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이징을 추억하며

천쉐자오陳學昭(1906∼1991년)
본명은 천수잉陈淑英으로, 저쟝浙江 하이닝海宁 사람이다. 작가이자 번역가로 활동했으며, 일찍이 천초사浅草社와 어사사语丝社 등의 문학단체에서 활동했다. 산문집으로 『촌초심寸草心』, 『연하반려烟霞伴侶』, 『憶巴黎』 등이 있고, 소설집으로 『남풍의 꿈南風的夢』, 『일하는 것은 아름답다工作着是美丽的』 등이 있다.

어제는 밤새도록 바람이 거세게 불어 자다가 몇 번이나 깼다. 마치 낮 동안 뭔가 해야 할 일을 까맣게 잊어먹고 하지 않은 듯 마음이 불안했다. 오늘 아침 6시도 안 되어 일어나니 하늘은 어둑신하고 아침노을도 일지 않았다. 북풍은 휘이익 소리를 내며 세차게 불어대 나는 책상머리에 엎드려 『쉴러 운문집雪萊韻文集』을 뒤적였는데, 이것은 이미 친졔琴姐가 나에게 몇 차례나 돌려달라고 독촉을 한 책이었다.

나는 밖으로 뛰쳐나와 우물쭈물 어찌 할 바를 모르고 있다가 용기를 내어 대문을 나섰다. 윈芸 형은 항상 내가 튀는 행동을 한다고 비웃었는데, 나 역시 인정한다. 나는 무력한 인간으로, 저 위대한 인물들처럼 모든 일들을 파악할 능력이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우리는 그들이 얼마다 위대한 지 들은 바 있기에, 이렇게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나로 말하자면, 내게 호의를 갖고 기대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기는 해도, 실제로 나라는 인간은 보잘 것 없어 우물쭈물 어찌 할 바를 모르는 채 길을 걷는 주제인지라, 나에게 기대를 걸고 있는 사람들이 실망하지 않기를 바라고 있으며, 뜻밖의 작은 성취라도 이루게 되면 적지 않은 기쁨을 얻게 된다.

시즈먼西直門을 나서니 내가 처음 베이징에 왔을 때가 생각났다. 그날 저녁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진흙땅 위에, 시원한 바람이 후덥지근한 더위를 날려버렸다. 내가 최초로 만난 베이징은 이른 봄비가 내린 뒤의 멀끔하고 고요하며 가슴이 탁 트이는 곳이었다. 이렇듯 새로운 경지를 만나게 되다니 나는 얼마나 행운아인가! 하지만 지금은 하루에도 몇 번씩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다. 내 눈에 들어오는 것은 거리로 들어가는 분뇨차와 양의 등뼈를 싣고 거리를 오가는 커다란 짐차로 이것들은 하나도 아름다울 게 없는 것들이다. 하지만 내가 최초로 느꼈던 희열은 내 마음 깊은 곳에 자리 잡고 오래된 의식이 되어버렸다. 모든 것이 항상 그런 식으로 모순적이고 통일이 안 되어 있으며, 조화롭지 못하고 고르지 못하며 적당히 층차가 있다.

시즈먼을 나온 뒤 인력거를 타고 칭화위안淸華園으로 갔다. 이곳의 경관은 내가 일찍이 상상해보지 못한 것이었다. 가는 길에 가을 들녘은 황량했고, 보리 밭 이랑이 종횡으로 나 있었으며, 듬성듬성한 숲 저 너머에는 희멀건한 태양이 비추고 있는 가운데 한 줄기 북풍이 불어와 견딜 수 없는 차가운 기운이 느껴졌다. 거기에 더해 낙엽이 날리고 백양나무에 소슬바람 불어오니 가을은 이미 깊어, 초겨울의 근엄함과 차가운 냉기가 비감한 느낌을 더해주었다.

보리 밭 이랑 사이에 섞여 있는 만터우饅頭 모양의 흙 봉분은 새로 만들어졌거나 전부터 있던 묘들인데, 삶이란 게 얼마나 짧고 보잘 것 없는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하루 종일 무엇을 찾아 헤매고 추구하느라 바쁜 것인가? 자기 주제를 너무 모르고 있지 않은가? 좁고 야트막한 밭이랑 위를 인력거가 갈 수 없어 내려서 걸었다. 나는 차가운 바람을 맞으며 앞으로 걸어갔다. 발밑은 누런 모래 같은 진흙이었다. 인력거는 뒤에서 따라왔다. 거의 1리 남짓 되는 길이었다.……

……중략

인력거가 칭화위안 밖에 멈췄다. 안에 들어가니 건물들이 흩어져 있는데, 칭화학교의 교사校舍들로 부지가 정말 넓었다. 내가 알기로 베이징에서 가장 큰 싼베이쯔 화원三貝子花園은 비교도 할 수 없었다. 동원東園에서 국화꽃이 피어있는 온실로 에둘러 갔다. 아! 진정 형언할 길 없는 놀라움이라니! 나는 이제껏 이렇게 많은 종류의 서로 다른 모습의 국화를 본 적이 없다. 길게 곧추선 줄기에 엄청 큰 꽃이 피었는데, 종려포단棕梠蒲團이라는 이름이 붙어 있는 것은 옅은 황색의 꽃받침이 하나씩 세세하게 옆에 붙어 있었다. 이른바 대부귀大富貴라는 말대로 모란과 같이 산뜻하고 아름답고, 소세梳洗에 게으른 것이 봉두난발한 듯하고, 서설이 내린 듯 하얗고 끼끔한 꽃잎은 크기가 연꽃만 하다. 차가운 겨울 산에서 비취를 줍듯, 순록의 가지와 순록의 잎, 순록의 꽃은 진정 영험한 봉우리의 녹매綠梅를 떠올리게 했다. 얼마나 그윽하고 우아하며, 얼마나 맑고 수려한가! 각양각색의 서로 다른 자태는 그 나름의 독특한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다. 어떤 것은 새색시의 단아함이 있고, 어떤 것은 소녀 같은 풋풋함이 있으며, 어떤 것은 낭만 시인 문학가의 소탈함이 있다. 또 어떤 것은 은자隱者 같이 고결하고 탈속하고, 어린애 같이 활발하고 귀여우며, 대인 같이 단정하고 온화하다. 벗들이여, 이것들과 비교할 때 우리 학교의 2백 여 명의 학우들을 내 어찌 문면으로 묘사하고 서술해 소개할 수 있을까?

시간적인 제약 때문에 나는 좀 더 머물고 감상할 수 없어 하릴없이 돌아와야 했다. 인력거에 앉으니, 거기서 무언가를 잃어버린 듯했다. 한 사람의 심경은 그 사람의 신체와 같은 것이라, 만약 강건하고 튼실하다면, 외부로부터의 질병의 침입에 대적할 수 있을 것이고, 쇠약한 신체라면 곳곳이 병들 것이다.

이번 나들이는 촉박한 것이라 내 마음 한 구석도 공허했다. 하지만 나는 즉시 내 자신을 납득시켰다.
“이 정도면 됐다!”
“이 정도면 됐어, 다음에 다시 오면 돼지!”

내가 ‘다음’이라고 생각한 것은 결국 내 자신을 위한 희망일 따름이었다. 어찌 ‘다음’을 알 수 있겠나? 내 마음 한 구석이 다시 공허해졌다. 누런색 인력거는 “가자!, 가자!” 하면서 갈 길을 재촉했다. ‘다음’이라고 생각한 늦가을에 나는 여기에 있을까? 여기에 있다면 ‘다음’ 번의 국화를 보러 가게 될까? 나는 망연히 먼 곳에 있는 꽃과 나들이를 사랑하는 친구들을 떠올렸다.

1929년 1월 26일
1929년 1월 26일 자 톈진天津 『대공보大公報·소공원小公園』