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보태감三寶太監 서양기西洋記 통속연의通俗演義 제4회

제4회 먼저 번뇌를 없애려고 머리를 깎고
나중에는 대장부임을 보이려고 수염을 남기다
先削髮欲除煩惱 後留鬚以表丈夫

由來迹狀甚殊常 내력과 행적이 너무 특별하여
脫落人間宅渺茫 인간 세계에 내려오니 집이 아득하네.
鐺煮山川深有象 산천을 솥에 볶으니 형상이 심오하고
瓢藏世界妙無疆 표주박에 세상을 담으니 아득하여 경계가 없네.
衝天淨假能飛翼 하늘에 올라 청정하게 쉬며 날아다닐 수 있고
服日長居不老鄕 태양의 정기 먹으며 늙지 않고 오래도록 사는 것은
漢武秦皇求未得 한 무제도 진시황도 구하지 못했거늘
豈因浪說事荒唐 어찌 말도 안 되는 소리 때문에 황당한 일을 벌이는가?

한편 김 원외랑과 그의 아내는 원래 옥황상제의 시중을 들던 금동(金童)과 옥녀(玉女)였는데, 인간 세상이 그리워서 둘이 함께 내려왔다가 부부가 되었다. 영소보전에서야 순식간의 일이지만 인간 세상에서는 어느새 칠칠 사십구 년이 흐른 뒤였다. 그런데 그날 연등고불이 인간 세계에 내려오자 그의 몸에서 발산되는 수많은 금빛이 영소보전까지 치솟았다. 이 때문에 옥황상제가 대전에 올라 금동과 옥녀를 찾으셨으니, 그들이 금방 원래 자리로 돌아가지 않을 수 있겠는가?

게다가 그들이 낳은 아이는 더욱이 귀로 들을 수 없고 눈으로 볼 수 없는 수많은 인과를 갖고 있었다. 그걸 어찌 아느냐고? 원래 이 아이는 오십 년 마하승기의 재난을 풀어주기 위해 인간 세계에 내려온 연등고불이었기 때문이다. 그의 명호가 왜 연등고불인가? 그는 원래 서천의 태자(太子)로 태어났는데, 태어난 날 그의 몸에 등불처럼 밝은 빛이 일렁였기 때문에 그런 명호가 붙은 것이다. 그가 몸을 등잔 접시로 삼아 등불을 밝힌 것은 ‘등(燈)’이라는 글자가 또 ‘금(金)’을 따르기 때문인데, 후세에는 이 때문에 그를 정광불(錠光佛)이라고 불렀고, 요즘 사람들은 줄여서 ‘정괄불(定光佛)’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를 증명하는 게송이 있다.

說卽雖萬般 말이야 여러 가지로 많지만
合理還歸一 이치에 맞는 것은 하나로 귀결된다네.
除是身畔燈 곁에 있는 이 등불을 없애야
方才是慧日 비로소 지혜의 해가 뜬다네.

한편 연등고불의 화신인 이 아이는 태어날 때 부모가 세상을 떠나서 정자사 운적스님의 제자가 되었는데, 운적 스님은 그를 무척 아꼈다. 다만 이 제자에겐 아주 이상한 구석이 많았다. 그것은 절에 들어온 뒤로 생긴 것이 아니라 태어날 때부터 갖고 있던 성격이었다. 오줌을 싸지 않는 것은 그렇다 치고, 하루에 몇 가지 음식을 몇 그릇이나 주더라도 다 먹는데 도무지 배부르다고 하지 않는 것이었다. 그리고 사나흘 동안 먹을 것을 주지 않아도 달라고 하지도 않고 배고프다고 하지 않았다. 또 한 가지, 그는 남들과 똑같이 하얀 눈자위와 까만 눈을 갖고 있었지만 한쪽 눈은 뜨지 않았고, 남들과 똑같은 입과 혀를 갖고 있었지만 말을 한 마디도 하지 않으며, 남들처럼 동그란 귀를 갖고 있었지만 무슨 소리든 듣지 못했으며, 남들과 똑같이 가늘고 고운 열 개의 손가락을 갖고 있었지만 아무 것도 집어 들지 못했고, 남들과 똑같이 발이 달려 있어서 재주넘기를 할 수 있었지만 걷거나 뛰지는 못했다. 오로지 앉아 있는 것만이 타고난 팔자였다. 선방(禪房)에 앉으면 벽돌 벽을 바라보며 몇 달이든 앉아 있었고, 승방(僧房)에 앉으면 판자벽을 바라보며 여섯 달 동안 앉아 있곤 했다.

날랜 망아지가 구멍으로 내달리듯, 번갯불이 내리치듯 어느새 삼삼은 구, 아홉 해 가까운 세월이 흘렀다. 사부는 그를 아꼈지만 그에게는 이처럼 보통 사람들의 정리(情理)에 맞지 않는 부분이 적지 않았던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어느 날 등화상(滕和尙)이라고 자칭하는 어느 행각승이 운적스님을 찾아왔다. 운적스님이 승방으로 맞이하여 인사를 나누고 보니, 그는 제법 기개도 있고 풍채도 좋았다. 곧 자리를 권하고 차를 대접한 후 밥까지 주었다. 둘은 불교 경전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으니, 그야말로 이런 격이었다.

空華落影 허공의 꽃이 그림자 떨구니
陽焰翻波 태양의 불꽃 파도처럼 출렁이네.
光發襟懷 빛이 가슴을 비추나니
影含法界 그림자엔 법계가 담겨 있네.

등화상이 고개를 들어 보니 제자 하나가 묵묵히 판자벽 아래에 앉아 있는 것이었다.

“저 분은 누구신지요?”

“제 제자입니다.”

“어찌 저리 단정히 앉아 있는 것입니까?”

“저 아이는 벌써 아홉 해째 저렇게 앉아 있습니다.”

“스님께서도 왜 그러는지 이유를 물어보시지 않았습니까?”

“물어본들 귀가 들리지 않는답니다.”

그 두어 마디 말에 온 하늘의 별들이 놀랐다. 그 제자는 가볍게 자리에서 일어나 느릿하게 발을 끌며 선방 밖으로 나갔다. 어디로 간 걸까? 그는 곧장 대웅전으로 가서 부처님과 보살, 나한들에게 참배하고 고루(鼓樓)에 올라 북을 몇 번 울리고 종루(鐘樓)에 올라 종을 몇 번 치더니, 다시 선방으로 돌아와 먼저 사부에게 인사를 올린 다음 등화상에게도 인사를 했다. 그리고는 눈을 뜨고 혀를 굴리더니 이렇게 말했다.

“도라는 것은 듣고자 해도 들을 수 있는 게 아니고, 법이라는 것은 묻고자 해도 물을 수 있는 게 아니지요.[聞道道無可聞, 問法法無可問.]”

그 말에 운적스님이 무척 기뻐하며 만면에 웃음을 지었다. 그러자 등화상이 말했다.

“정말 경사로군요. 너무 훌륭한 다라니(陀羅尼)의 목소리라 마음을 시원하게 통하게 해 주고, 귀에도 거슬림 없이 쏙쏙 들어오는군요!”

그러자 그 제자가 응대했다.

“사람이 미혹되는 것은 색즉시공을 깨닫지 못했기 때문이니, 깨달음이라는 것은 본래 거스름도 따름도 없는 것입니다.[迷人不悟色空, 達者本無逆順.]”

“불법을 깨닫는 길은 많은데 깨달음에 본래 거스름도 따름도 없다고 할 수 있겠는가?”

“팔만 사천 가지 깨달음의 문이 있지만 지극한 이치는 그저 한 치의 마음에 달려 있을 뿐입니다.[八萬四千法門, 至理不過方寸.]”

“그 한 치의 자리에 사실 번뇌의 뿌리가 있고 청정의 꽃은 씨앗이 없는 게 아닌가?”

“번뇌가 보리요, 청정의 꽃은 더러운 진흙에서 피는 법입니다.[煩惱正是菩提, 淨華生於泥糞.]”

“그런 말은 나 같은 행각승한테나 놀라운 것일 뿐이지.”

“자신이 있을 곳 알고 거기 살면서 타지를 떠돌지 말아야 합니다.[識取自家城邑, 莫浪遊他州郡.]”

“이 못난 몸은 원래 이런 소견 좁은 얘기만 할 줄 알았는데, 그대의 말은 모두 나로서는 놀랍기 그지없네.”

“부처는 하나의 목소리로 설법하기 때문에 일체의 법은 이 하나의 목소리와 같습니다. 삼세(三世)의 모든 부처들과 육대조사(六代祖師)는 물론이요, 천하의 승려는 모두 이 하나의 목소리인데 어찌 부화뇌동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하나의 목소리라고는 하지만 어제와 오늘, 앞과 뒤가 다르지 않은가?”

“어제의 해와 오늘의 해는 두 곳을 모두 비출 수 없고, 어제의 바람과 오늘의 바람이 두 곳에서 함께 불 수는 없습니다.[昔日日, 今日日, 照無兩鮮. 昔日風, 今日風, 鼓無二動.]”

“그 말엔 협곡을 무너뜨리고 산을 넘어지게 할 만한 뜻이 담겨 있구먼. 어디, 내 한 번 시험해 봄세.”

“무엇으로 시험하시겠습니까?”

“도라는 게 무엇인가”

“끊어지지도 항상 있지도 않고, 오도 가도 않으며, 생겨나지도 소멸하지도 않고 자연스러운 천성으로 옮겨감이 없이 항상 그 자리에 있는 것[不斷不常, 不來不去, 不生不滅, 性相自如, 常住不遷], 이것이 바로 도입니다.”

“그럼 선(禪)은 무엇인가?”

“모든 법을 환히 아는 것을 체(諦)라 하고, 아무 것도 취하지 않는 것을 선이라 합니다.”

“그럼 부처는 무엇이고 불조(佛祖)는 무엇인가?”

“악을 보지 않아도 미움이 생기고 선을 보지 않아도 잘못을 저지르지 말라고 권하고, 지혜를 버리지 않고도 어리석음에 다가가고, 미혹을 버리지 않고도 깨달음에 나아가며, 지고한 도리를 깨우쳐 지혜로운 마음과 통함으로써 범인에게나 성인에게나 얽매이지 않고 초연히 홀로 나아가는 것을 부처이자 불조라고 합니다.”

“부처님의 법신(法身)은 어디 있는가?”

“있는 곳도 없으며, 없는 곳도 없습니다.”

“여기 대웅전에 있는 것은 법인이 아닌가?”

“황금빛의 여섯 길[仗] 몸일 뿐, 법신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부처는 몸이 없단 말인가?”

“있습니다.”

“불신이란 무엇인가?”

“육도(六度)가 부처의 몸입니다.”

“부처에게 머리가 없겠는가?”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인가?”

“정념(正念)이 부처의 머리입니다.”

“부처에게 눈이 없겠는가?”

“있습니다.”

“무엇인가?”

“자비가 바로 부처의 눈입니다.”

“부처에게 귀가 없겠는가?”

“있습니다.”

“무엇인가?”

“묘음(妙音)이 바로 부처의 귀입니다.”

“부처에게 코가 없겠는가?”

“있습니다.”

“무엇인가?”

“향림(香林)이 바로 부처의 코입니다.”

“부처에게 입이 없겠는가?”

“있습니다.”

“무엇인가?”

“감로(甘露)가 바로 부처의 입입니다.”

“부처에게 혀가 없겠는가?”

“있습니다.”

“무엇인가?”

“사변(四辨)이 바로 부처의 혀입니다.”

“부처에게 손이 없겠는가?”

“있습니다.”

“무엇인가?”

“사섭(四攝)이 바로 부처의 손입니다.”

“부처에게 손가락이 없겠는가?”

“있습니다.”

“무엇인가?”

“평등이 바로 부처의 손가락입니다.”

“부처에게 발이 없겠는가?”

“있습니다.”

“무엇인가?”

“계정(戒定)이 바로 부처의 발입니다.”

“부처에게 마음이 없겠는가?”

“있습니다.”

“무엇인가?”

“종지(種智)가 바로 부처의 마음입니다.”

“그건 틀린 말일세!”

“왜 틀리다는 것입니까?”

“자네는 있다고도 해 놓고 또 없다고도 하니, 그야말로 두 척의 배를 한 발로 디딘 꼴이 아니고 무엇이냔 말일세.”

“오묘한 진리란 있으면서도 있는 게 아니고, 없으면서도 없는 게 아닙니다. 있음과 없음에서 벗어나 있어야 법신이라고 할 수 있지요.”

“자네가 이제까지 한 말을 받아쳤으니, 달리 시험해 봐야 되겠네.”

“말씀하시지요.”

“그럼 어디 물어보세. 불경을 읽는 데에 무슨 중요한 곳이 있는가?”

“옷에도 옷깃이 있고 그물에도 줄이 있는데, 불경에 중요한 곳이 없겠습니까?”

“그런 게 얼마나 있는가?”

“딱 하나밖에 없습니다.”

“그게 무엇인가?”

“바로 ‘공(空)’이라는 글자입니다.”

등화상이 어이없다는 듯이 크게 웃으며 말했다.

“이번엔 조금 틀렸네.”

“왜 틀렸다는 것입니까?”

“기껏 ‘공’이라는 글자 하나에 얼마나 큰 신통력이 담겨 있겠는가? 그게 어찌 불경에서 제일 중요한 곳이 되겠어?”

“스님께선 이 ‘공’이라는 걸 과소평가하시는군요.”

“그럴 리가 있는가?”

“그럼 저도 하나 여쭤보겠습니다.”

“물어보게.”

“부처님께서도 걱정하시거나 기뻐하시는 일이 있을까요?”

“근심도 없고 기쁨도 없지.”

“부처님께도 괴로워하시거나 즐거워하실 일이 있을까요?”

“괴로움도 즐거움도 없지.”

“부처님께서 얻거나 잃으실 일이 있을까요?”

“얻음도 잃음도 없지.”

“그럼 아시겠군요.”

“그게 무슨 말인가?”

“마음이 공과 상응하면 비난이나 칭찬에 어찌 근심하거나 기뻐하겠습니까? 몸이 공과 상응하면 힘들거나 편안하더라도 어찌 괴로워하거나 즐거워하겠습니까? 근본이 공과 상응하면 베풀거나 빼앗더라도 어찌 얻고 잃음이 있겠습니까? 근심과 기쁨을 잊어버리고, 괴로움과 즐거움을 똑같이 여기고, 얻고 잃음을 가벼이 여기게 되겠지요. 이렇게 이 ‘공’이라는 것이 부처님의 모습을 모두 표현하고 있으니 어찌 불경에서 제일 중요한 곳이 아니겠습니까?”

“또 자네 입심에 졌군. 그럼 하나 더 물어보세. 불경에서 ‘현상은 바로 공허한 것이요 공허한 것이 바로 현상[色卽是空, 空卽是色]’이라고 했는데, 어떻게 그럴 수 있는가?”

“물속의 달과 거울 속의 꽃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게 현상인가요 공허한 것인가요?”

“그럼 불경에서 ‘무아의 상과 남이 없는 상, 중생이 없는 상[無我相, 無人相, 無衆生相]’에 대해 언급했는데, 왜 ‘무아’라는 얘기를 하는 것인가?”

“불경에 ‘불난 집이라는 것은 오직 내 몸[火宅者, 只我身]’이라는 구절도 있지 않습니까?”

“그렇긴 하지.”

“내가 불난 집이라면 응당 남을 태우겠지요. 그런데 남을 태울 수 없으니 ‘내가 없음[無我]’이 분명하지 않습니까?”

“그럼 ‘남이 없다[無人]’는 건 무엇인가?”

“불경에 ‘사람은 색계에 산다.[人居色界.]’라는 구절이 있지 않습니까?”

“그렇지.”

“만약 사람이 색계를 가지고 있다면 이 땅은 어디에 의지해 서겠습니까? 그러니 색계가 없다면 남도 없음이 분명하지 않습니까?”

“그럼 ‘중생이 없다’는 건 무엇인가?”

“경전에 ‘겁화가 활활 타오르니 온 세상이 모두 무너진다.[劫火洞然, 大千俱壞.]’라는 구절이 있지 않습니까?”

“그렇지.”

“중생이 있다면 겁화에도 무너지지 않을 수 있을 텐데, 겁화가 무너뜨릴 수 있다면 중생이 없다는 것이 분명하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다른 걸로 시험해 보겠네.”

“정말 아둔한 분이시군요!”

“깨달은 이가 시험을 두려워한단 말인가?”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지렁이 한 마리를 둘로 자르면 양쪽 머리가 모두 움직이는데, 불성(佛性)은 어느 쪽 머리에 들어 있는가?”

“맑은 강에 달이 뜨면 세 척의 배에서 함께 감상할 수 있지요. 그런데 잠시 후 한 척은 그대로 있고 한 척은 남쪽으로, 다른 한 척은 북쪽으로 떠나게 되었을 때 달이 어느 배 위에 있습니까?”

“보통의 물은 바다에서는 짜고 강에서는 짜지 않은데, 불성은 짠 곳에 있는가, 아니면 짜지 않은 곳에 있는가?”

“동쪽에는 해가 뜨고 서쪽에는 비가 내린다면, 하늘의 도리[天道]는 비가 내리는 곳에 있습니까, 아니면 맑게 갠 곳에 있습니까?”

“정말 대답이 청산유수로구먼. 그렇다면 세상사를 가지고 시험해 보겠네.”

“그게 무엇인지요?”

“저 비래봉(飛來峰) 말일세. 저게 이리로 날아왔다면 어째서 날아가지 않는 것인가?”

“움직이는 것은 고요히 있는 것만 못하지요.”

“관음보살이 왜 또 ‘나무관세음보살!’ 하고 염불을 외는 건가?”

“남을 구제하는 것보다 자신을 구제하는 것이 낫기 때문입니다.”

“노스님은 왜 사흘에 한 푼만 쓰는가?”

“남는 것보다는 모자라는 것이 낫습니다.”

“자네는 왜 오늘 대전에 갔다가 종과 북을 울렸는가?”

“하하, 하루라도 중노릇을 하면 그만큼 종을 쳐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더니 등화상이 입을 열기도 전에 그 제자가 말했다.

“스님께서 저를 시험하신 것은 아마 속이 더부룩하셨기 때문인 것 같은데, 이번엔 제가 스님께 문제를 내보겠습니다.”

“마음대로 하게.”

“염부세계에서 만물은 고르지 않은데, 이 만물에도 과연 일정한 것이 있을까요?”

“있지.”

“높은 벼랑은 골짜기를 이루고, 깊은 골짜기는 언덕을 이루며, 태어나면 죽게 되고, 죽음이 있으면 태어나는 것이 있는데 어찌 일정할 수 있습니까?”

“정말 만물은 일정하지 않구먼.”

“만물이 질정하지 않다면 왜 하늘을 땅이라 하지 않고 땅을 하늘이라 하지 않으며, 별을 달이라하지 않고 달을 별이라 하지 않을까요?”

이 단 두 마디로 등화상은 말문이 막혀버렸다.

두 사람이 웃음을 짓고 있는데 갑자기 공중에서 휘리릭 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자 운적스님이 말했다.

“두 사람이 하도 끝없이 얘기를 나누니까 하늘이 노하셨나 보구먼.”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노한 목소리가 들렸다.

“협곡을 무너뜨리고 산을 넘어지게 할 만한 뜻이 풍부한 말이건만, 승려들이 있는 절에서는 전혀 쓸모가 없구나!”

그 말에 깜짝 놀란 운적스님이 황급히 허공을 향해 절을 올렸다.

“소승의 어린 제자가 말을 함부로 하였사오니, 부디 용서해 주시옵소서!”

그걸 보고 등화상이 혼자 생각했다.

‘하긴 말이 좀 많긴 했지.’

그가 곧 작별인사를 하자 운적스님이 말했다.

“제자야, 등스님께 감사인사를 올리도록 해라.”

등화상이 사양했다.

“그럴 필요 없습니다.”

“아닙니다. 절을 받으셔야지요.”

하지만 등화상은 그대로 산문을 향해 내달렸다. 운적스님이 다급히 붙들었다.

“제자의 절을 받지 않으시겠다면, 제 말씀 한 마디만 들어주십시오.”

“무슨 가르침이 있으신지요?”

“제 제자가 이 절에 들어온 지 아홉 해가 되었습니다만, 그 동안 눈도 뜨지 않고 귀로 듣지도 못하고, 말도 못하고 손발도 움직이지 못해서 저는 저 아이가 윤회의 나락에 떨어져 영원히 올라오지 못할까 염려스러웠습니다. 그런데 마침 스님께 가르침을 받아 눈과 귀가 환히 트이고 말도 하고 몸도 움직일 수 있게 되었으니 이야말로, 이야말로……”

운적스님은 감격에 겨워 말을 잇지 못했다. 그러다가 문득 고개를 들어 보니 악사 하나가 비파를 타며 도정(道情)을 흥얼거리면서 회랑의 처마 밑을 지나고 있었다. 그걸 보자 그는 퍼뜩 뒷말이 떠올랐다.

“이야말로 ‘금슬공후(琴瑟箜篌)’라고 하겠습니다. 오묘한 소리가 있다 한들 오묘한 손가락이 없으면 소리를 낼 수 없는 법이니까요.”

등화상은 그 말에 깊은 뜻이 들어 있다고 생각하고, 작별인사를 하면서 소매에서 노란 종이봉투를 하나 꺼내서 운적스님에게 건네주었다. 그런데 운적스님이 그 봉투를 받아 드는 순간, 눈 깜짝할 사이에 그 승려의 모습이 사라져 버렸다.

운적스님이 깜짝 놀라며 생각했다.

‘틀림없이 하늘에 계신 어느 선사(禪師)께서 내 제자에게 가르침을 주시려고 내려오셨던 모양이구먼. 내 제자도 절대 보통 인물이 아니야.’

그는 급히 돌아가서 “얘야!”하고 부르자 제자가 얼른 “예, 예!”하고 대답했다.

“조금 전의 그 스님이 오실 때는 형체가 보이더니 가실 때는 종적도 없으니, 어디로 가셨는지 모르겠구나.”

“스스로 등화상이라고 하셨으니, 각종 경전에서 ‘등화상’이라는 글자를 찾아보면 알 수 있지 않을까요?”

“그 말도 일리가 있구나.”

잠시 후 《관음경(觀音經)》과 《화엄경(華嚴經)》, 《금강경(金剛經)》, 《공작경(孔雀經)》, 《능인경(能仁經)》, 《반야경(般若經)》, 《열반경(涅盤經)》, 《원각경(圓覺經)》, 《법화경(法華經)》, 《능엄경(楞嚴經)》, 《유가경(遺伽經)》, 《유교경(遺敎經)》을 일일이 꺼내 왔다. 하지만 모두들 물속의 달의 잡고 바다 속에서 바늘을 찾는 격이니, 대충 넘기면서 찾아내기 어려울 거라고 했다. 그런데 막 펼쳐 본 불경을 언뜻 살펴보니 이런 게송이 눈에 들어왔다.

修道道無可修 도를 닦지만 닦을 도가 없고
問法法無可問 법을 묻지만 물을 법이 없네.
迷人不悟色空 어리석은 이들은 색공의 이치를 모르나니
達者本無逆順 깨달은 이는 본래 거스르고 따름이 없다네.
八萬四千法門 팔만 사천 가지 깨달음의 문이 있지만
至理不過方寸 지극한 이치는 한 치 마음에 달려 있을 뿐일세.
煩惱正是菩提 번뇌가 바로 보살일지니
淨華生於泥糞 청정한 꽃은 더러운 진흙 속에서 피어난다네.
識取自家城邑 자신이 있을 곳을 알고 거기 살아야지
莫漫遊他州郡 타향을 떠돌아서는 안 된다네.

그 게송의 뒤쪽에는 ‘등등화상(騰騰和尙)의 게(偈)’라고 제목이 적혀 있었다.

운적스님이 그걸 보고 무척 기뻐하며 “얘야!”하고 부르자 제자가 얼른 “예, 예!”하고 대답했다.

“조금 전에 오셨다 가신 스님은 정말 옛날의 선사이셨구나.”

“성이 ‘등(滕)’씨 입니까?”

“등은 등이지만 그 ‘등’자는 아니니라.”

“그럼 무슨 ‘등’자인가요?”

“‘구름이 치솟다[雲騰]’라고 할 때의 ‘등(騰)’이지. 그 분은 ‘등등화상’이라고 불렸던 분이란다.”

“그 분은 무슨 말씀을 남기셨는지요?”

“조금 전에 네가 칠언고시의 구절로 ‘도를 묻지만 물을 도가 없다.[問道道無可問.]’고 했는데, 그게 바로 그 분이 남긴 게송에 들어 있는 것이란다.”

“저는 몰랐습니다.”

“그럼 너는 왜 그렇게 얘기했느냐?”

“그쪽에서 물으시기에 그냥 입에서 나오는 대로 대답했을 뿐입니다.”

“그때 너는 말끝마다 경전의 구절이 아니냐고 하지 않았더냐?”

“사부님과 노스님들께서도 말씀하실 때마다 부처님 운운하시지 않습니까?”

“그 얘긴 그만하자꾸나. 다만 한 가지, 그 등등화상은 선사이실 뿐만 아니라 신통력도 대단하셨던 분이니, 조금 전에 주신 노란 종이봉투 안에 분명 어떤 도리가 담겨 있을 게다.”

“열어보시지 그러셔요?”

“그래, 맞는 말이야.”

그러면서 운적스님은 봉투를 열었는데, 그 안에는 두 가지 보물이 들어 있었다. 그게 무엇이냐 하면 영양(羚羊)의 뿔 하나와 빈철(鑌鐵)로 만든 칼 한 자루였다.

“이것들은 무슨 깊은 뜻이 담긴 물건들일까?”

“그것도 불경 안에 들어 있겠지요.”

운적스님은 한참 동안 생각하더니 갑자기 깨달은 듯 소리쳤다.

“얘야, 무슨 뜻인지 알겠구나!”

“무슨 뜻인데요?”

“이건 《금강경》에 들어 있는 뜻을 보여주려는 것이야.”

“좀 자세히 설명해 주셔요.”

“금강세계의 보물이 단단하기는 하지만 영양의 뿔은 그걸 부술 수 있지. 그런데 영양의 뿔이 단단하기는 하지만 빈철로는 그걸 부술 수 있거든.”

“그건 좀 어설픈 해석이 아닌가요?”

“그런 뜻만 있는 게 아니다.”

“또 어떤 듯이 있습니까?”

“금강은 불성(佛性)을, 영양의 뿔은 번뇌를, 빈철은 반야의 지혜를 비유한다. 그러니까 이 물건들은 불성이 단단하기는 하지만 번뇌로 인해 어지러워질 수 있고, 번뇌가 단단하다지만 반야의 지혜로 부술 수 있다는 것을 얘기하고 있는 것이지.”

“그 스님이 이것들을 저희에게 주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아마 나에게 번뇌를 경계하라고 일깨워주신 게 아닐까?”

총명한 그 제자는 진즉 등등화상의 뜻을 간파했다.

“그게 아닙니다.”

“아니, 왜 그게 아니라는 게냐?”

“사부님께서는 마음을 맑게 하여 불성을 보시고 청정하며 자비로우신데, 경계해야 할 번뇌가 어디 있겠습니까?”

“나한테 가르침을 주시려는 게 아니라면 누구를 가르치시려 하셨다는 게냐?”

“아무래도 저를 일깨워주시려 하신 것 같습니다.”

“왜 그렇다는 게냐?”

“저는 사부님의 제자가 되어 불문에 들어왔지만 아직 삭발을 하지 않았고, 지극한 가르침을 받았지만 아직 마음을 맑게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 영양의 뿔은 생김새로 보면 저의 총각머리와 닮았고, 비유로 따지자면 저의 번뇌를 의미합니다. 그런데 빈철이 있으니 분명히 저에게 삭발을 해서 번뇌를 없애라는 뜻인 것 같습니다.”

“아주 그럴 듯한 말이구나. 그런데 네가 이왕 불문에 들어왔으니 언제든 삭발을 할 수밖에 없지 않겠느냐? 그래도 좋은 날 좋은 때를 골라 삭발식을 거행해서 네 번뇌의 뿌리를 뽑아버리는 게 좋겠구나.”

그러면서 운적스님은 심부름하는 어린 승려를 불렀다.

“얘야, 달력 좀 가져와라.”

어린 승려 하나가 달력을 가져와 바치자, 운적스님이 받아서 불상 앞의 탁자에 펼쳐놓고 살펴보았다.

“오늘이 4월 6일이니 내일은 7일, 모레는 8일이구나. 이 날은 부처님 탄신일이니 대단히 길한 날일뿐만 아니라, 달력에도 이렇게 쓰여 있구나.

혼인이나 친척 및 벗들의 모임, 상소문을 올리거나 집안에 사람을 들이는 일, 의관(衣冠)을 준비하거나 목욕하는 일, 기둥을 세우거나 들보는 얹는 일, 삭발하는 일, 부동산 계약이나 교역(交易), 이사를 하는 데에 아주 길한 날이다. 다만 진시(辰時, 오전 7~9시)를 이용해야 한다.

얘야, 그러니까 팔월 초파일을 택해 네 삭발식을 거행하자꾸나.”

“말씀대로 따르겠습니다.”

하루가 지나고 또 하루가 시작되어 어느새 초파일이 되었다. 운적스님은 아침 일찍 일어나 물을 끓이고 칼을 갈아두라고 분부하고, 몸소 향을 사르며 보살님께 축원을 올린 다음, 제자의 머리를 모두 깎아 순식간에 반질반질 까까머리의 아미타불처럼 만들었다. 여기까지가 바로 연등고불이 항주 땅에서 인간의 몸으로 태어나 정자사의 운적스님에게 길러지다가 삭발하여 번뇌를 없애게 된 사연이다. 이를 증명하는 시가 있다.

自入禪林歲月長 불문에 들어오고 긴 세월 흘러
今朝削髮禮穹蒼 오늘 아침 삭발하고 하늘에 예를 올렸네.
一眞湛湛三乘透 심후한 하나의 진리로 불법을 꿰뚫어보니
五蘊空空萬慮忘 오온이 비고 비어 모든 근심 잊었다네.
鉢底降龍時溢水 바리 아래 독룡을 굴복시키니 때맞춰 물이 넘치고
圈中伏虎夜焚香 우리 속에 호랑이 굴복시키고 밤중에 향을 사르네.
渾然失却人間事 순박한 혼돈의 상태가 되어 인간사를 잊으니
一點禪心自秘藏 한 점 선심(禪心)이 저절로 마음 깊이 담기게 되었네.

이 제자는 삭발을 하고 부처님과 보살들께 참배하고, 나한에 귀의한 후, 다시 사부에게 절을 올렸다. 운적스님이 말했다.

“이제부터는 더 이상 지난 아홉 해 동안 그랬던 것처럼 살아서는 아니 되느니라.”

“지난 아홉 해 동안은 어땠는데요?”

“그 동안 불경도 전혀 읽지 않고 설법도 전혀 듣지 않은 채 그저 앉아 있기만 했지 않느냐?”

“불경에 아주 적당한 구절이 하나 있어요.”

“그게 무엇이냐?”

“여덟 살에 경전을 암송할 수 있더라도 백 살이 되도록 실행에 옮기지 못하니, 급하게 추구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그럼 네가 실행하여 내게 보여주도록 해라.”

그다지 긴요한 말은 아니었지만 이 한 마디가 그 제자의 깨달음의 바퀴를 움직이게 했다. 보라. 그는 오늘 불경을 해설하고, 다음날은 경전의 내용을 강의했다. 이는 그가 말주변도 좋고 강설이 훌륭했기 때문이기도 하고, 항주성 안에 정진결재하고 경전에 대한 강론을 들으려 하는 이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이 바람에 매일 사람들이 개미 떼처럼, 꿰어놓은 생선처럼 몰려들어 항주성을 불경 강당으로, 항주성의 선량한 불자(佛者)들을 온 천하의 중생으로 만들어 놓았다.

한편 비래봉 아래에는 영은사라고 하는 절이 있었는데, 바로 풍마화상(風魔和尙)이 진회(秦檜)를 꾸짖었던 곳이다. 영은사에는 ‘벽봉회(碧峰會)’라는 불경 강설 모임이 있었다. 비래봉이 서역 승려의 눈동자처럼 푸르고 맑았기 때문에 그런 이름을 붙인 것이었다. 원래 대지선사(大志禪師)가 이 모임에서 《화엄경(法華經)》을 강설했는데, 목소리가 너무나 맑고 느긋하여 듣는 이들이 감동해서 피곤함을 잊게 만들었다. 법건선사(法建禪師)가 이 모임에서 《화엄경》을 강설하면 목소리가 밖으로 새나가지 않았는데, 어떤 이가 벽에 귀를 대고 들어보니 졸졸 땅속의 물이 밖으로 쏟아지는 듯한 소리만 들렸다. 이런 모임에 이렇듯 위대한 두 선사가 다녀간 적이 있다면 어느 절이든 성황이 이루지 않겠는가! 하지만 오랜 세월이 흐른 뒤 당시의 저명한 이들도 모두 세상을 떠나고 나자 이 모임도 쇠락하고 말았다. 이렇게 사오십 년이 흘러 지금에 이르렀으니 쇠퇴가 극에 이르면 다시 번영으로 돌아설 때가 되지 않았는가? 게다가 이렇듯 말재주 좋고 강설이 훌륭한 어린 스님까지 나타나지 않았는가!

당시 항주성 동쪽에서 가장 지체가 높은 인물로는 지재(遲再)를 꼽았고, 서쪽에서 가장 지체가 높은 인물로는 파소(巴所)를 꼽았다. 그 가운데 지재가 황급히 성 서쪽으로 가면서 중얼거렸다.

“그 스님을 ‘벽봉회’에 초청해서 강설해 달라고 해야겠구나.”

그리고 파소도 황급히 성 동쪽으로 가면서 중얼거렸다.

“그 스님을 ‘벽봉회’에 초청해서 강설해 달라고 해야겠구나.”

이들은 각자 이 어린 스님을 모셔서 ‘벽봉회’에서 불법의 진리를 설명하고 선한 세상에 널리 부처의 말씀을 전하게 했다.

날이 갈수록 자꾸 이런 일이 쌓여가자 모두들 이렇게 쑤군거렸다.

“이렇게 훌륭한 스님에게 법명(法名)이 없어서야 되겠는가? 이렇게 훌륭한 보살님께 존호(尊號)가 없어서야 되겠는가?”

그러자 재지가 말했다.

“불제자인 우리가 어찌 감히 그 분의 법명을 부를 수 있겠소? 그러니 존호를 하나 지어 바치도록 합시다.”

파소가 거들었다.

“존호를 하찮은 걸로 지으면 안 되겠지요.”

이렇게 점점 많은 이들이 이구동성으로 얘기했다.

“이 모임의 스승이신 그 분에 존호를 지어드려야 마땅하오!”

그러자 개중에 관상을 조금 볼 줄 아는 이가 말했다.

“이 스님은 서역 승려처럼 눈동자가 푸르니까 ‘벽안선사(碧眼禪師)라고 부르는 게 어떻소?”

그러자 또 다른 이가 코를 벌름거리며 말했다.

“이 스님은 코가 산봉우리처럼 우뚝하니까 ‘비봉선사(鼻峰禪師)’라고 부르는 게 좋겠소.”

그러자 개중에 산에 사는 이가 말했다.

“이 스님은 예전에 정자사에서 출가하셨는데, 그 절은 뇌봉 아래에 있소. 지금은 영은사에서 강설하고 계시는 데, 영은사는 비래봉 아래에 있소. 그러니까 그 분의 호는 ‘뇌봉선사(雷峰禪師)’나 ‘비봉선사(飛峰禪師)’라고 해야 마땅하오.”

이렇게 모두들 이러쿵저러쿵 말들이 많았지만 도무지 딱 들어맞는 게 없었다. 그래도 지내가 생각이 조금 깊었고, 파소도 앞뒤를 잴 줄 아는 인물이었다. 그럼 지재는 뭐라고 했는가?

“푸른 눈[碧眼]이나 높은 코[鼻峰]는 모두 신체의 특징을 가지고 지은 존호인데, ‘금빛 나는 여섯 길 몸은 법신이 아니[丈六金姿, 不是法身]’라고 했으니 이건 안 되겠소, 뇌봉이니 비봉이니 하는 것은 멀리 사물에서 특징을 취해 지은 존호인데, 그것들이 비록 세상에 있는 것이긴 하지만 별다른 맛이 없으니 이것도 안 되겠소.”

그러자 파소가 물었다.

“신체의 특징도 아니고 사물의 특징도 안 된다면 어떻게 존호를 지을 수 있겠소?”

“바로 이 ‘모임[會]’을 바탕으로 짓는 것이오.”

“어떻게 한다는 말씀이오?”

“우리의 이 모임의 명칭이 무엇이오?”

“그야 진즉부터 ‘벽봉회’라고 부르지 않았소?”

“그렇지요. 이 모임은 ‘벽봉회’이고, 이 스님이 회주(會主)시며, 우리는 회원이 아니오? 그러니 우리 회주님께 ‘벽봉장로(碧峰長老)’라는 존호를 지어드리는 게 어떻소?”

“그거 좋습니다!”

이 얘기가 여러 사람들의 입을 거쳐 널리 퍼지자 모두들 입을 모아 찬성했다.

“‘벽봉장로’가 딱 어울리는 존호로군요!”

이 얘기가 지금까지 전해져서 그 스님을 벽봉장로라고 부르고 있다. 또 그 분이 출가하기 전의 성이 김씨인지라 그것까지 붙여서 ‘김벽봉장로’라고도 불렀다. 이렇게 벽봉장로로 불리던 시절에 그의 나이는 대략 스물은 넘었고 서른은 되지 않아서 입가의 수염이 막 자라기 시작하던 때였다. 정자사의 운적스님도 이미 오래 전에 입적한 뒤였고, 오직 그 스님 혼자 까까머리에 수염을 기르고 있었다. 그런데 이 수염이 예사로운 것이 아니었으니, 이를 증명하는 시가 있다.

堂堂六尺屬仙郞 당당한 육척 몸은 젊은 신선 같은데
更喜豊髭品字傍 풍성한 코밑수염까지 품자로 더해졌네.
風急柳絲飛渡口 거센 바람에 버들가지 나루터에 날리고
雨餘苔迹上宮墻 풍족한 비에 이끼가 궁궐 담장을 올라가네.
龍歸古洞螯先醉 용이 돌아가는 오래된 동굴엔 차오가 먼저 취해 있고
鳳出丹山尾帶狂 단산(丹山)에서 나온 봉황 꼬리 거칠게 흔들리네.
惟有美髯公第一 멋진 수염 가진 이들 가운데 최고요
滿腔忠義越加長 가슴 가득한 충의(忠義)는 더욱 훌륭하다네.

벽봉장로의 입 주위가 수염으로 덮이자 모두들 쑤군거렸다.

“스님께선 왜 수염을 깎지 않으실까?”

비사문(毗沙門)도 궁금해 했다.

“스님께선 왜 수염을 깎지 않으실까?”

삼막삼불타(三藐三佛陀)도 궁금해 했다.

“스님께선 왜 수염을 깎지 않으실까?”

불파제(弗把提)도 의아해 했다.

“스님께선 왜 수염을 깎지 않으실까?”

니리타(泥犁陀)도 궁금해 했다.

“스님께선 왜 수염을 깎지 않으실까?”

우바새(優婆塞)도 궁금해 했다.

“스님께선 왜 수염을 깎지 않으실까?”

우바이(優婆夷)도 궁금해 했다.

“스님께선 왜 수염을 깎지 않으실까?”

다라니(陀羅尼)도 궁금해 했다.

“스님께선 왜 수염을 깎지 않으실까?”

여러 단월(檀越)들도 궁금해 했다.

“스님께선 왜 수염을 깎지 않으실까?”

승강(僧綱)과 승기(僧紀), 승록(僧錄)도 의아해 했다.

“스님께선 왜 수염을 깎지 않으실까?”

또한 차두(茶頭)와 반두(飯頭), 채두(菜頭), 화두(火頭), 정두(淨頭)들도 모두 궁금해 했다.

“스님께선 왜 수염을 깎지 않으실까?”

이렇게 모두들 궁금해 하며 말들이 많았지만 벽봉장로는 강 건너 불구경 하듯, 쇠귀에 경을 읽는 듯 모른 체 했다.

벽봉장로가 머리는 깎고 수염은 남겨둔 것이 어떤 불경을 근거로 한 것인지, 아니면 어떤 자기주장이 있어서인지, 그리고 끝까지 수염은 남겨두게 되는지 어쩌는지에 대해서는 다음 회를 보시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