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조의 여러 왕조들

3-1 남조의 실험 현장 – 단명한 왕조들

만약 한 마디로 남조를 개괄해야 한다면 “칭찬할 만한 점이 없다”는 말이 적절할 것이다. 169년이라는 짧은 기간에 왕조가 4번이나 바뀌었는데 그중 유송이 가장 길어서 60년, 그 다음으로 남량이 56년, 진陳이 33년이었다. 가장 짧았던 남제는 24년이었다.

송, 제, 양, 진은 모두 단명했다.

왕조가 단명해서 황제도 그랬다. 재위 기간이 가장 짧았던 이는 겨우 1년이었다. 그밖에 2년, 4년, 8년이 각기 3명, 3년이 7명, 5년과 6년이 각기 1명이었다. 10년을 넘긴 사람이 겨우 5명이었는데 그중 12년이 2명, 15년이 1명이었다.1

그러면 재위 기간이 가장 길었던 사람은 어땠을까?

그다지 좋지 못했다. 양 무제 소연蕭衍과 송 문제 유의륭劉義隆은 각기 48년, 38년으로 둘 다 재위 기간이 짧지 않았다. 그러나 양 무제는 궁중에 유폐되어 죽었고 유의륭은 자기 아들에게 살해당했다. 실제로 남조에는 24명의 황제가 있었는데 그중 적어도 13명이 비명횡사했다. 범인은 태자, 종실, 권신부터 시종, 호위병, 반란자, 외적, 새 황제에 이르기까지 아주 다양했다.

이것은 생각해볼 만한 일이다.

물론 송, 제, 양, 진의 상황이 모두 같지는 않았다. 유송의 황제는 모두 8명이었고 그중 곱게 못 죽은 사람이 5명이었다. 남제는 황제가 7명, 그중 비명횡사한 사람이 네 명이어서 반을 넘었다. 가장 비참했던 남량은 4명의 황제가 전부 천수를 누리지 못했다. 게다가 이 세 왕조에서 피살된 황제 중 6명이 미성년자였는데 최연장자가 17세. 최연소자가 겨우 13세였다.3

그나마 제일 나았던 곳은 진나라였다. 마지막 황제 진숙보陳叔寶를 비롯하여 모두가 살해당하지 않았고 진숙보는 심지어 수 양제가 낙양으로 천도하는 해까지 생존했다. 하지만 진 왕조의 다섯 황제 중 한 명은 폐위를 당한 뒤 1년 반 만에 19살의 나이로 미심쩍은 죽음을 맞았다.

더구나 진나라는 실로 왕조라고 불리기가 부끄러울 정도였다. 그들이 선양禪讓을 받아 나라를 세웠을 때, 남량의 국토는 이미 크게 줄어든 상태여서 진나라도 남동부 한쪽에 웅크린 채 수나라가 와서 멸망시켜주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비록 그들도 한 번 힘을 떨쳐보려 한 적이 있기는 했지만.

사실 송, 제, 양. 진의 개국황제는 모두 유망한 군주였고 새로운 기상을 떨친 적이 있었다. 그래서 송나라에는 원가元嘉의 치가, 제나라에는 영명永明의 치가, 그리고 양나라에는 천감天監의 치가 있었다. 하지만 예외 없이 대란이 바로 이어져 망국으로 치달았다. 남조의 역사는 거의 통치와 혼란이 교대로 순환되는 역사였다.

이 점은 북위와는 크게 달랐다.

북위도 혼란하기는 했다. 14명의 황제 중 9명이 비정상적으로 사망했다. 그러나 북위는 동란의 결과로 발전했고 결국 야만족 집단에서 중화제국으로 변신했다. 이에 반해 남조는 일찌감치 중화제국의 의식과 기상을 상실했다. 동진 같은 중앙정부로서의 명분도 없는, 방대한 제후왕국일 뿐이었다.5

그 결과, 어떻게 되었을까?

한화된 이민족조차 그들을 업신여겼다. 북위의 정사에서는 동진을 ‘참진’(僭晋. 진이라 불리는 것이 분수에 맞지 않다는 뜻)이라 불렀고 유송과 남제와 남량은 ‘도이(島夷. 연해 지역의 오랑캐)라고 불렀다. 사실 동진이 중화의 정통성을 대표하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동진 정권의 합법성이 미심쩍었을 뿐이었다. 그 후의 남조는 중화를 사칭할 자격조차 없는, 남방 오랑캐로 치부되었다.6

그것은 실로 엄청난 아이러니였다.

따라서 우리는 이런 질문을 할 필요가 있다. 남조의 존재도 역사적 의의와 문화적 가치가 있을까? 만약 있다면 그것은 무엇일까?

남조는 중국문명의 테스트 베드 역할을 했다.

지금까지 많은 사람들이 경시해온 남북조는 사실 중국 역사의 한 전환점이었다. 북방과 남방 모두 갖가지 탐색과 실험을 진행했는데 단지 북방이 성공의 경험을 더 많이 제공하고 남방은 실패했을 뿐이다. 하지만 실패도 마찬가지로 의미가 있었다. 실제로 북방의 경험과 남방의 교훈에 힘입어 훗날 수나라와 당나라는 대변혁을 실현할 수 있었다.

역사에서는 성공과 실패로 영웅을 논할 수 없다.

그러면 남조의 실험은 무엇이었을까?

동진의 정치 개혁이었다.

우리는 동진에서 정권은 사족이 소유했고 정치는 문벌이 좌지우지했음을 알고 있다. 그런데 남조의 개국 군주인 송 무제 유유劉裕, 제 고제高帝 소도성蕭道成, 양 무제 소연, 진陳 무제 진패선陳覇先은 전부 빈한한 평민과 군인 출신이었다. 이것은 진晋 무제 사마염이 유생과 명사로 자처한 것과 완전히 달랐으며 또한 필연적으로 정권 내부의 사족과 서족, 문관 정부와 군인 정권 사이의 모순을 야기했다.

남조의 혼란은 주요 원인이 여기에 있었다.

문제는 사족의 정권이 왜 군인의 수중에 떨어졌느냐는 것이다.왜냐하면 사족이 갈수록 나태하고 무능해졌기 때문이다. 문벌제도에 따라 그 명문 귀족의 자제들은 나면서부터 관리가 되고 세금이 면제되는 특권을 가졌고 법률과 제도는 그들의 불로소득을 보장했다. 그래서 그들은 어려서부터 호의호식하고 빈둥거렸으며 예복을 입고 고담준론을 펼치거나 혼자 감상에 빠져 종일 생각 없이 지냈다.

그들은 기생충이었다.

기생충은 향상심과 창조력이 있을 리 없고 책임감과 사명감도 있을 리 없다. 사치스럽고 안일한 세가의 자제들은 심지어 관직을 청관淸官과 탁관濁官으로 나누었다. 그런데 청관은 청렴한 관직이 아니라 한가한 관직이라는 뜻이었다. 그래서 청관과 반대되는 탁관도 ‘탐관貪官’이 아니라 징세나 소송처럼 자질구레한 사무를 처리하는 바쁜 관직을 뜻했다. 기생충들이 그런 관직을 맡고 싶어 할 리가 만무했다. 오랜 세월이 지나자 그들은 결국 재난도 전란도 노동의 수고도 모르는 채 편안히 자기 봉록만 지키면서 백성 위에 군림하는 존재가 되었다.

그들은 머저리였다.

머저리와 기생충이 나라를 지킬 수 있었을까? 불가능했다. 나라를 안정시킬 수는 있었을까? 역시 불가능했다. 이민족의 수중에서 중원을 수복할 수는 있었을까? 더더욱 불가능했다.그래서 빈한한 평민에게 기회가 생겼다.

기회는 명문 귀족이 내주었다. 특히 그것은 힘들고 위험한 군직軍職이었다. 그것은 기층 평민들에게 입신출세의 계단을 내주었는데 송나라의 개국황제 유유도 바로 그 기회를 이용했다. 유유가 성공한 뒤부터 평민의 자제들 사이에서는 출세를 하려면 군인이 돼야 한다는 인식이 형성되었다.

남조가 모두 군사정부였던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그런데 유유의 성공은 동진의 정세와 관련이 있었다. 동진에는 중앙군이 없었고 사실 있는 것도 불가능했다. 낭야왕琅邪王 사마예司馬睿가 세운 그 정권은 망명 정부였는데 어떻게 중앙의 명의로 강산을 통일하고 천하를 호령할 수 있었겠는가?(󰡔이중톈중국사 11권-위진풍도󰡕를 참고)

가장 중요했던 것은 북부北府와 서부西府였다.

북부와 서부는 모두 군사집단이었고 주로 전란을 피해 남하한 유민들로 이뤄져서 관군과 민병의 중간 성격을 갖고 있었다. 주둔 지역이 각기 동진의 수도였던 건강建康의 북쪽과 서쪽이었기 때문에 북부와 서부라고 불렸으며 서주徐州북부와 예주豫州서부(혹은 형주荊州서부)라고도 불렸다.8

유유가 왕조를 바꿀 때 의지한 쪽은 북부였다.

그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사실 북부와 서부의 총사령관은 명의상 조정이 임명한 관리이기는 했지만 수하의 장병들은 그 스스로 모집한 이들이었다. 그래서 총사령관이 왕조에 충성스러우면 그들은 동진의 국군이었다. 비수대전에서 사현謝玄이 지휘한 북부병이 바로 그랬다. 반대로 총사령관이 딴 마음을 갖고 있으면 그가 장악한 병력은 왕실을 보위하지 않고 정권을 전복시켰다. 환온이 지휘한 서부병이 바로 그랬다.

그래서 동진의 왕실과 조정은 북부와 서부에 대해 생각이 복잡했다. 그들은 누가 자신들을 위해 내란을 평적하고 외적을 막아주길 바라면서도 그가 일단 성공한 뒤 통제 불능의 존재가 될까 두려워했다. 그들이 진심으로 바라는 것은 이랬다. 북부와 서부가 제국의 도움 없이 알아서 군대를 양성해 중앙의 명에 따라 전장에서 활약하면서도 너무 성장하여 왕조와 정권의 안정에 위해를 끼치지 않는 것이었다.

안타깝게도 세상에는 그렇게 마음대로 되는 일이 없다. 그렇게 머리를 굴리는 사이에 중원 수복의 기회는 차례차례 날아간 반면, 정권 찬탈의 시도는 차례차례 이어졌다. 그 시도 중 앞의 몇 번은 마지막에 실패했지만 결국 유유가 성공을 거뒀다. 그는 동진을 끝장냈을 뿐만 아니라 사족도 끝장을 냈다.

그러면 유유에 관해 살펴보자.

3-2 시대가 영웅을 만들지는 않는다

유유는 손은孫恩의 난을 계기로 이름이 알려졌다.

그런 내란은 동진 시대에 매우 빈번했다. 그 전에는 왕돈의 난(서기 322년), 소준蘇峻의 난(서기 327년)이 있었고 그 후에는 환현桓玄의 난(서기 402년), 노순盧循의 난(서기 410년)이 있었다. 난세에는 영웅이 나온다. 북부의 전신인 치감郗鑒의 군단과 서부의 전신인 도간陶侃의 부대는 소준의 난을 평정하면서 두각을 드러내 역사에 영향을 준 세력이 되었다.

이제는 유유의 차례였다.

서기 399년, 북위의 국왕 탁발규가 평성으로 천도해 칭제한 그 이듬해이기도 한 이해에 손은의 난이 일어났다. 손은은 도교의 신도로 알려졌지만 실제로는 사교 집단과 테러 조직의 두목이었다. 그의 꼬드김과 협박으로 수만 명의 백성이 재산을 헌납하고 처자를 버렸으며 심지어 짐이 될 것 같은 아기까지 죽이고서 그를 따라 성을 공격하고 살인과 방화를 자행했다.9

동진 정권의 부패와 명문자제들의 무능이 그 동란 속에서 남김없이 드러났다. 손은이 난을 일으켰을 때, 회계군의 태수 왕응지王凝之(왕희지王羲之의 차남)는 군대를 내보내지도, 방비를 하지도 않은 채 매일 밀실에서 기도를 올렸으며 귀병鬼兵 수만 명을 청해 요새를 지키겠다고 선언하기까지 했다. 그 결과는 어땠을까? 성이 함락되어 목숨을 빼앗겼다.10

그의 아내 사도온謝道韞이 끝까지 그를 경멸할 만했다.11

그 위기의 순간에 명을 받은 군대는 북부였고 전세를 역전시킨 인물은 바로 유유였다. 당시 그는 북부의 미천한 참군參軍에 불과했지만 강대해보였던 손은을 거듭 격파하여 끝내 멸망시켰다.

이는 손은의 사교 집단이 오합지존에 불과했음을 보여주는 동시에 동진 정권의 병폐가 이미 구제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음을 설명해준다. 그들은 평민 출신의 그 하급 군관에 의지해 아슬아슬하게 재난을 면한 것이다.

동진의 백약이 무효한 상태는 그 후에도 거듭 노출되었다. 사실 손은의 난은 끊어질 듯 이어질 듯 2년 넘게 계속되었는데도 집권자들은 아무 경각심 없이 그 전처럼 사치와 방종을 일삼고 서로 헐뜯느라 여념이 없었다. 그야말로 멸망을 자초한 것이다.

그 결과, 손은도 아직 죽지 않은 상황에서 환현이 나타났다.

환현은 환온의 막내아들이었다. 환온은 본래 동진을 찬탈하려다가 사안謝安 등의 저지로 뜻을 못 이뤘는데 이제 환현이 그 숙원을 완수하려 했다(󰡔이중톈중국사 11권⋅위진풍도󰡕를 참고). 이때 그는 서부의 사령관으로서 형주를 지키고 있었는데 그 세력 범위가 동진의 3분의 2에 달했다. 그가 조정과 사이가 틀어지는 바람에 황실은 북부에 기대를 걸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북부는 환현 쪽으로 기울었다.

그들의 배반에는 이유가 있었다. 과거에 북부의 사령관은 계속 문벌 사족이 맡았는데 이때는 이미 군인 출신인 유뢰지劉牢之로 바뀌어 있다. 유뢰지는 한평생 나라를 위해 싸워온 인물이었지만 공만 많고 정치적인 감각은 전무했다. 당시 유유 등은 환현과 결탁하는 것에 반대했지만 유뢰지는 성을 내며 말했다.

“환현을 없애는 것은 손바닥 뒤집듯이 쉬운 일이지만 그 다음에 조정의 그놈들이 또 나를 용납하겠느냐?”

알고 보니 그는 공을 세운 뒤 조정의 핍박을 받는 것이 더 두려웠던 것이다.

그것은 어리석은 생각이었다. 실제로 당시 상황에서 환현은 기세가 등등했지만 명분이 모자랐고 동진 황실은 정당방위의 입장이었지만 힘이 모자랐다. 그래서 양쪽은 다 북부군의 도움을 얻고 유뢰지를 끌어들이려 했다. 만약 유뢰지에게 정치적 안목이 있었다면 역사는 전혀 다른 양상으로 흘러갔을 것이다. 하지만 아쉽게도 그에게는 그것이 없었다.12

보아하니 사족도 부패했지만 무인도 꼭 유능했던 것 같지는 않다.북부의 투항을 받은 환현은 호랑이가 날개를 얻은 격이었다. 그는 순조롭게 동진의 조정을 접수하고 정적들을 없앤 뒤, 유뢰지의 병권까지 빼앗으려 했다. 이를 예상 못한 유뢰지는 대경실색하여 광릉廣陵(지금의 장쑤성 양저우揚州)으로 가서 군대를 일으켜 환현을 토벌하기로 하고 유유에게 같이 가지 않겠느냐고 물었다.

유유는 단호히 거절했다.

이미 전란 속에서 성장한 유유는 그에게 직언을 했다.

“장군은 강한 군대 수만 명을 갖고도 투항을 했고 환현은 새로운 뜻으로 천하를 뒤흔들었으니, 민심은 이미 장군을 떠나 환현에게 갔습니다. 장군은 그래도 광릉으로 가시겠습니까? 이 유유는 더 이상 장군을 따를 수 없어 경구京口(지금의 장쑤성 전장鎭江)로 갈까 합니다.”13

경구는 북부의 근거지였다.

물론 강 하나를 사이에 둔 광릉도 북부의 근거지였지만 애석하게도 옛 근거지였다. 과거에 북부가 그곳에서 경구로 옮겨간 것은 경구가 수도 건강과 큰 강으로 가로막혀 있지 않고 또 광릉과 강을 마주본 채 호응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다시 말해 유유가 돌아간 경구는 유뢰지가 가려던 광릉보다 환현에게서 더 가까웠다. 그들 중 한 명은 난관에 맞서러 갔고 다른 한 명은 사실 도망을 친 것이다.14

이 두 가지 선택으로 두 사람의 우열이 판가름 났다.

유뢰지는 포기하지 못하고 휘하 장수들을 불러 회의를 열었지만 뜻밖에 그들은 한바탕 떠들다가 흩어져버렸다. 부하들에게 버림을 받은 유뢰지는 어쩔 수 없이 북상을 택했다. 그런데 건강을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아 두려워서 스스로 목을 매고 죽었고 나중에 환현에게 부관참시를 당했다. 그의 아들은 곡을 할 여유도 없이 북상해서 선비족의 남연에 투항했다.15

유유의 뒤를 따른 사람은 하무기何無忌였다.

하무기는 유뢰지의 외조카이자 유유의 오랜 친구였다. 유뢰지와 유유가 갈라지자 하무기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했다. 이때 유유는 확고한 태도로 그에게 말했다.

“나와 함께 경구로 가자! 만약 환현이 충신이면 너와 내가 함께 그를 보좌하고, 그렇지 않으면 그를 죽여버리자!”16

결국 환현은 죽임을 당했다.

손은과 마찬가지로 환현도 흥기와 멸망이 다 신속하게 이뤄졌다. 건강에 입성하고부터 패하여 피살되기까지 그는 모두 26개월간 분투했으며 실패한 주요 원인은 온 세상의 비난을 무릅쓰고 우격다짐으로 칭제를 한 것이었다. 원흥元興 2년(서기 403년) 12월, 환현은 진 안제安帝에게 선양을 강요하고 국호를 초楚로 바꿨다. 이에 진작부터 그를 없애려 했던 유유는 정당한 이유와 강력한 구실을 얻었다.17

3개월 뒤, 유유는 군대를 일으켰다.18

유유의 맨 처음 생각이 동진 황실의 부흥이었는지, 아니면 개인적인 야심의 실현이나 유뢰지의 복수였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그러나 쌍방의 힘의 차이가 현격했던 것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당시 북부의 장수들은 대부분 살해되었고 북부군도 실제로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유유가 이끌던 연합군은 고작 1700명이었다. 이렇게 적은 병력으로 환현을 공격해 들어갔으니 그야말로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19

그러나 쌍방의 투지도 차이가 컸다. 손에 긴 칼을 든 유유가 병사들보다 앞에 서서 돌격했고 적진의 두 장군이 그의 칼에 목숨을 잃었다. 이와 정반대로 환현은 소문을 듣고서 간이 콩알 만해져 싸우지도 않고 도망쳤다. 당시 한 부하가 그의 말고삐를 당기며 유유와 싸우기를 청했다고 한다. 그런데 그는 채찍으로 하늘을 가리킨 뒤 아무 길이나 골라 급히 줄행랑을 쳤다. 그의 결말은 사실상 이미 정해진 것이나 마찬가지였다.20

이듬해(서기 404년) 5월, 환현은 살해되었다.

그 후의 역사는 유유에 의해 씌어졌다. 그가 택한 노선은 과거에 환온이 계획한 것과 매우 흡사했다. 먼저 공을 세우고 나서 제위를 찬탈해 칭제를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짧은 십여 년간 그는 연이어 남연을 멸하고(서기 410년), 서촉을 멸하고(서기 413년), 후진을 멸하여(서기 417년) 동진 황제의 깃발을 다시 장안성 꼭대기에 꽂았다.

그때는 북방의 이민족조차 유유가 다음에 무슨 일을 하려고 마음먹으면 반드시 그 일을 이룬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흉노가 세운 호하의 왕은 흥분하여 말하길, “내가 보기에 유유는 분명 승리를 거두고 동진으로 돌아갈 테니, 그러면 관중關中은 내 땅이 될 것이다.”라고 했다. 또 최호는 북위의 황제에게 말하길, “왕맹은 부견의 관중이고 유유는 동진의 조조입니다. 후진을 멸한 뒤 그는 틀림없이 동진으로 돌아가 제위를 찬탈할 테니 후진의 영토는 조만간 우리 북위의 것이 될 겁니다.”라고 했다.21

유유의 속셈은 옛날의 사마소와 같았다.

경로도 똑같았다. 먼저 송공宋公에 봉해졌고 그 다음에는 송왕宋王에 봉해졌다. 그때는 송의 황제가 되기까지 한걸음밖에 안 남은 셈이었지만 유유는 차마 입을 열 수가 없었다. 그는 할 수 없이 수양壽陽(지금의 안휘성 서우현壽縣)의 왕궁에 신하들을 초대해놓고서 자기가 작위를 내놓고 은퇴해 수도에서 만년을 보낼 것이라고 선언했다.

사람들은 유유의 말 속에 숨겨진 뜻을 알아채지 못하고 온통 그의 덕을 찬양하기만 했다. 그러다가 부량傅亮이라는 고급 관리가 궁궐 문을 나선 뒤에야 크게 뭔가를 깨닫고 다시 돌아서서 문을 두드렸다. 곧 문이 열렸고 부량은 궁궐 안에 들어서자마자 유유에게 말했다.

“소신 먼저 건강에 돌아가 있는 것이 좋겠습니다.”

유유도 구구히 말하지 않고 한 마디만 물었다.

“사람이 얼마나 필요한가?”“90명이면 족합니다.”

수도로 돌아간 부량은 빠르게 준비를 진행했다. 심지어 유유에게 제위를 넘긴다는 선양의 조서를 진 공제에게 베껴 쓰게 하기도 했다. 공제는 의외로 선뜻 쓰겠다고 했다. 그리고 곁에 있던 사람에게 말했다.

“환현 이후, 우리 진 왕조는 이미 망했다. 단지 송왕에 의지해 20년 가까이 더 이어져왔을 뿐이다. 오늘의 일은 짐이 기꺼이 원하는 바이다.”

서기 420년 6월, 유유는 황제로 즉위했고 국호는 송이었다.22

남조가 시작되었다.

3-3 내부투쟁

유유의 성공은 음미해볼 만하다.

유유는 동진을 찬탈하려 한 첫 번째 인물은 아니었다. 그 전의 왕돈과 환온이 그보다 조건이 좋았지만 성공을 눈앞에 둔 채 아쉽게 삶을 마감했고 환현은 중간에 사람들에게 지탄과 배척을 받는 신세가 되었다. 그런데 출신이 미천했던 유유는 민간에서 부상해 혼란이 끝난 뒤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이것은 또 어찌된 일이었을까?

시대 추세와 정치 때문이었다.

삼국시대가 영웅의 시대였고 위진시대가 사족의 무대였다고 한다면, 동진 말엽이 되어서는 시대는 더 이상 영웅을 만들지 못했고 사족도 전망이 어두웠다. 영웅이 떠난 무대는 건달이 점령했고 사족이 역할을 마치자 부랑자가 득세했다. 그래서 유유의 송과, 그 뒤의 제, 양은 기구하고 피비린내 나는 운명 속에서 연이어 살인사건을 겪었다.

살육은 건국 초부터 시작되었다.

첫 피살자는 진 공제였고 피살 시점은 그가 유유에게 제위를 선양한 지 1년 반 뒤였다. 그는 동진, 송, 제, 양의 제위를 물려준 황제들 중 가장 오래 살았다. 하지만 그것은 절대 유유가 자비로워서가 아니라 그의 방비가 철통같아서였다. 그는 매일 자신의 황후와 같은 방을 썼고 음식도 그녀가 손수 침대 앞에서 요리한 것만 먹었다. 이 가엾은 전임 황제는 사실상 죽은 것보다 못한 삶을 살고 있었다.

하지만 유유는 더 기다려줄 마음이 없었다. 황후의 두 오빠를 시켜 그녀가 자리를 비우게 하자, 자객들이 담을 넘어 들어가 독약을 먹으라고 강요했다. 공제는 불교도가 자살을 하면 내세에 사람으로 태어날 수 없다고 소리쳤다. 결국 그들은 이불을 이용해 그를 질식사시켰다.23

이어서 피살된 사람은 유유 자신의 아들인 소제少帝 유의부劉義符였다. 그 젊은 황제는 정상적으로 제위를 계승한 지 2년 만에 유유가 생전에 유언의 실행을 맡긴 서선지 徐羨之, 부량 등의 대신들에 의해 살해되었고 당시 19세였다. 이와 동시에 그의 동생인 여릉왕廬陵王 유의진劉義眞도 18세의 나이에 피살되었다. 결국 유유의 셋째 아들인 의도왕宜都王 유의륭劉義隆이 제위를 이어 송 문제가 되었다.24

쿠데타를 일으킨 서선지와 부량도 끝이 좋지는 못했다. 유의륭을 황제로 옹립할 때 서선지는 부량에게 물었다.

“의도왕은 누구와 비견될 수 있소?”“진 문제(사마소)보다 낫지요.”“그러면 우리의 충심을 알아주겠군.”“꼭 그렇지는 않을 겁니다.”

과연 1년여가 흐른 뒤, 유의륭은 조서를 내려 살인죄로 서선지와 부량에게 사형을 판결했다. 이에 서선지는 자살했고 부량은 체포되었다. 유의륭의 조서를 읽고서 부량은 여덟 글자를 남겼다.

“죄를 씌우려고 하면 어디 구실이 없겠는가.”(欲加之罪, 何患無辭)25

2대에 걸쳐 황제를 옹립한 부량은 이렇게 토사구팽을 당했다.유유에게 양위한 진 공제가 죽고 유유의 아들인 유의부와 유의진도 죽었으며 유의부와 유의진을 죽인 서선지와 부량도 죽었다. 이번에는 30년간 황제로 지낸 유의륭의 차례가 되었다.

송 문제 유의륭은 뛰어난 군주였다. 원가의 치는 그에 의해 실현되었다. 그는 심지어 북벌전쟁을 일으켜 북위의 수중에서 중원 땅을 되찾으려 시도하기도 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의 적수는 태무제 탁발도였다. 결국 북위의 대군이 파죽지세로 양자강까지 쳐들어왔다. 만약 나중에 탁발도가 갑자기 철군하지 않았다면 유송은 거의 멸망에 이르렀을 것이다(본서 제2장을 참고).

유의륭은 탁발도의 예봉을 피하기는 했지만 아들의 칼에 목숨을 잃었다. 탁발도가 환관에 피살된 그 이듬해(서기 453년), 송나라 태자 유소劉劭가 쿠데타를 일으켰다. 당시 유의륭은 심복인 대신과 새벽까지 은밀히 태자 퇴출을 의논하고 있었다. 태자의 군사가 궁 안에 난입하자 유의륭은 엉겁결에 탁자를 들어 막았다. 하지만 결국 열손가락이 다 잘리고 바닥에 쓰러져 사망했다. 그때 그의 나이는 47세였다.

그 전해에 피살된 탁발도는 45세였다.

당시 궁중의 분위기는 틀림없이 무척 긴장되었을 것이다. 대신과 밀담을 나누기 전에 유의륭은 엿듣는 사람이 있을까봐 그에게 촛불을 들고 사방을 살피게 했을 것이다. 하지만 비밀을 누설시킨 사람은 다름 아닌 바로 그 자신이었다. 왜 그랬는지는 몰라도 유의륭은 태자를 퇴출하겠다는 생각을 반숙비潘淑妃에게 말했고 반숙비는 또 자기 아들인 유준劉濬에게 말했다. 유준은 본래 유소와 한패여서 당연히 그 일을 유소에게 알려주었다. 막다른 골목에 몰린 태자 유소는 어쩔 수 없이 위험을 무릅쓰고 거사를 단행했다.26

부황을 죽인 유소도 마찬가지로 긴장이 됐을 것이다. 그는 서둘러 황제 즉위를 선포한 뒤 궁중에 숨어 지냈다. 밤에 잘 때도 손에서 칼을 놓지 않았으며 침대 가에 줄줄이 등불을 켜놓았다. 유소는 자신의 쿠데타가 민심을 얻지 못하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더구나 바깥에는 아직 셋째 동생인 무릉왕武陵王 유준劉駿이 있었다. 강주자사江州刺史로서 유준은 수중에 병권을 쥐고 있었다.27

유소는 유준을 죽이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천만뜻밖에도 그가 유준에게 사형을 선고하기 위해 파견한 관원이 그를 배반하고 유준에게 붙는 바람에 내전이 개시되었으며 금세 승부가 가려졌다. 결국 유준劉駿이 송 황실의 새 주인 자리를 차지해 효무제孝武帝가 되었다. 그리고 유소와 유준劉濬은 형장의 이슬이 되어 살인범으로 사서에 이름이 올라갔다.

여기에서 몇 가지 세부사항은 깊이 새겨볼 만한 가치가 있다.유소는 우물 속에 숨었다가 붙잡혔고 유준은 도망치던 길에 숙부인 강하왕江夏王 유의공劉義恭에게 투항했다. 붙잡힌 유소는 황제의 위엄 따위는 모두 잊은 채 공손하게 물었다.

“천자는 어디 계시죠?”

그를 붙잡은 사람이 답했다.

“바로 근처에 계십니다.”“유배형에 처해달라고 대신 상주해주실 수 있습니까?”“황상이 알아서 처분하실 겁니다.”

유소는 할 수 없이 하늘에 운명을 맡겼다.

유소와 달리 유준劉濬은 동생인 유준劉駿을 천자라 부르지 않고 예전의 관직인 남중랑장南中郎將이라 불렀으며 자기 자신은 아명인 호두虎頭라 칭했다. 아마도 그는 골육의 정에 희망을 걸고 동생이 빠져나갈 길을 줄 것이라고 꿈꿨던 것 같다.

유준은 숙부 강하왕에게 물었다.

“남중랑장은 지금 뭘 하고 있습니까?”“천하에 군림하고 계시지.”

유준은 또 물었다.

“이 호두는 늦은 겁니까?”“아마도 너무 늦은 것 같구나.”“그래도 죽지는 않겠죠?”“우선 가서 사죄를 해보자.”“미관말직이라도 받아 공을 세워 죄를 씻으면 안 될까요?”“그건 나도 잘 모르겠구나.”

사실 새 황제는 두 형에게 살 길을 열어줄 마음이 전혀 없었다. 형수와 조카들까지 참수하여 그 뼛가루를 양자강에 버리게 했다. 일설에 따르면 형을 집행하기 전에 유소의 은殷 황후가 집행관에게 한스러운 말투로 물었다고 한다.

“유씨 집안의 골육상쟁에 왜 무고한 내가 연루되어야 하느냐?”“황후셨는데 어떻게 무고하다 하십니까?”“이럴 줄 알았으면 다른 사람에게 황후를 시켰을 것이다.”28

안타깝게도 그것은 그녀나 다른 사람의 뜻대로 될 수 있었던 일이 아니었다.

시기와 악의가 마치 바이러스처럼 유송에 퍼졌다. 효무제 유준, 전폐제前廢帝 유자업劉子業, 명황제明皇帝 유욱劉彧, 후폐제後廢帝 유욱劉昱은 하나같이 살인광이었고 종실의 반란도 여기저기서 이어졌다. 개국황제 유유의 아들 9명과 손자 40여 명, 6, 70명의 증손자 중에서 7, 80퍼센트가 제명에 살지 못했다.29결국 유송의 정권은 그닥 시기를 받을 일이 없었던 평범한 장수 소도성에게 넘어갔다. 서기 479년, 북위의 풍 태후가 정치 개혁을 시작하고 서로마제국이 멸망한 지 3년이 지난 그해에 순제順帝 유준劉准은 선양을 강요받았다. 소도성은 칭제를 하고 국호를 제로 바꿨으니 이것이 바로 남제이다.

퇴위한 순제는 그 다음 달에 피살되었다. 그는 양위를 강요받을 때 이미 그것을 예상했다. 그 어린 황제는 당시 기껏해야 13세에 불과했지만 제위를 넘기면 무슨 일이 생길지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전례를 거행하던 날, 그는 불당의 보개(寶蓋. 절이나 천자의 의례에 쓰이는 큰 햇빛가리개) 아래에 숨어 필사적으로 안 나오려 했다. 이윽고 억지로 끌려 나오고 나서는 눈물을 훔치며 말했다.

“내생에는 제왕의 가문에서 태어나고 싶지 않아.”30

물론 그것도 그의 뜻대로 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제 고제高帝 소도성은 웬일로 교훈을 얻어, 자기 아들인 제 무제와 함께 종실을 잘 대했고 남제에도 영명의 치가 도래하였다. 하지만 제 명제 때부터 악몽이 다시 시작되었다. 전임 황제와 종실의 여러 왕들이 그에게 도살되었고 그 결과, 남제는 겨우 24년 만에 남량으로 바뀌었다.

남제를 전복시킨 사람은 양 무제 소연이었다. 그에게 제위를 내준 사람은 제 명제의 8번째 아들인 화제和帝 소보융蕭寶融이었다. 그때 15세의 어린 황제는 금을 삼키고 자살하라는 요구를 거절했다. 대신 자기가 술을 마시고 의식을 잃었을 때 어떤 방식으로든 죽여달라고 했다.31

양 무제는 매우 만족했다. 물론 그는 47년 뒤 자신도 비명에 죽으리라는 것을, 그것도 더 억울하게 죽으리라는 것을 알지 못했다.

3-4 양 무제의 죽음

양 무제는 극도의 분노로 인해 죽었다.

그날은 태청太淸 3년(서기 549년) 5월 2일이었다. 그때 소연은 이미 궁중에 연금된 채 푸대접을 받는 병자였다. 따가운 햇볕과 무더위가 극성을 부려, 병상에 누워 있던 그는 몹시 꿀물을 마시고 싶었지만 구할 방도가 없었다. 그래서 두 마디 “헉, 헉” 소리만 남긴 채 86세 고령의 양 무제는 외롭고 처량하게 이 세상을 떠났다.

황태자는 소식을 듣고 눈물을 철철 흘렸지만 감히 곡소리를 내지 못했다.32

그렇다. 소연 부자는 둘 다 겉만 그럴싸한 죄수였던 것이다. 그들은 황제와 태자의 신분을 유지하고 있는 것 외에는 돈도 무기도 없었다.

그들의 운명을 틀어쥐고 있었던 이는 후경侯景이었다.

후경은 본래 북방에서 반란을 일으키고 남조로 도망쳐온 인물이었다. 그전에, 나라를 세운 지 150년이 지난 북위는 로마제국처럼 동서 양국으로 나뉘어 있었다. 서위는 수도가 장안이었고 실제 집권자는 한화된 선비족, 우문태宇文泰였다. 그리고 동위의 수도는 업성鄴城(지금의 허베이성 린장臨漳)이었으며 실제 집권자는 선비화된 한족, 고환高歡이었다.

물론 서위와 동위는 모두 명목상으로는 선비족 탁발부의 정권이었다.

선비화된 갈인 후경은 한때 고환의 부하였지만, 고환이 죽은 뒤 계승자인 고징高澄과 반목하여 황하 이남 13주의 토지를 갖고 양 무제에게 투항했다. 양 무제는 이것이 하늘이 내려준 선물이라고 생각했지만 뜻밖에도 서위가 혼란을 틈타 후경의 근거지를 점령했고 남량의 원군은 동위의 공격에 참패를 당했다. 어쩔 수 없이 양 무제는 동위와 화의를 맺어야 했다.

동위의 조건은 당연히 후경을 내놓는 것이었다.

그것은 후경을 사지로 내모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와 동시에 후경도 남량의 부패와 무능을 간파했다. 어쨌든 죽는 길만 남게 된 그는 창끝을 돌려 건강을 습격했다. 그리고 서고트족과 반달족이 로마를 약탈했을 때처럼 남량의 그 수도를 함락시키고 수많은 사람을 학살한 뒤, 마지막에는 대성臺城까지 공략해 들어갔다.

대성은 지금의 난징시 쉬안우구玄武區에 있었으며 동진과 남조의 황궁 및 정부의 소재지로서 수도 건강의 성 안의 성이었다. 당시 중앙정부가 상서대尙書臺라고 불려서 대성이라 불렸다. 다시 말해 당시 남량의 수도에서 바깥 둘레는 경성京城이고 한가운데는 대성이었다. 건강성이 무너졌지만 중앙정부는 아직 멀쩡했다. 만약 대성마저 무너지면 황제와 황태자는 속수무책으로 붙들릴 수밖에 없었다.

후경과 양 무제는 결국 서로 얼굴을 마주했다.

그런데 그 전쟁은 어쨌든 두 나라 사이의 교전이 아니었다. 또한 후경은 자기가 반란을 일으켰다고 생각하지 않았고 양 무제도 자기가 패한 군대의 수장이자 망국의 군주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들의 만남은 역시 군신의 예를 따랐으며 후경은 심지어 자기가 간신의 박해를 받는 바람에 부득이 황제를 놀라게 하여 특별히 사죄를 하러 왔다고 표명했다.

그의 등 뒤에는 갑옷을 입은 5백 명의 호위무사가 서 있었다.

사실상 이미 전쟁 포로가 된 양 무제는 그래도 침착했다. 그는 매우 담담하게 말했다.

“먼 길을 오느라 수고가 많았네.”

후경은 등에 땀이 흘렀고 감히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그래서 양 무제가 물었다.

“경은 어디 사람이며 왜 이렇게 대담한 것인가? 경의 아내와 자식은 아직 북방에 있는가?”

후경은 이번에도 감히 대답을 하지 못했다.

옆에 있던 자가 부득이 그를 대신해 답했다.

“신하 후경은 온 가족이 고징에게 몰살을 당해 단신으로 폐하께 귀순을 하였습니다.”

양 무제가 또 물었다.

“처음 강을 건넜을 때 자네에게는 몇 명이 있었나?”

후경이 답했다.

“천 명이 있었습니다.”“대성을 포위했을 때는 또 몇 명이 있었나?”“십만 명이 있었습니다.”“그러면 지금은 몇 명인가?”“온 나라 사람이 다 제 사람입니다.”

양 무제는 고개를 떨궜다.33

그것은 정말 극적인 일이었고 그런 극적인 성격은 사실 역사 그 자체의 속성이다. 그렇다. 벼랑 끝에 몰린 후경은 겨우 천 명을 데리고 강을 건너왔다. 그런데 오합지졸인 그 망명군이 어떻게 일거에 한 왕조를 전복시킨 걸까?

직접적인 원인은 내부의 첩자였다.

첩자의 이름은 소정덕蕭正德이었다. 그는 양 무제의 조카였고 한때는 양자이기도 했다. 양 무제에게 진짜 아들이 생긴 뒤, 소정덕은 황태자가 될 가능성을 잃고 마음속에 한을 품었다. 그래서 남량의 황제로 세워주겠다는 후경의 제의에 넘어가 건강의 성문을 열어주었다.34

하지만 그것은 여러 원인 중 하나였을 뿐이다. 사실 후경의 기병부터 대성의 함락까지는 약 반년이 소요되었다. 그렇게 긴 시간 동안 수도가 포위되고 황제와 황태자가 억류되는 과정에서 설마 구원해주러 온 사람이 아무도 없었을까?

당연히 있었다. 소릉왕劭陵王 소륜蕭綸(양 무제의 6번째 아들), 상동왕湘東王 소역蕭繹(양 무제의 7번째 아들), 사주자사司州刺史 유중례柳仲禮 등이 군대를 이끌고 황제를 지키러 달려왔다. 그런데 어떻게 되었을까? 강 건너 불구경하듯 꼼짝도 하지 않았다. 심지어 성 안에서 아사자가 속출하는데도 그들은 성 밖에서 기생을 껴안고 술을 마셨다.

그 꼴을 보고 많은 이들이 애를 태웠지만 아무도 그들을 움직이지 못했다. 소릉왕 소륜은 전혀 그들의 권유에 따르지 않았고 유중례는 부친인 유진柳津의 말조차 듣지 않았다. 당시 대성에 갇혀 있던 유진은 성루에 올라 자기 아들을 향해 외쳤다.

“임금과 아버지가 어려움에 처해 있는데도 구하지 않으면 후손들이 너를 어떻게 보겠느냐?”

그래도 유중례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유진은 소득 없이 궁중으로 돌아가야 했다. 그리고 자신에게 대책을 묻는 양 무제에게 비분강개하여 말했다.

“폐하에게는 소릉왕이 있고 소신에게는 유중례가 있지만 모두 불충불효하니 반적을 어떻게 평정할 수 있겠습니까?”36

결국 대성을 지키던 수비대장에게 기대를 걸 수밖에 없었다.

수비대장 소견蕭堅은 소릉왕 소륜의 세자였다. 그런데 이 왕족 나리는 전형적인 식충이였다. 당시 후경이 현무호玄武湖의 물을 끌어다 성에 퍼부으며 주야로 공격을 하는데도 그는 술독에 빠져 전혀 군대와 백성들을 돌보지 않았다. 결국 한 부하가 참다못해 새벽에 밧줄을 내려 후경의 군사들을 성 안으로 끌어들였다.

그래서 대성은 함락되었고 소견도 목이 날아갔다.

적군이 성으로 난입하자 다른 사람들도 버텨내지 못했다. 소견의 동생 소확蕭確은 용감하고 지략을 갖춘 인물이었지만 역시 패배를 막을 수는 없었다. 그는 궁으로 달려가 대성이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전했다.

양 무제가 침상에 누운 채 담담하게 물었다.

“더 싸울 수 있는가?”

소확이 말했다.

“불가합니다.”

양 무제는 탄식하며 말했다.

“알겠다. 그대는 어서 성을 나가 그대의 부친에게 고하라. 나와 태자는 염려하지 말라고. 대량大梁의 강산은 내가 얻은 것인데 또 내가 잃게 되었으니 별로 유감스러운 것은 없다.”37

그것은 아마도 진심이었을 것이다, 아마도. 어쨌든 그전의 남제는 겨우 24년 만에 망했는데 양 무제의 재위 기간은 그 2배인 48년이었으니 그것만으로도 확실히 죽어도 여한이 없을 만했다.

3-5 더 이상 나쁠 수는 없었다

양 무제는 죽어서도 눈을 못 감았을 것이다.

양 무제가 무능한 군주였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는 부지런해서 한겨울에도 새벽부터 일어나 업무를 보았다. 또 소박해서 술과 고기를 즐기지 않고 매일 채식으로만 한 끼를 먹었으며, 절약도 생활화하여 모자 하나를 3년 동안 쓰고 이불 한 채를 2년 동안 덮었다. 게다가 겸손해서 환관을 대할 때도 예의를 갖췄고, 자제력도 강하여 50세 이후로는 성생활을 안 하고 그야말로 고행승처럼 지냈다.

역사적으로 이렇게 금욕적인 훌륭한 황제가 있었을까?

없었다.

양 무제는 심지어 인자한 군주이기도 했다. 일반 백성이 죽을죄를 지으면 늘 한바탕 통곡을 하고 형 집행을 명했으며 왕족과 귀족이 불법을 저지르면 불러서 꾸짖기만 하고 없던 일로 해주었다. 소정덕만 해도 일찍이 모반하고 북위로 도망친 적이 있었지만 그가 다시 돌아왔을 때 계속 서풍후西豊侯의 작위를 유지하게 해주었다.

그는 황제라기보다는 그야말로 보살 같은 인물이었다.

그러나 소정덕은 은혜를 갚기는커녕 양 무제의 제위와 목숨을 요구했다. 대성이 무너진 뒤 그가 가장 먼저 하려고 했던 일은 직접 칼을 들고 양 무제와 황태자를 죽이는 것이었다. 만약 후경이 미리 병사를 보내 궁문을 지키게 하지 않았다면 그 두 사람은 목숨을 잃었을 것이다.39

그런데 금수보다 못한 자는 소정덕만이 아니었다. 후경이 대성에 진입한 뒤, 황제를 구하겠다고 온 연합군은 알아서 흩어졌고 총사령관 유중례는 후경에게 투항하기까지 했다. 심지어 그는 대성에 들어와서 먼저 후경에게 인사를 한 뒤에야 황제를 알현하여 그의 아버지를 통곡하게 만들었다.

“너는 내 아들이 아니다, 너는 내 아들이 아니야! 왜 굳이 수고롭게 나를 보러 왔느냐!”40

이 모든 것을 양 무제는 일찍이 예상한 적이 있었을까?

당연히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사실 양 무제는 오랫동안 평화롭게 통치할 수 있기를 바랐다. 게다가 송과 제, 제와 양의 두 차례에 걸친 왕조 교체를 직접 겪었기에 그는 매우 용의주도하게 나라를 다스렸다. 소정덕 같은 인간쓰레기를 지나칠 정도로 너그럽게 용인했던 것도 내분으로 무너진 전 왕조들의 전철을 다시 밟지 않기 위해서였다. 적어도 그런 나쁜 상황이 연출되는 것은 원치 않았다.

하지만 결과는 훨씬 더 나빴다.

사실 대성이 포위되었을 때 각 제후들이 꼼짝도 않고 방관만 했던 것은 일종의 차도살인借刀殺人을 노렸기 때문이었다. 후경과 양 무제가 싸워 양쪽 다 치명적인 피해를 입으면 앉아서 어부지리를 취하려 했다. 이처럼 그들의 마음속에는 아예 황제와 부친이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대성이 무너지자마자 그들은 뿔뿔이 흩어졌고, 또 무제의 시신이 식기도 전에 그들은 형제끼리 아귀다툼을 벌였다. 이것은 사실 송나라와 제나라의 비극이 재연된 것에 불과했지만, 더 나쁘게는 외적과 내통하여 그들을 집안으로 끌어들이는 일도 생겼다. 소정덕은 후경에게, 무제의 손자인 소찰蕭詧은 서위에 빌붙었으며 소륜은 동위를 대신한 북제에, 소역은 서위와 북제에 차례로 빌붙었다.

그래서 남량이 후경을 한왕漢王에 봉했을 때(서기 550년) 북제와 서위도 각기 소륜과 소찰을 양왕(梁王)에 봉했다. 그 이듬해에 북제는 또 소역을 양상국梁相國에 봉했다. 다시 말해 경쟁자를 없애기 위해 무제의 자손들은 앞 다퉈 북방의 ‘오랑캐’들에게 고개를 숙이고 그들의 신하가 되어 스스로 매국노가 된 것이었다.

남량도 결국 멸망했다.

사실상 무제가 죽자마자 남량은 멸망했다. 그 다음의 간문제簡文帝는 후경의 허수아비였고 양 원제元帝는 지방에 할거한 제후였으며 양 경제敬帝는 진陳 왕조 수립의 발판에 불과했다. 때가 되자 진패선은 그를 핍박해 선양을 하게 했다. 바꿔 말해 남량은 황제가 1명뿐이었으며 그 수명도 48년에 불과해서 송, 제와 마찬가지로 왕조 교체와, 평화와 혼란의 괴이한 순환을 벗어나지 못했다.

이것은 당연히 성찰해볼 만한 가치가 있다.

성찰은 유유로부터 시작해보자. 유유는 미천한 서족 출신의 군인 신분으로 사족계급의 동진을 전복시켰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새 정권을 위해 세 가지 원칙을 세웠다. 황권을 강화해야 하고, 천하는 여럿이 함께 통치해서는 안 되고, 사족은 배제해야 했다. 또한 그래서 송과 제, 두 왕조는 서족을 대거 기용해 중앙의 요직을 맡겼으며 지방의 군사 요새와 군사권은 번왕藩王으로 봉해진 황족에게 넘겼다.

다시 말해 요직은 서족이, 군권은 황제의 종실이 장악했다.41

그 결과는 어땠을까?

집안싸움으로 내란이 잇달아 왕조가 무너졌다.

양 무제는 전 왕조들의 실패를 교훈 삼아 정책을 조정했다. 한편으로는 사족의 사회적 지위를 회복시켰는데, 이부吏部에서는 심지어 󰡔백가보百家譜󰡕에 기재된 명망가의 기록을 보고 사족들에게 고급 관직을 수여했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능력을 갖춘 서족을 계속 임용해 실제 업무를 처리하게 했다. 마지막으로 종실인 제후들은 더더욱 지방의 실권파가 되어서 송, 제 때처럼 남의 감시를 받는 일이 없어졌다.42

양 무제는 이렇게 하면 황족, 사족, 서족의 관계가 잘 세워져 정치세력의 균형과 견제가 실현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아가 그 세 세력이 세 개의 기둥으로 거대한 제국을 지탱해줄 수 있기를 바랐다.

그러나 이런 그의 꿈은 수포로 돌아갔다.

우선 사족은 동진 말엽에 이미 부패한 계급이 되었고 그 후에는 송, 제, 두 왕조에 걸쳐 80년 넘게 압제를 받았다. 그런 세력이 어떻게 위진 시대의 위풍을 되살릴 수 있었겠는가? 그들은 과거의 문화재처럼 다시 끄집어내져 아마도 더 빨리 부패했을 것이다. 건강령建康令 왕복王復 같은 사람은 말조차 몰라보고 놀라서 호랑이라고 할 정도로 세상물정을 몰랐다. 이런 자들에 의지해 나라를 지키는 것이 어떻게 가능했겠는가?43

황족도 변변치 않기는 마찬가지였다. 하나같이 바깥싸움에는 무능하고 집안싸움에만 능했을 뿐더러 극도로 사치스럽고 온갖 나쁜 짓을 자행했다. 양 무제의 6번째 동생이자 소정덕의 부친이었던 소굉蕭宏은 심지어 무제의 딸이자 자신의 조카딸인 여자와 정을 통하고 몰래 제위까지 찬탈하려 했다. 이런 자들에게 어떻게 의지할 수 있었겠는가?44

의지할 수 있는 자들은 서족뿐이었다.

그러나 서족도 그 안에 옥석이 뒤섞여 있었을 뿐더러 하나같이 다 군자여도 사회의 인정을 받기가 어려웠다. 어쨌든 문벌제도는 위진 시대에 이미 100년 넘게 시행되어서 사족은 여전히 영향력이 남아 있었다. 게다가 양 무제가 또 그들을 중용하는 바람에 서족은 중견 세력이 되기가 더더욱 어려워졌다.

더 중요한 것은 한나라 말부터 중국사회에서 핵심 가치가 사라지고 문벌 관념만 남은 것이었다(󰡔이중톈중국사 11권⋅위진풍도󰡕를 참고). 만약 그것까지 폐지되면 무엇으로 그 공백을 채운단 말인가?

양 무제는 그 점에 주목했다.

그가 생각해낸 방법은 3가지였다. 국학을 일으키고, 덕치를 행하고, 불교를 숭상하는 것이었다.

국학은 남량에서 사실 유학 혹은 태학太學이었다. 무제는 새롭게 유가의 오경五經을 위해 오관五館을 설립했다. 오관은 오경박사가 강의를 하는 곳이자 관리 후보들이 시험을 치는 곳이었다. 누구든 시험만 통과하면 출신과 상관없이 관직을 얻을 수 있었다. 실제로 오관의 생원生員들은 미천한 가문의 자제들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에 이것은 사실상 수당 과거제도의 전신이었다.46

아마도 이것이 양 무제 소연의 정치에서 가장 뛰어난 업적일 것이다.

하지만 그의 덕치는 완전히 실패로 돌아갔다. 소굉을 예로 들면 언젠가 그의 집에 100칸짜리 창고가 있고 거기에 무기가 숨겨져 있다는 제보가 들어왔다. 이에 양 무제가 친히 가서 살펴보니 창고 안에 쌓인 것은 무기가 아니라 금은보화였다. 그중 돈만 해도 30칸이었는데 1칸에 천만씩 모두 3억이었다. 이를 보고 양 무제는 마음을 놓고서 흥미로운 듯 소굉에게 말했다.

“여섯째야, 너는 사는 데는 문제가 없겠구나!”47

이것이 무슨 덕치이고 덕육(德育. 도덕교육)이란 말인가?

사실 소굉의 창고를 채우고 있었던 것은 전부 백성들의 고혈이었고 이것을 몰랐던 사람은 없었을 것이다. 후경은 대성을 포위했을 때 책사를 시켜 전단지를 쓰게 하여 성 안에 뿌리게 했다. 그 전단지에는 이런 말이 씌어져 있었다.

“양나라의 왕공귀족들이 어떻게 살았는지 모두 보라! 그놈들은 일도 안 하면서 호의호식을 했다. 만약 백성들에게 갈취를 안 했다면 그놈들의 재산이 어디서 생겼겠는가?”

후경도 나쁜 놈이기는 했지만 전혀 틀린 말이 아니었다.

이제 돌아보면 양 무제가 성실하고 소박했다는 것은 틀림없이 조작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런 조작은 꼭 그 자신이 행했다기보다는 체제적인 차원에서 행해졌을 것이다. 또한 그가 덕으로 나라를 다스렸다는 것 역시 실상은 체제적 성격의 조작이었기에 그의 목숨이 위태로울 때도 아무도 그를 구하려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가 자신을 도덕적인 모범으로 빚어냈는데도 말이다.국학과 덕치가 양나라를 구할 수 있었을까? 그것은 한낱 백일몽이었다.

이제 구국의 방법은 단 하나, 종교만 남았다. 종교는 남북조의 큰 문제였으며 양 무제는 그것과 관련된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이른바 “남북조에 480곳의 사원이 있었다”는 말은 그와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 더구나 다름 아닌 종교는 제1제국과 제2제국, 다시 말해 진한 문명과 수당 문명의 차이를 가장 극명하게 구현한 문제여서 중국사가 절대로 피해갈 수 없다

<이중텐중국사 12 남북조 > 번역: 김택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