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역대 수도와 베이징 소사 1

1966년 1월 26일, 구졔강 선생이 중국 역대의 수도와 베이징의 소사(小史)에 대해 이야기했다.

오후에 우리 샹산 요양원의 모든 요양자들은 식당에서 구졔강 선생이 강의하는 베이징의 역사를 들었다. 우리 청중들은 모두 베이징 의원에서 이 요양원으로 옮겨온 사람들이었다. 이 가운데에는 화가인 우쭤런(吴作人)과 종교인이며 시인인 자오푸추(赵朴初)도 있었다. 그 나머지 대다수는 중앙 각 부의 노 간부들이었다. 사람들은 마치 학생처럼 의자에 앉아 강의를 들었고 구 선생은 작은 칠판 앞에서 자신이 그린 베이징 지도를 걸어 놓고 베이징의 건도사(建都史)를 강론했다. 필기를 하는 사람은 적었고 대다수의 사람들은 조용히 듣고만 있었다.

지금(1982년 2월 27일) 나는 청색 표지의 책, 곧 15년 전의 ‘파란 노트’를 펴놓고 있다. 그 위에는 베이징사(北京史)의 앞 부분이 기록되어 있고, ‘역대 수도(歷代京都)’라고 적혀 있다. 이것은 구 선생과 나 자신 사이에 이루어진 담화로, 나는 이것을 정리하여 순서에 따라 베이징사의 앞쪽에 놓았다.

고대 중국의 역대 수도는 아래와 같다.

하(夏): 허난 뤄양(洛阳)

상(商): 허난 안양(安阳)

서주(西周): 산시(陕西)의 시안(西安). 배도(陪都)는 허난의 뤄양이었다.

동주(东周): 허난 뤄양으로 천도했다.

진(秦): 산시의 시안

한(汉): 산시의 시안

진․한이 시안을 수도로 정한 것은 방어에 용이했기 때문이다. 그곳은 서북쪽의 적에게 공격받기가 쉬웠으나, 서남의 적에게 공격을 받지 않을 수 있었다.

위(魏): 허베이의 린장(临漳)과 허난의 뤄양.

이곳에 수도를 정한 것은 이 지방의 지세가 높기 때문이었다.

오(吴): 처음에는 난징(南京), 두 번째는 우창(武昌)이 수도였다.

촉(蜀): 쓰촨(四川)의 청두(成都)

서진(西晋): 허난의 뤄양

동진(东晋): 난징

북조(北朝): 북위(北魏)는 뤄양, 북제(北齐)는 린장, 북주(北周)는 산시(陕西)의 시안

뤄양은 고성(古城)으로 약 1000년 간 수도였다.

시안의 대안탑

남조(南朝): 수도는 난징.

동진(东晋)․송(宋)․제(齐)․양(梁)․진(陈) 등 남쪽에 있는 왕조의 수도는 모두 난징에 있었다.

수(隋): 산시의 시안. 양제(炀帝)는 허난의 뤄양으로 천도했다.

당(唐): 산시의 시안.

시안은 고성(古城)으로 약 1,000년 간 수도였다. 당대에는 또 허난의 뤄양을 배도(陪都)로 정하고 동도(东都), 신도(神都)라 칭했다. 우쩌톈(武则天)이 황제로 즉위하자 뤄양에 수도를 정했다.

오대(五代): 후당(后唐)이 뤄양에 도읍을 정한 것을 제외하고 나머지는 모두 볜량(汴梁: 开封)이 수도였다.

북송(北宋): 허난의 볜량

남송(南宋): 저쟝(浙江)의 항저우(杭州)

금(金): 처음에는 베이징이었다가 뒤에 볜량으로 천도했다.

원(元): 베이징

명(明): 난징. 뒤에 베이징으로 천도했다.

청(淸): 베이징

민국(民国)초: 베이징

베이징은 고성(古城)으로 약 1000년 간 수도였다.

중국 역대의 고도(古都) 가운데 뤄양․시안․베이징이 수도였던 기간은 각각 모두 약 1000년으로 가장 길었다.

이어서 베이징의 연혁에 대해 알아보자.

베이징이 수도로 건립된 것은 이미 천년의 역사를 갖고 있다. 어떤 곳을 수도로 정하느냐 하는 것에는 몇 가지 조건이 있다. 산이 있어야 방어할 수 있고, 물이 있어야 생활할 수 있는 것이다.

베이징에는 융딩허(永定河)가 있고 시산(西山)이 있다. 그 외에도 쿤밍후(昆明湖)․스차하이(什刹海)․중난하이(中南海)가 서로 연결되어 있다. 그러므로 이곳은 수도가 될 수 있는 여러 가지 조건을 구비하고 있었다.

고대의 베이징은 어떠했는가? 󰡔사기(史记)󰡕에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즉 주 무왕(周武王)이 황제(黄帝)의 후예를 계(蓟)에 봉했다. ‘계’는 베이징에 있다. 또 주 왕조는 공신인 소공(召公)을 연(燕)에 봉했다고 했다. 연은 베이징이 아니다. 그것은 연이 계를 멸망시켰기 때문이다. 이것으로 연과 계가 원래 한 곳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연나라는 춘추시대에서 전국시대에 이르기까지 모두 베이징 일대에 위치했다.

과거에 베이징에서 발굴된 유물이 모두 연나라의 유물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통하여 연의 수도가 베이징에 있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연의 수도는 바로 이현(易县)이었다. 그러므로 베이징을 옌징(燕京), 곧 연의 수도로 보는 것은 틀린 것이다. 이현을 연의 하도(下都)로 보는 것 역시 틀린 것이다. 이현은 오늘날까지 연의 문물이 적잖이 보존되어 있는 지역이다.

연이 멸망하자 연의 태자 단(丹)은 징커(荆轲)를 진(秦)으로 보내 진 왕을 죽이도록 했다. 사람들은 징커를 떠나 보내며 이렇게 노래했다.

바람소리는 쓸쓸하고 이수이는 찬데,
장사(壮士) 한번 가면 돌아오지 못하리
(风萧萧兮, 易水寒, 壮士一去兮, 不復还)

이 일과 노래로도 연의 수도는 이현이었음을 증명할 수 있다.

청의 건륭 제는 일을 좋아해 곳곳에 제자(题字)를 했다. 건륭은 샹산(香山)에 ‘금대석조(金臺夕照)’라는 네 글자를 썼다. 금대는 황금대(黄金臺)로 원래는 연의 소왕(昭王)이 건조한 것이다. 샹산에서 이렇게 네 글자를 썼다는 것 역시 아무런 근거가 없는 것이다.

당연히 베이징은 연의 영역에 속하는 한 지방이다.

처음으로 베이징에 도읍한 것은 동진(东晋) 말기, 즉 5호 16국의 ‘전연(前燕)’으로 전연의 왕 무룽쥔(慕容儁)이 베이징에 건도했다. 무룽쥔은 선비(鲜卑)족 사람으로 그가 통치한 전연은 단지 수십 년 간 존속하다가 망했기에, 베이징에는 그의 유물이 남아 있지 않다. 당시 이 성은 매우 작았고 수도로 있었던 기간도 매우 짧았으므로 크게 영향을 주지 못했다.

베이징 파위안쓰(法源寺)

수와 당에 이르러 전국은 다시 통일되었다. 베이징은 수․당의 판도에 속했고, 유저우(幽州)라 칭해졌다. 유저우는 융딩허 부근에 있었다. 당 태종이 동쪽을 정벌하고 돌아올 때 베이징을 지나며 이곳에 ‘민중먀오(悯忠庙)’란 사원을 건조하여, 정벌할 때 죽은 이들을 기념했다. 민충묘는 지금의 파위안쓰(法源寺)다. 이 사원은 베이징성의 서남쪽에 있다. 그 이전의 수(隋) 왕조도 베이징에 ‘톈닝쓰탑(天寧寺塔)’을 건조했다. 이 건축은 8리 정도 되고 베이징에 지어진 최초의 건축으로 1000년쯤 되었다.

오대 시대의 요(遼)는 두 번째로 베이징에 건도한 나라다. 요는 거란인(契丹人)이 세운 나라다. 오대 ‘후진(后晋)’의 스징탕(石敬瑭)은 연(燕: 河北)과 운(云: 山西) 16주를 거란인에게 주었고, 그로 인해 거란은 강대해졌다. 양가장(杨家将)은 요와 싸웠던 것이다.

거란은 원래 북쪽의 러허(热河)에 위치했기 때문에, 요가 이 지방에 도읍할 때는 ‘난징’이라 칭했다. 지금 요의 유적으로는 중산공원(中山公园)에 있는 천년이나 묵은 측백나무(古柏)가 있다. 또한 시산(西山)의 랴오링(遼陵)은 요의 황제의 능묘다. 이것은 항일전쟁 이전에 발견된 것으로서 묘지(墓志)는 있으나 거란(契丹) 문자로 되어 있으므로 알아볼 수가 없다. 현재는 다만 몇 사람만이 요 황제와 황후의 묘를 알아볼 뿐이다.

요대의 베이징성은 정방형으로, 현재 시내의 서남쪽인 융딩허 가에 있었다. 그 후 요는 계속해서 남쪽으로 세력을 확장했다. 송 진종(眞宗) 때 승상인 커우준(寇准)은 찬위안(澶渊)으로 가서 요와 회담하고 동맹을 맺을 것을 건의했다. 찬위안의 맹약에서는 해마다 금과 비단을 요에 보내도록 규정했다. 찬위안은 지금의 허난에 있는 푸양(濮阳)이다. 허베이 지역은 모두 요의 관할로 들어갔다.

세 번째로 베이징에 건도한 나라는 ‘금(金)’이다. 금은 베이징을 ‘중두(中都)’라 이름했는데, 그때 성의 위치는 요 시대의 위치와 같이, 오늘날 베이징의 서남 지역이었다. 여진(女眞)이 일떠서서 요를 멸망시켰다. 여진은 원래 지린(吉林)에 거주했다. 그때 거란인이 여진에게 ‘해동청조(海东靑鸟)’를 공물로 바치게 하자, 금은 이를 참지 못해 전쟁을 일으켜 요를 멸망시켰다. 여진은 ‘금(金)’을 건국했고, 요의 수도였던 베이징을 점거했다. 금은 송을 멸망시킨 뒤 계속 남하하여 화이수이(淮水)에까지 이르렀다. 영토가 더욱 넓어지자 요 시대 때의 베이징의 명칭인 ‘난징’을 ‘중도’로 바꾸고 볜징(汴京: 허난의 카이펑)을 ‘난징’이라 칭했다.

지금 베이징에 있는 문물 중에서 적지 않은 것이 모두 이때 허난의 볜징에서 옮겨온 것이다. 오늘날 베이하이 공원(北海公园)의 태호석(太湖石)은 바로 송 볜량 시기의 것이다. 송의 휘종(徽宗) 황제는 놀기를 좋아했고, 글씨 쓰기, 그림 그리기, 가무를 애호했으며, 도교(道敎)를 숭상했다. 송 휘종은 ‘간악(艮岳)’이란 큰 정원을 만들었는데, 그 정원의 돌은 쟝쑤성(江苏省) 타이후(太湖)에서 허난 개봉으로 옮겨온 것이었다. 송대에는 화석강 기관(花石纲机关)이란 것이 있어서, 전문적으로 화석을 볜량으로 운반하는 일을 맡았다. 북송이 망하자 금에서는 이들 돌을 볜량에서 베이징으로 옮겼다. 그들이 그토록 태호석(太湖石)을 좋아했던 것은 태호석에 구멍이 많기 때문이다. 이 돌의 좋은 점은 강파르고(瘦), 주름이 졌으며(皱), 뚫려 있다(透)는 것이다. 현재 이허위안(颐和园)에도 이런 종류의 태호석이 있다.

루거우챠오(蘆沟桥)

금은 루거우챠오(蘆沟桥)를 융딩허 위에 세웠다. 이 다리는 매우 길고 위에 많은 돌사자가 새겨져 있는데, 돌사자의 모양은 모두 다르다. 다리를 건설하는 데 소요된 설비와 노동력은 굉장했다. 원대(元代)에 이탈리아 사람인 마르코폴로가 베이징에 와서 이 루거우챠오를 보고는 귀국하여 여행기를 펴냈다. 그 이후로 서양 사람들은 중국이 얼마나 부유하고 아름다운가를 알게 되었다. 그들도 이러한 다리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몇몇 사람들은 이것을 ‘마르코폴로 다리’라고 부르기도 했다.

금의 유물로는 또 퇀청(团城)에 있는 옥발(玉鉢)이 있다. 청의 건륭 제는 이 옥발을 위해 정자를 지었다.

요와 금의 수도는 모두 현재 베이징의 서남쪽이었다. 그들은 중난하이(中南海)에 이궁(離宫)을 축조했다.

베이징 성 연혁도

네 번째로 베이징에 수도를 정한 왕조는 원(元)이다.

요․금 이후로 몽골인(蒙古人)이 원을 세웠다. 몽골은 원래 작은 부락이었으나 차례로 여러 소국(小国)을 멸망시키고 계속 서쪽으로 진출하여 모스크바까지 확장했다. 원 세조(世祖) 쿠빌라이는 중국을 통일하고 베이징에 수도를 세워 ‘다두(大都)’라 이름했다. 원곡의 작가 관한칭(关汉卿)은 바로 이 다두 사람이었다.

원의 수도는 중난하이 일대로 대체로 지금의 베이징성과 같다. 바로 요․금의 수도에서 조금 북쪽으로 옮겨진 지역이다. 당시의 성은 톈안먼(天安门)을 남으로 하여 북으로 뻗쳐 있는 방형(方形)이었다. 원의 황제가 ‘중립극(中立极)’을 세우려 했던 것은 황궁이 성의 중심점에 있어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원의 황궁은 후대의 명대(明代) 황궁의 약간 서쪽에 치우쳐 삼해(三海)와 좀더 가까이 있었다. 원대에 축조한 ‘광한뎬(广寒殿)’은 베이하이(北海)에 있었는데, 황제는 이곳에서 피서를 하곤 했다. 여름이 되면 베이하이의 물을 끌어들여 내뿜게 했으므로 시원했다.

베이징의 수리(水利)를 담당했던 궈서우징의 상

원대에는 식량을 남방에서 베이징으로 운반해 왔다. 과거에도 역대로 남쪽의 양식을 북으로 운반하여 왔다. 이를테면 당(唐)은 창안에까지 운하를 세웠고, 송(宋)의 운하는 볜량까지, 원의 운하는 베이징까지 뻗쳐 있었다. 이들 운하의 주요 목적은 식량 등의 물품을 운반하기 위한 것이다. 당시의 운하는 남방에서 퉁저우(通州)까지, 다시 퉁저우에서 스차하이(什刹海)까지 이르렀고, 식량을 운반한 선박은 스차하이에 정박했다. 스차하이에는 ‘녹미창(禄米仓)’ ‘해운창(海运仓)’ 등의 많은 창고가 있었다. 이 창고의 이름들은 지금까지 이들 지역의 명칭에 남아 있다. 당시의 수리학자(水理学者) 궈서우징(郭守敬)은 원대인에게 수리를 하도록 하여, 시산(西山)일대의 물을 가오량허(高梁河)를 거쳐 스차하이까지 흐르게 했다.

원대부터 베이징의 골목을 후퉁(胡同)이라 칭했다. 후퉁은 몽골말로서 우물이란 의미다. 몽골 인에게 있어 우물이란 사람들이 모여 살던 곳이다. 베이징의 골목을 후퉁이라 부른 것은 원대에 이르러 생긴 일이다. 원 말 순제(顺帝)가 몽골로 달아났을 때 당시의 베이징은 완전히 불타 버렸다.

원대의 유물로는 푸청먼(阜成门) 안에 있는 묘응사(妙应寺) 백탑(白塔)이 있는데, 이것은 라마교의 건축물이다. 이 백탑은 원의 국사(国师)인 파스파(八思巴)를 기념하기 위해 만든 것이다. 파스파는 원의 문자를 제정했고 그가 죽은 후에 원에서는 그를 위해 묘응사 백탑을 지었다.

또 하나의 원대 유물로 예뤼추차이 묘(耶律楚材墓)가 있는데, 이것은 이허위안 입구의 남쪽에 있다. 당시에 원은 곳곳에서 굉장히 많은 사람을 죽였고 그들의 근거지를 불태웠다. 이에 예뤼추차이는 사람을 죽이지 말라고 원나라 사람들에게 권했을 뿐 아니라 다른 공적도 컸던 사람이다.

원대 건축으로는 팔대학원(八大学院) 부근에 성곽이 있다. 건륭 제는 여기에 ‘계문연수(蓟门烟树)’라 썼으나 실제로는 계문이 아니라 원문(元门)이다.

‘베이징’이란 이름은 명대에 정해졌다. 명 태조(太祖) 주위안장(朱元璋)은 난징에 수도를 정하고 ‘경사(京师)’라 이름했다. 그때까지 각 왕조는 수도를 ‘경사’라 불렀다. ‘경(京)’은 높은 문과 누대라는 의미이고 ‘사’는 많은 사람들이라는 뜻이다.

주위안장의 장자가 일찍 죽자 황위는 장손(长孙)에게 물려졌다. 주위안장이 죽은 뒤 손자가 황제의 자리에 올랐으나 주위안장의 아들이며 어린 황제의 숙부인 연왕(燕王)이 군사를 일으켜 난징을 공격하고 막 황위에 오른 어린 황제를 폐위시켰다. 연왕 주두이(朱棣)는 난징에서 황위에 올랐고 후에 베이징을 수도로 결정했다. 그는 왜 베이징을 수도로 정했는가? 첫째, 주두이는 본래 연 땅에 봉해졌다. 둘째, 난징을 수도로 정하면 안일에 빠진다. 남북조 때 남조는 그들의 수도를 난징에 정해서 안일에 빠졌기에 남북 각지를 통일, 관할할 수 없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