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도의 소설【부록 1】낡은 악습의 섬(因循島)

왕도王韜 지음, 민정기 옮김

곡옥曲沃의 항모項某라는 이는 본디 수렵을 하는 집안 출신이었는데 그의 대에 와서 공부하는 것으로 업을 바꾸었다. 글을 잘 한다는 명성이 자자했으며 또한 불법佛法에 따라 방생하는 것을 좋아했다. 한번은 강가를 지날 때 농부가 검은색 원숭이 한 마리를 끌고 가는 것을 보았는데, 꼬리가 잘렸고 발에는 상처를 입었으며 털에 피가 낭자했다. 항 선비를 보더니 구슬프게 울부짖으며 고개를 치켜들었는데 그 모양이 불쌍히 여겨달라고 애걸하는 듯했다. 항 선비는 마음이 동하여 그 원숭이를 사서 풀어주었다. 원숭이는 떠나가면서 거듭 고개를 돌려 바라보았는데 꼭 고맙다고 인사하는 듯 했다. 그러더니 금새 종적이 묘연해졌다.

그 후로 항 선비는 막빈幕賓[고위직 지방관이 자문을 받기 위해 데리고 있는 보좌관. 막료幕僚라고도 함]으로 복건성福建省에서 일하다가 고향으로 돌아가기 위해 배를 타게 되었다. 새벽에 떠나 정오가 되었을 무렵, 갑작스런 바람이 크게 일자 선장은 당황했다. 곧이어 흰빛 파도가 공중으로 치솟으며 배를 수십 장 높이로 솟구치게 하더니 이내 물속으로 빨아들였다. 배에 타고 있던 사람들은 모두 파도에 쓸려갔는데 항 선비만은 목판 하나를 부여잡고 떠가는 대로 몸을 맡겼다. 바람이 더욱 거세어지며 순식간에 몇 천만리를 갔는지 알 수 없어 죽은 목숨이라고만 생각했다. 해안이 가까워져 왔는데 멍하여 어딘지 알 수 없었다. 어떻든 바람과 파도는 가라앉아 있었고 배는 바닷가의 암석에 부딪혀 있었다.

항 선비는 몇 되나 되는 물을 토해내고서 한참 후에야 정신이 들었다. 모래밭이 끝없이 펼쳐져 있었는데 초목은 보이질 않았다. 때는 초가을이라 날씨는 아직 따뜻했다. 항 선비는 옷을 벗어 모래에 널어 말려 입고는 발을 옮겼다. 지척지척 수 십리를 걷자니 날은 벌써 저물어 컴컴해졌고 바다 위로 달이 떠올랐다. 넘어졌다 일어서기를 거듭하며 가는데 높이 떠오른 달은 환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무심히 바라보다가는 달빛을 밟고 길을 재촉했다. 한밤이 지나도록 인가는 찾을 수 없었고 연이은 언덕에 논과 밭이 군데군데 있었다. 수풀이 점차 무성해지면서 호랑이 울부짖는 소리며 원숭이 떠드는 소리가 들려와 털이 곧추섰고, 배도 몹시 고파왔다. 다행이 품에 삶은 달걀 몇 알이 있어서 심한 허기는 달랠 수 있었다. 다시 길을 가려했지만 다리에 힘이 빠져 숲 속에서 쉬려는데, 사방에 도깨비불이 번쩍번쩍하는 것이 마치 약탈할 틈을 노리는 것 같아 가슴이 울렁울렁하여 밤새 한 잠도 이루질 못했다.

날이 밝아오자 다시 길을 나섰는데, 오후가 되어서야 마을을 발견했다. 그곳의 주민은 머리를 풀어헤치고 어깨를 다 드러낸 복장이어서 행색이 중국과는 달랐고, 얼굴이 마르고 피부가 누렇게 떠있었다. 몹시도 초췌한 모습이 오래 병을 앓은 자들 같았다. 앞으로 다가가 말을 거니 자기네 말로 조잘대는데 알아듣기 힘들었다. 한 늙은이가 앞으로 나와 묻기에 항 선비는 사실대로 고했다. 늙은이가 말했다:

“그대는 중국 사람이오? 이곳은 인순도因循島의 간향簡鄕이란 곳입니다. 중국에서는 구만 리나 떨어져 있지요. 지난해에 주모朱某라는 상인도 풍랑을 만나 이곳에 표류했는데, 이곳에서 일년 정도 머물다가 도주島主가 알고서는 수레에 태워 데려갔답니다. 제가 중국의 방언을 두루 아는데, 머물 곳이 마땅치 않다면 저희 집에 좀 머무시렵니까?”

항 선비는 기뻐하며 그를 따라갔다. 마을 사람들이 모두 와서는 소곤소곤 말을 주고받는 것이 희한한 물건을 구경하듯 했다. 노인은 그를 위해 술과 안주를 마련해 주었는데 풍성하지는 못했지만 정성은 은근했다.

얼마 후, 문 밖에서 쇠 부딪히는 소리가 들려왔는데, 사람들은 모두 어찌 할 줄 몰라 했고 노인은 곧바로 대문을 닫아걸었다. 항 선비가 이유를 묻자 그가 말했다:

“저건 현령縣令의 행차인데요, 그가 사람을 뜯어먹길 즐긴답니다. 당신은 처음 오셨으니 눈에 띠지 말아야 합니다.”

항 선비가 문틈으로 밖을 살펴보니 앞뒤에서 수레를 끄는 자들은 모두 짐승 얼굴에 몸뚱이는 사람이었고, 수레에 떡하니 승냥이 한 마리가 의관을 갖추고 앉아있는 것이었다. 몹시 놀라 노인에게 연유를 묻자 노인은 참담한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이 고장은 본디 아주 풍요로운 곳이었습니다. 그런데 삼 년 전에 어찌 된 일인지 갑자기 승냥이 괴물 수백 마리의 무리가 들이닥쳐서는 곳곳을 점령해 버렸지요. 저 위로는 성장省長으로부터 그 밑으로 군수 그리고 고을의 수령까지 다 차지해 버렸고, 그들이 등용한 막빈이나 하급관리 역시 대부분 승냥이 족속이었습니다. 처음 왔을 때에는 사람 모습을 하고서 의관도 아주 점잖게 갖추더니 몇 달 지나지 않아 본 모습을 드러내더군요. 이것들은 사람 기름 먹기를 좋아하여 이편의 마을 수십 곳에서 매일 삼십 명이 관아에 끌려간답니다. 잡아가서는 날카로운 송곳으로 발을 찌르고 기름을 빨아먹는답니다. 기름을 다 짜고는 풀어주는데, 죽을 정도까지는 되지 않아도 이 때문에 병들고 수척해지는 것이 가련해 눈뜨고 못 볼 지경이지요. 곧 죽어 땅에 묻히는 이들도 있답니다. 항 선비는 놀라 물었다:

“도주도 승냥이 족속입니까?”

노인이 대답하길:

“아닙니다. 주상은 인자하시지요. 하지만 저 놈들은 사람 모습으로 둔갑할 수 있는데다가 꾀도 많아 결국 도주께서 속고 있는 겁니다.”

항 선비는 조정의 신하들도 이러한 사실을 모르는가 하고 물었다. 노인이 말했다:

“조정에 있는 자들이란 모두 한통속인데다가 저 놈들이 매년 뇌물을 적지 않게 바치니 아무도 그 비밀을 들추려고 하질 않습니다. 게다가 관리들 사이에 있을 때면 선량한 낯빛을 하고 있으니 백성을 대할 때는 전혀 다른 모습이란 것을 어찌 알겠습니까?”

항 선비가 말했다:

“저런 무리들이 지방을 다스리니 이 세상 꼴이 어찌 되겠소? 제가 비록 재주는 없지만 당신들을 위해 도주께 아뢰리다. 저 무리들을 모조리 죽여 버려야지요.”

노인이 말했다:

“당신의 마음은 충성스럽고 의롭지만 그렇게 하실 수는 없을 겁니다. 하물며 객지 사람이 중간 단계를 건너뛰어 상소한다는 것은 불가능하지요. 만약에 살이 오른 사람을 골라 기름을 빠는 녀석이라도 맞닥뜨리게 된다면 생명에 지장이 있을 겁니다.”

항 선비는 마음이 착잡했다.

다음날 항 선비는 떠난다는 말도 없이 길을 나섰다. 길을 물으려고 하는데 몇 녀석이 갑자기 달려들어서는 포박해서 바로 관아로 데려갔다. 벌벌 떨면서 대청 양편으로 앉았거나 누운 자들을 보니 모두 서슬 퍼런 관원들이어서 저도 모르게 기가 꺾였다. 오래지않아 관리 한 명이 당상에 올라왔는데 복장이 고풍스러웠고 다행이 사람 모습인지라 놓아줄 것이라 희망했다. 그 관리는 항 선비를 살펴보더니 매우 기뻐하는 듯 했다. 그는 항 선비가 어디서 왔는지를 물었다. 항 선비가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다 이야기하자 그 관리는 좌우를 둘러보며 말했다:

“이 사람은 피부가 희고 살이 올라있으니 정혈精血과 골수骨髓가 아주 훌륭할 것이다. 윗분에게 헌납하면 좋은 점수를 딸 수 있을 거야.”

항 선비는 이 관리가 호의를 품고 있지 않음을 알고서는 재삼 풀어주길 간청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관리는 그를 우리에 가두라고 명했다. 우리에 실린 채로 끌려 나가 두 리 정도를 갔는데 사람들이 소란스럽게 말을 전해왔다:

“태수께서 오신다!”

그러더니 서둘러 길을 비키는 것이었다. 잠시 후 매우 위엄을 갖춘 행차가 고관 한 명을 둘러싸고 나타났다. 그 관리는 쥐의 눈에 원숭이 머리를 하고 있었다. 그는 좌우를 둘러보더니 갇혀있는 자를 보고 연유를 물었다. 아전이 상급 관청에 보내는 것이라고 아뢰자 태수는 자기 앞으로 데려오라고 명했다. 그가 자세히 살펴보더니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그대는 항 선비가 아니시오? 어떻게 여기에 오셨오?”

항 선비는 깜짝 놀라며 자기를 어떻게 아는가 싶어 대답을 머뭇거렸다. 태수는 일어나 수레에서 내려 군중을 물리치더니 풀어주라고 명했다. 그러더니 말을 두 필 가져오게 하여 자기와 나란히 타고 가게 했다. 항 선비는 영문을 몰라 고향과 가문을 물었다. 태수가 말하길:

“제 이름은 후관侯冠입니다. 당신의 은혜를 입은 적이 있지요. 관아에 들어가면 상세히 말씀드리리다.”

얼마 후 그의 처소에 도착하였는데, 앞문에는 “청정부淸政府”라는 글자가 쓰여 있었다. 말에서 내려 함께 들어가자니 서리 십여 명이 곁에서 마중을 했는데, 양쪽을 살펴보니 엎드려 있는 승냥이 몇 마리가 있어 마음이 떨려 감히 돌아보질 못했다. 안으로 들어가자 태수가 넙죽 절을 했다. 항 선비가 맞절을 하며 이유를 묻자 태수가 말하길:

“저는 바로 강가에서 끌려가던 늙은 원숭입니다. 당신이 구해주셨지요. 그 은혜는 잊지 않고 있습니다. 그 후로 수시생瘦柴生이란 이를 만났는데 이 섬을 집어삼킬 계획을 하고 있었습니다. 제가 사람 모습으로 둔갑하는 술수를 쓸 줄 알았기에 함께 오자고 하더군요. 그런데 생각지도 않게 도주는 신의와 덕망이 있는 분이어서 그 감화가 이 우둔한 이에까지 미치더이다. 그렇지만 수시생을 차마 배신하지는 못하겠기에 곁에서 거들고는 있지요. 그는 성장省長을 차지했고 저는 막료로 있었는데, 공을 인정받아 이 직책을 하사 받았습니다. 현재 중앙관청 이하 대부분의 관리가 저들 무리입니다. 양심을 지키며 협조하지 않는 이들은 모두 한직으로 밀어내지요. 저 역시 늘 좌불안석이고, 의관을 갖추고 있는 것이 진작에 부담스러웠습니다. 아무튼 기회를 봐서 당신을 돌려보내 드리겠습니다.”

항 선비는 비로소 그간의 일을 이해하게 되었다. 태수 역시 이곳에 오게된 연유를 물었고 항 선비가 대충 설명을 하자 함께 탄식하였다. 이야기가 끝날 무렵 식사시간이 되었다고 알려왔다. 몇 마리 승냥이가 왔는데, 모두 관복을 입고 있었으며 사람처럼 똑바로 서서 항 선비와 인사를 나누었다. 이들은 모두 태수의 지시를 따랐는데 관아의 각종 직책을 맡고 있는 이들이었다. 인사를 하고서는 자리를 잡았는데 웃고 떠드는 분위기가 아주 화기애애했다. 태수는 혼자 안으로 들어가 버렸고 항 선비만 이들과 함께 어울렸다. 술이 어느 정도 오르자 관졸 두 명이 살찐 사람 한 명을 끌고 왔는데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모습이었다. 모두들 “주방으로 보내거라!”라고 외쳤다.

항생이 놀라 연유를 묻자 모두들 웃으며 대꾸하지 않았다. 잠시후 주방장이 음식을 내왔는데 닭국물 같은 것이었다. 모두들 항생에게 감사하다는 인사를 하며 말했다:

“사람의 기름이란 것을 우리는 무척 좋아하지요. 다만 어르신께서는 좋아하지 않으십니다. 선생이 오셔서 우리 입이 호강합니다!”

항 선비가 물었다:

“아까 그 뚱뚱한 사람을 벌써 처치한 것이오?”

“그렇지요. 우리들의 식탁에는 늘 오르는데, 이곳은 어르신의 처소인지라 하루에 한 사람만 데려옵니다. 만약 큰 관아라면 사람을 훨씬 많이 먹지요.”

항 선비는 참담한 마음에 차마 입을 댈 수 없어 자리에서 도망쳐 나와 태수를 찾아갔다. 그곳에서 그는 과일을 얻어 배를 채웠다. 항 선비는 관아에 머물면서 답답하기 그지없었다. 태수가 그 의중을 헤아리고는 말했다:

“때가 아직 되질 않아 돌려 보내드릴 계책을 실행에 옮기기가 힘듭니다. 가현苛縣의 현령 여厲는 제가 예전에 데리고 있던 자인데 그 지방의 산천이 아름다우니 구경하실 만 할 겁니다. 제가 막빈으로 추천해 드릴 터이니 견문이나 넓히시지요.”

항 선비는 이 말을 듣고 기뻐했다.

다음날 추천서를 들고 찾아가니 현령은 보자마자 머물기를 청했는데, 주인과 손님이 자못 마음이 맞았다. 자세히 살펴보니 이 여라는 자도 역시 승냥이 족속이었는데, 겉으로 보기에는 온화했지만 탐욕스러움과 교활함이 사람과는 자못 달랐다. 다행이 공무가 별로 없었기 때문에 매일 하인을 데리고 나가서 놀았고, 때로는 산 속에서 며칠을 머물다 돌아오곤 했지만 여는 책망하지 않았다.

이 마을의 유지 가운데 모라는 자는 횡포가 아주 심했는데, 이웃의 전답을 수 만평씩이나 강탈하였다. 이웃이 소송을 걸었지만 그 유지는 관리에게 뇌물을 먹였고 여는 결국 그 이웃에게 불리하게 판결하여 그를 멀리 내쫓았다. 그 이웃은 상급관청에 재소했지만 그곳에서도 판결을 뒤집지 못해 어찌하지 못하고 있다가 스스로 유지의 대문 앞에서 목을 메고 자결했다. 유지는 야밤중에 관청에 들어와 여와 밀담을 나누고 일을 덮어둘 계책을 정했다. 항 선비는 이에 불만을 표하며 옳고 그름을 가리자고 말했다. 여는 웃으며 말했다:

“선생은 모르시는구려? 이 유지는 현재 수도의 요직을 겸하고 있는 분이라 그가 죄를 입으면 저는 자리를 보전하지 못합니다. 그러면 처자는 어떻게 하구요? 게다가 백성의 생명이 뭐 대수입니까? 세력으로 밀어붙이면 저들도 힘을 쓸 도리가 없을 겁니다.”

항 선비가 말했다:

“당신 말대로라면 상식과 이치는 어떻게 되는 겁니까? 나라에 왕의 법이 있거늘 헛것이란 말이요?”

“그만 하시오! 오늘날 정치에 어디 상식과 이치가 통용됩니까? 우리들은 어렵사리 세도가에 아첨하여 이만한 자리라도 얻은 것입니다. 위에 잘 보이기만 한다면 아래 것들에 대해서 덕을 베풀지 못해도 그만인 것. 옳은 것을 그르다하고 그른 것을 옳다하고 일편단심 아첨하여 이리저리 윗사람의 비위에 맞추어 그들이 좋다고 하면 비록 백성이 나를 애틋하게 여기지 않아도 조정에는 나를 끌어줄 사람이 있게 되는 것이오. 위에서 좋아하지 않으면 백성이 아무리 선정善政을 칭찬해도 조정에서는 송덕비頌德碑 하나 내려주지 않을 것입니다. 나라가 아무리 잘 다스려져도 내 한 몸 영화를 누리지 못한다면 무슨 소용이오?”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성 정부에서 급한 전갈이 왔다. 낭郎 대인이 가현의 병무를 시찰하러 올 것이니 급히 맞을 준비를 하라는 것이었다. 여는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나 비서를 불러 상의하더니 대인을 현청縣廳에서 모시기로 했다. 다음날 항 선비는 방을 비우고 서쪽 곁채에 머물게 되었다. 관청에는 채색 등이 걸렸으며 무늬를 넣은 창호지를 바르고 바닥에는 두터운 양탄자를 깔았다. 침실에는 여덟 가지 보화로 장식한 침상을 들여놓았다. 침상에는 원앙을 수놓은 베개를 놓고 구름을 수놓은 장막을 드리웠으며 보드라운 이불을 펴두었다. 호화로운 빛깔에 눈이 부셔 가까이 들여다보기 힘들 지경이었다. 곳곳을 모두 새롭게 단장하고는 망보는 자에게 길을 살피게 했다. 환영 인파가 문 앞을 메웠으며 분주히 오가는 이들은 땀범벅이 되어 있었다. 낭 대인은 저녁이 되어서야 도착했는데 축포 소리와 말발굽 소리가 요란했으며, 호위하는 장정 수백 명은 투구와 갑옷을 갖추어 입었고, 앞에 높이 치켜든 패에는 “태평성세를 꾸미고, 허세로 일을 처리하며, 청렴함을 비웃고, 배움을 게을리 하도다”라는 말이 쓰여 있었다. 항 선비가 아전에게 몰래 물어보니 대답했다:

“저것은 선정을 치하하는 문구랍니다.”

무사 수십 명이 칼을 들고 대오를 이루어 달려오니 보는 이들은 곁눈질만 할 뿐 큰 소리를 내지 못했다. 그 뒤로 십여 명이 고관을 호위하며 당도했다. 수레에 단정히 앉은 모양을 보니 뾰족 튀어나온 입에 호랑이 수염을 하고 있었는데 꼴이 몹시 흉악했다. 병사와 관리들은 모두 무릎을 꿇고 영접을 했는데 낭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수레에 탄 채로 관청으로 들어갔다. 항 선비는 그가 하는 짓을 보고 싶어 따라 들어가려 했지만 파수병이 인상을 쓰며 제지했다. 여가 나타나자 사정해서 들어갈 수 있었다. 당상을 보니 기둥만큼 굵은 붉은 색 초가 타고 있었는데 주위가 낯처럼 밝았다. 낭은 높은 의자에 앉아 있었고 곁에는 화려한 복장을 한 자들이 몇 있었다. 곧 이어 병책兵冊을 가지고 오라 하더니 책을 올리자 수하 관원에게 가져가라고 했다. 현에 속한 무관 십여 명이 들어와 머리를 조아리더니 어떤 이는 금은보화를 바치고 어떤 이는 노리개를 바치고 어떤 이는 아첨을 떠는 것이었다. 한 시간 정도가 지나자 여가 무릎을 꿇고 연회에 참석하시라고 고했다. 모두 함께 일어나 작은 방으로 들어갔는데 낭의 관원 한 명이 나오더니 기생은 없느냐고 물었다. 여는 대답하지 못하고 궁색하게 있더니 급히 곁채로 달려가 애첩과 어린 딸을 화장시켜 데리고 왔다. 낭은 웃음 띤 얼굴로 수완이 있다며 칭찬을 했다. 여는 이리저리 수작을 떨었는데 그 추태는 이루다 설명하기 힘들 정도였다. 연회가 끝나고 모두 돌아간 후 첩만이 남아 잠자리를 함께 했다. 여는 의기양양, 무척 득의한 모습이었다. 항 선비는 화가 치밀었지만 어떻게 할 도리가 없어 잠자리에 누워버렸다.

다음날 아침 다시 가서 보니 낭은 아직 일어나지 않았다. 군관 한 명이 와서 훈련을 검열해 주십사고 청하자 비서관이 질타했다:

“대인께서는 아직 일어나지 않으셨다. 일어나셔도 아편을 한 대 피우셔야 하니 그대는 어찌하겠나?”

군관은 알았다하고 물러났다. 한참 있다가 다른 비서관이 나오더니 훈련검열은 면제하고 바로 상을 내리겠다는 명을 전했다. 군관은 알겠다고 하고 돌아갔다. 낭은 오후가 되어서야 일어났고, 여는 음식을 들여보냈다. 밥을 반쯤 먹더니 떠날 차비를 하라고 명령했다. 좌우의 사람들은 허둥대며 길을 텄고 여 등은 모두 무릎을 꿇고 그를 전송했다. 첩은 인간 여인네처럼 얼굴을 붉히고 돌아왔다. 이 일을 치르면서 들어간 비용이 어마어마했는데 이로 인해 군대의 대오가 정돈되었다는 얘기는 들은 바 없었다. 항 선비는 이래서는 안 된다고 여겨 여에게 작별하고 태수 후관에게로 돌아가는데 길이 시끌시끌했다.

여는 상급 관청의 결원을 메우라는 발령을 받고서는 후관을 찾아와 그 일을 고했다. 후관이 말하길:

“이 고장의 관리들은 모두 다 저렇지요. 서생들은 밴댕이 소갈머리여서 모두 제 몸만 아낍니다.”

항 선비는 더 이상 머물고 싶지 않아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더욱 간절해 졌다. 마침 상인 주씨가 왕명을 받들어 돌아간다기에 후관은 진귀한 보물을 모아 항 선비의 짐을 꾸려주었고 배도 하나 구해 강 하류까지 전송해주었다. 그곳에는 벌써부터 큰 배 한 척이 기다리고 있었다. 주씨와 항 선비는 함께 배에 탔는데 바다 바람이 크게 일어 노는 놓아두고 돛을 폈고, 여드레 만에 경주도瓊州島를 거쳐 해안에 닿았다. 고향에 돌아와 상자에 든 물건을 돈으로 바꾸어 밭을 사고 가옥을 보수하니 큰 부자 소리를 듣게 되었다.

― 『송빈쇄화淞濱瑣話』 권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