이웃하고 있었다 한다. 두보는 갑갑증을 해소하기 위해 중양절에 이 산장에서 보냈는데, 그의 <중양절에 최씨 산장에서(九日藍田崔氏莊庄)>라는 칠언율시를 지어 그 심정을 기록했다.

중양절에 최씨 산장에서九日藍田崔氏莊庄

老去悲秋强自寬, 늙을수록 가을이 슬프나 굳이 스스로 위로하고자
興來今日盡君歡. 흥을 내어 오늘 그대와 마음껏 즐기리라.
羞將短髮還吹帽, 부끄럽게도 머리 짧아 모자 날리지만
笑倩旁人爲正冠. 웃으며 옆 사람에게 모자 바로 써달라고 부탁한다.
藍水遠從千澗落, 남수는 멀리 여러 시내 따라 떨어지고
玉山高并兩峰寒. 옥산은 높고 두 봉우리 나란히 산뜻하다.
明年此會知誰健, 내년의 이 모임에 누가 건장한 모습으로 나올 것인지
醉把茱萸仔細看. 취한 채 수유 쥐고 자세히 들여다보노라.

최씨 동산초당崔氏東山草堂

愛汝玉山草堂靜, 그대의 고요한 옥산초당을 좋아하니
高秋爽氣相鮮新. 높은 가을 상쾌한 기운 신선도 하다.
有時自發鐘磬響, 때때로 종소리와 풍경소리 저절로 울리고
落日更見漁樵人. 해 지자 어부와 나무꾼이 다시 보인다.
盤剝白鵶谷口栗, 쟁반에는 백아곡 어귀의 밤 깎아놓고
飯煮靑泥坊底芹. 청니성 제방 아래 미나리를 삶아 먹는다.
何爲西莊王給事, 어찌하여 서쪽 산장의 왕유는
柴門空閉鎖松筠. 사립문 공연히 닫아 소나무와 대나무 가뒀나.

오언고시 상 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