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도王韜의 문언단편소설 : 새로운 세계와 옛 세계의 사이

「신문논설문의 탄생 : ‘온유돈후溫柔敦厚’를 거부한 울분의 언설」에서는 근대 중국의 초기 언론인 가운데 한 사람인 왕도의 신문논설문을 통해 당시 중국에 등장한 새로운 문체의 성격에 관해 이야기했습니다. 여기에서는 같은 이의 소설 쓰기를 통해 근대 초기의 ‘소설’의 성격과 위상에 대해 살펴볼까 합니다.

우선 ‘문언文言’이 무엇이냐에 관해 짧게 짚고 넘어갈까요? 사실 대단히 복잡한 이야기가 될 수도 있습니다만, 위험을 무릅쓰고 아주 단순하게 정리하자면 ‘문언’ 혹은 ‘문언문文言文’이란 일상의 구어와는 상당히 다른, ‘글쓰기’를 위해 운용되는 언어/서면어 체계라고 볼 수 있습니다. 즉 한어漢語(중국어) 문언이란 한어 구어 혹은 구어체의 서면어(보통 백화문이라고 하지요)와는 상당히 동떨어진 나름대로의 체계를 갖는, 글쓰기를 위한 언어라고 보면 되겠습니다. 흔히 우리가 옛날 ‘한문’이라고 할 때 이와 같은 한어 문언문을 지칭합니다.

‘태초에 이야기가 있었다’라는 말을 할 정도로 이야기 혹은 서사물의 전통은 오래된 것이지요. 그렇다면 문언으로 이야기를 쓰는 전통은 언제부터 비롯된 것일까요? 특이한 인물과 사건에 관한 기록들로 거슬러 올라가 그 근원을 살펴볼 수 있는데, 사실 역사를 기록하는 일과 뿌리를 함께 하고 있다고까지 말할 수 있습니다. 지금 우리는 지어낸 성분이 많이 포함되어 있다고 추정되는 이야기들을 따로 고대의 ‘소설’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만, 사실 옛날에는 역사적인 기록, 특이한 인물이나 사건에 대한 기록과 소설적 글쓰기는 착종되어 있었습니다. 명 나라에 오면 구어체의 문장, 즉 백화문으로 이야기를 쓰는 전통이 확립됩니다만, 짤막한 이야기는 여전히 대부분 문언으로 쓰여졌습니다. 청淸 중엽에 나온 포송령蒲松齡의 저 유명한 『요재지이聊齋誌異』와 같은 이야기집이 대표적인 예이지요.

왕도는 서사 문예 전통이 강했던 중국 강남江南 지역 출신이었기에 그에게 있어 어떤 계기에 의해서든 ‘소설’을 쓴다는 것은 그다지 부자연스러운 일이 아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는 신문에 상당히 많은 양의 소설을 실었고 후에 단행본으로 출판하기도 했는데, 제가 확인한 바로는 343편에 이릅니다. 여기에 소설인지 사실에 대한 기록인지 그 경계가 모호한 글들까지 포함하면 훨씬 많을 것입니다.

왕도가 써낸 많은 이야기들 가운데에서 무엇보다도 눈이 가는 것은 ‘다른 세계’로의 여행을 다룬 것들입니다. 주인공들이 경험하는 ‘다른 세계’는 바다 저 건너편에 있는 세계(용궁, 섬, 외국)이거나 신선의 세계 또는 꿈의 세계이지요. 이들 ‘다른 세계’는 대체로 현세의 결핍을 보상해 주는 등 무엇인가를 ‘주는’ 공간입니다. 「선곡仙谷」, 「육월방陸月肪」, 「홍운별숙紅芸別墅」(『송은만록淞隱漫錄』 권3, 권6, 권9), 「서린사徐麟士」, 「외우몽煨芋夢」, 「낙국기유樂國紀游」(『송빈쇄화淞濱瑣話』 권1, 권2, 권5)의 주인공들은 용궁이나 신선 세계에서 융숭한 대접을 받고 그곳에서의 경험의 결과로 현세에 돌아와 부귀를 누립니다.

「김경추金鏡秋」, 「이운란李韻蘭」(『송은만록』 권4, 권6), 「선정仙井」, 「반황량反黃梁」, 「몽중몽夢中夢」(『송빈쇄화』 권3, 권4, 권10)의 주인공들은 다른 세계에서 인과因果의 법칙과 자신이 묶여 있는 인연의 사슬을 알게 되거나 현세의 가치의 무상함을 깨닫게 되며 그 결과 현세에 돌아와 이전과는 다른 삶을 살게 됩니다.

후자의 경우 다른 세상은 부귀공명富貴功名의 원천은 아니지만 모종의 대안적 가치를 제공하는 공간이기는 합니다. 반면 「선인도仙人島」(『송은만록』 권1)의 주인공은 신선 세계를 경험한 후 다시 속세로 돌아오는데 이후 그곳을 다시 찾다가 도적에게 비참한 죽음을 맞게 되지요.

반면, 「인순도因循島」(『송빈쇄화』 권10;【부록 1】)와 같은 작품에서 그려지는 다른 세상은 악몽과 같은 곳입니다. 항해 중 풍랑을 만나 다다르게 된 섬에서 주인공은 인간의 모습과 비슷하지만 야수적인 속성을 더 많이 지녔으며 인간의 고혈을 빨아먹는 승냥이 족속이 다스리는 사회를 경험합니다. 이전에 그가 구해준 원숭이가 그 곳의 관리로 있어 그는 위험에 빠지지 않고 후한 대접을 받지만 자신이 목도하는 상황을 견디지 못하고 귀향길에 오르게 되지요. 사실 이 야수의 나라가 무서운 것은 그곳의 상황이 인간 세상과 너무나도 흡사하기 때문입니다. 번듯하게 의관을 갖추어 인간 모습으로 위장한 승냥이 족속의 지배자들이 사람들을 핍박하고 심지어 그 고혈을 먹는다는 설정은 한참 후에 나온 루쉰의 「광인일기狂人日記」의 발상과 흡사합니다.

이처럼 ‘다른 세계’는 때로는 유토피아적인 공간으로 묘사되기도 하며 현세와는 다른 가치를 담지한 공간으로 등장하기도 합니다. 한편 인간 세상과 다를 바 없는 흉악한 세상으로 그려지기도 하지요. 다른 세상은 긍정적인 자질을 가지기도 하지만 또한 흉악한 야수의 세상이기도 합니다. 왕도가 쓴 다른 이야기들 속에 등장하여 주인공들이 겪는 어려움에 도움을 주는 존재들은 많은 경우 이와 같은 다른 세상 출신의 존재들인데요, 그러한 존재들의 고향인 ‘다른 세상’이 담지한 가치에 대해서조차 작자는 이처럼 유보적일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왕도가 소설을 쓴 가장 큰 이유 가운데 하나는 현실의 질곡을 소설 속의 다른 세계를 통해 해소해 보고자 했던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런 다른 세계도 궁극적인 구원의 공간은 아니었던 셈이지요.

그의 소설에 나타난 다른 세상의 형상은 그가 경험한 새로운 세계 즉 서구에 대한 알레고리로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왕도는 서구라는 세계를 깊이 경험한 최초의 중국인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그에게 있어 서구는 중국이 나아가야 할 대안적 모델을 담지한 공간이기도 했지만 또한 중국의 위기를 가져온 경계의 대상이기도 했지요. 왕도의 소설에 나타난 다른 세상의 여러 모습은 서구에 대한 모순된 심경의 표현일 수도 있습니다.

다른 세상을 묘사한 이야기들에서 주목할 만한 또 다른 사항은 주인공들이 어떻게 그러한 세계를 경험하게 되느냐 하는 점입니다. 앞서 든 제목의 이야기들 가운데 주인공이 적극적으로 다른 세상으로 나아간 경우는 신비스런 비밀을 간직한 우물이 말라버리자 기꺼이 그 속으로 탐험을 나선 「선정仙井」의 주인공 최중상崔仲翔의 경우를 들 수 있습니다. 나머지 이야기들에서는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꿈을 통해 다른 세상을 경험하거나 배가 난파하여 그 곳에 도달하거나 그쪽 존재들의 초청을 통해 다른 세상으로 향하게 됩니다. 다른 세상이 모종의 긍정적인 가치를 가진 공간이라고 하더라도 그곳은 현세의 인간들이 적극적으로 추구한다고 해서 도달하는 곳이라기보다는 수동적으로 불가피하게 경험하게 되는 공간인 셈이지요.

또 한가지 언급할 점은 다른 세상에 놓인 주인공들은 그곳이 설사 낙원과 같은 곳이라고 하더라도 언젠가는 현세로 돌아가야 할 처지에 놓인다는 점입니다. 이 역시 그 주인공들의 의지와는 무관한 일이고요. 또 설사 주인공이 본래 살던 곳이 그리워 돌아가고자 하여도 정해진 때가 되어야 돌아갈 수 있고, 다른 세상의 존재가 허락하거나 도와주어야 가능합니다. 이처럼 이야기의 주인공들은 다른 세상으로 가거나 그곳으로부터 돌아옴에 대개 수동적인 위치에 놓여있게 되는데, 이러한 점 역시 작자가 경험하고 느끼고 있던 세상의 불가해성, 고립감, 무력감과 관련이 있을 것입니다.

주인공이 다른 세계에 아예 머무르며 원래의 세상으로 돌아오지 않은 채 잘 산다는 설정은 제가 확인한 바로는 『송은만록』(권12)에 실린 「소하만消夏灣」이 있을 뿐입니다. 여기서 주인공은 세계를 경험하기 위해 한구漢口에서 배를 타고 미국으로 향합니다. 그곳 생활이 마음에 들지 않아 영국으로 가던 중 풍랑을 만난 주인공은 알 수 없는 말을 쓰는 종족이 사는 이상한 세상에 도착합니다. 먼저 표류해 온 노인을 통해 그곳이 고대에 중국 땅에서 이주해 온 사람들이 사는 곳임을 알게 되는데, 곳곳을 돌아다녀 보고서는 이상향과 같은 그곳에 머물기로 합니다. 주인공이 안주하게 되는 곳이 미국도 영국도 아닌 고대 중국의 이민이 사는 곳이라는 점이 흥미롭습니다. 이 작품은 새로운 공간, 제재로의 확장을 보이는 듯하다가 다시 전통적인 구도와 설정으로의 복귀를 보여주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중국인이 그린 서양의 고층 빌딩. 들은 이야기에 상상을 보태 그린 듯하다.(『점석재화보』, 1888)

루쉰은 왕도가 써낸 이야기들이 이전의 문언단편소설과 비교할 때 여우와 귀신의 이야기는 적어지고 세간의 사랑 이야기가 많아졌다고 지적한 바 있습니다. 이런 견해는 앞에서 언급한 청대의 대표적 문언단편집인 『요재지이』와 비교해 보면 바로 드러납니다. 『요재지이』 이후 수많은 문언단편소설이 나왔지만 비슷비슷한 아류로 그만한 것이 없었던 상황에서 작자로서는 새로운 제재를 개발해야 할 상황이었으며, 상해와 같은 분위기의 도시에서 독자들이 요구하는 이야기의 성격이 『요재지이』에 실린 것과는 사뭇 달랐기 때문에 이러한 차이가 생겼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왕도와 같이 파란 많은 인생을 겪으면서 듣고 본 것이 많았으며 또한 자라면서 전래하는 갖가지 소설류에 익숙해 있었고 그 위에 글재주도 있었던 문인이 해낼 수 있었던 일종의 ‘개척’이라고도 볼 수 있겠지요. 또한 왕도는 동포들이 귀신과 요괴의 이야기를 사실로 믿고 거기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것을 마땅치 않게 여겼는데 이러한 입장이 그의 소설이 『요재지이』의 맥락에 있으면서도 그것에서 한 발짝 벗어나는 것을 가능케 했을 수 있습니다. 한편으로 이러한 경향은 중국의 문언소설이 육조六朝시대 이래로 지괴志怪로부터 전기傳奇, 장원莊園 배경으로부터 도시 배경으로 발전하면서 흥미를 유발하는 요소가 기괴한 제재로부터 복잡다단한 인간사로 옮겨간 추세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으로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기는 해도 왕도의 문언소설은 본질적으로 이전의 전통에서 크게 벗어나 있지 않다고 하는 것이 더 옳을 듯합니다. 요괴가 등장하는 이야기가 극히 적어진 것은 사실이지만 많은 이야기에서 도술을 부리는 인물 등의 신기한 요소가 가미되고 있는 점은 이전의 문언소설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무엇보다도 왕도가 쓰고 있는 이야기들의 구도가 구태의연한 것들이었습니다. 분명 상해의 독자와 근대적 도시의 감수성을 배경으로 한 것일 터인데도 그가 쓰고 있는 이야기들은 대부분 전통적 공간에서의 전통적 관계에 관한 것들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새로운 이야기에 대한 호기심 못지 않게 익숙한 구조의 이야기를 반복적으로 향유하고 싶어하는 욕구를 가지고 있습니다. 특히 가벼운 소일거리로 이야기를 대하는 독자일수록 파격적인 것보다는 익숙한 것을 찾는 경우가 많은데, 비슷비슷한 드라마가 끊임없이 재생산되는 요즘의 세태를 생각해 보면 수긍할 수 있는 현상입니다. 익숙한 구조의 반복적 향유는 세계가 안정되고 견고하다는 것을 확인하는 일종의 세속적 의식儀式 행위인 셈이지요. 왕도가 써낸 이야기들은 바로 이 지점에서 전통적 관습과 결합하고 있습니다.

‘다른 세계’를 다루는 이야기들 역시 전통적 관성에서 벗어나지 못하였고 결국 그것이 다른 세계에서의 다른 삶에 대한 진지한 탐색을 수행하는 데 걸림이 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사실 이 부류에 속하는 이야기들은 어떻게 보면 『요재지이』에 나오는 「야차국夜叉國」, 「선인도仙人島」(권3, 권7)와 같은 작품으로 대표되는 ‘표류 이야기’의 전통을 충실하게 계승하고 있다고 할 수 있는데, 역시 익숙한 이야기의 반복으로 인한 즐거움의 층위를 갖지만 더 확장된 내용을 담아내지는 못하고 있는 것이지요. 섣불리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만, 중국인들이 전통적으로 가지고 있던 바다와 그 너머 다른 세계에 대한 근본적 두려움, 이질감 같은 것도 생각해 볼 수 있을 듯합니다.

『송은만록』(권8)에 실린 「해저기경海底奇境」(【부록 2】)과 같은 작품은 드물게 정치와 경제에 관한 작자의 입장이 드러나는 작품으로, 경제와 치수治水등 당시의 현실 문제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는 주인공 섭聶 선비가 견문을 넓히기 위해 배를 타고 여정에 오르는 것으로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그런데 주인공이 유럽에 도착하면서부터 이야기는 기담奇談의 방향으로 선회하여 결국 해저의 신비한 세계를 경험하고 유럽에서 알게 된 미녀와 재회하여 함께 지내다가 보화를 가지고 고향으로 돌아온다는 결말로 이어집니다. 관습적으로 다루어지던 것과는 다르게 ‘다른 세계’에 대한 경험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끌고 나가는 것이 쉽지 않은 작업이었을 것임을 짐작케 합니다.

장하이린張海林은 『왕도평전王韜評傳』의 한 장을 할애하여 왕도의 필기筆記와 문언소설을 다룬 바 있습니다. 여기서 장하이린은 왕도의 문언소설의 주요한 내용이 1. 봉건적 관료사회의 암흑상을 비판; 2. 봉건적 예교에 속박되지 않은 남녀의 자유로운 연애를 찬양; 3. 문인의 이상과 희망을 묘사; 4. 문인의 풍류를 표현한 것이라고 쓰고 있습니다. 또한 궈옌리郭延禮의『중국근대문학발전사中國近代文學發展史』에서는 1. 요괴의 이야기보다는 현실사회의 인생을 다룬 것이 많으며; 2. 만청晩淸 사회의 암흑상과 관리의 부패를 반영하고 있고; 3. 풍부하고 다채로운 여성 형상을 창조하였고 특히 자신의 사랑과 행복을 위해 적극적으로 행동하는 여성상을 보여주며; 4. 관심을 해외에 돌린 작품들이 있음을 왕도의 문언소설의 주요한 특징으로 꼽고 있습니다. 이처럼 왕도의 소설에서 ‘반봉건’적인 비판의식을 찾으려 한다거나 ‘해외에 눈을 돌린 점’을 부각시켜 논의하는 것은 초기 신문논설문의 필자로서 다방면의 개혁을 논의한 ‘개혁사상가’ 왕도의 위상에 합당한 내용을 그의 소설에서 찾아 의미를 부여하기 위한 것이라고 보입니다. 그렇지만 이러한 작품들은 사실 극히 일부에 불과합니다.

『점석재화보』의 편집 책임자였던 오우여吳友如가 그린 「해저기경」 삽화.

왕도의 문언소설을 읽고서 그가 동시에 『순환일보循環日報』 논설문의 필자임을 상상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문학사가들의 긍정적인 평가에도 불구하고 실제로는 소수의 이야기들만이 작자가 이미 넓은 ‘세계’를 보았고 그 때문에 다양한 부문의 개혁을 주장하는 데 열심인 사람이었다는 희미한 흔적을 보여줍니다. ‘다른 세계’를 다룬 작품들은 중국의 소설의 새로운 가능성을 분명 보여줍니다. 그렇지만 이러한 작품들 역시 왕도의 소설 세계에서 아주 작은 부분만을 차지하며 그 의미가 무시되어서도 안되겠지만 과대평가 될 필요도 없을 듯 합니다. 신문논설문에서 보여주는 세계와 문언소설에서 보여주는 세계가 다른 것은 아마도 이 두 가지 글쓰기 행위를 할 때 그의 입장이란 것이 사뭇 다른 것이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왕도가 소설 쓰기에서 우선적으로 두고 있던 층위는 논설문에서 우선적으로 두고 있던 층위와 달랐습니다. 그리고 그의 소설 쓰기는 유희적 층위, 상업주의적 층위를 매개로 전통적 관성과 강하게 결합하게 되지요. 이러한 점들이 새로운 세계관이나 주제/제재를 담아낼 수 있는 혁신적인 소설이 탄생하는 것을 힘들게 만들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