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보논어 – 시작

팔보가 드디어 미쳤나보다.
자기 이름 걸고 책을 하나 쓰겠다 하더니, 우스꽝스러운 자호 ‘팔보’ 뒤에 언감생심 위대한 고전 <논어>를 갖다붙여 <팔보논어>라고 했다는 것이다. <논어>와 유림에 대하여 이만한 모독도 없으니, 1-2세기만 앞서 이런 짓을 했어도 삼족이 멸하는 화를 벗어날 수 없었을 것이다.
어쨌거나 저쨌거나 이렇게 시작했으니, <논어>의 대화체 형식을 빌어서 동기와 취지를 적어본다. 이후의 대화는 실제 주고받은 것이라는 설도 있고, 순전히 팔보의 날조와 조작이라는 설도 있다. 허나 그게 무어 그리 중요하랴! 다만, 실제 주고받은 대화라도 실명을 거론하기가 뭐하여 패러디 작명한 경우도 있고, 가상의 인물과 대화를 설정한 경우도 있고, 한 마디로 뒤죽박죽이란 것만 밝혀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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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희가 물었다. “선생님, 이번에 내시는 책 이름이 왜 <팔보논어>입니까?”
팔보가 말했다. “말을 하자면 좀 길다.”
안희가 말했다. “평소 선생님께서는 말이 많은 것을 싫어하시지 않았습니까?”
팔보가 말했다. “그래. <논어>에서도 ‘강의목눌’이라고 하였듯, 나는 말을 잘 하지도 못하고, 말 많은 것을 좋아하지도 않는다. 그런데 책 이름을 <팔보논어>로 정한 이유는 간단히 말하기가 쉽지 않구나.”
“그만큼 심오하다는 말씀입니까?”
“아니, 아니, 아니다. 그 반대다. 진리는 간명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오히려 핑계와 구실이 많을수록 말이 길어진다. 이왕 이리 되었으니, 내가 책 이름을 <팔보논어>라고 정한 핑계와 구실을 늘어놓지 않을 수 없구나.”
“그러면 어디 들어보겠습니다.”
“나도 이제 퇴직이 멀지 않았다. 나는 평소 거창하게 무언가를 정리한다느니 회고한다느니 갖다붙이는 걸 꼴같지 않게 생각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30여년 몸담았던 길을 떠날 날이 다가오니 어떻게든 정리는 하고 싶었다. 결국 나도 이렇게 꼴같지 않은 짓을 더하게 되었음을 생각하니, 세상사 함부로 비난할 일이 아니라는 것을 절감하게 된다. ‘너도 늙어봐라’라는 말이 괜히 나오는 게 아닌 것이다.”
“사실 저도…”
“내 얘기 아직 덜 끝났다. 좀 더 들어봐라.”
“아, 예.”
“공자가 세상을 떠난 이후 제자들이 모여 공자의 언행을 회상하면서 정리한 것을 기록으로 남긴 것이 <논어>이다. 나는 공자같은 훌륭한 선생이 못되니, 내가 죽은 이후 제자들이 모여 나에 대한 기록을 남길 리 없다. 그래서 내가 스스로 정리하려는 것이다.”
“저희를 너무 무시하시는 말씀 아닌가요?”
“어허 무슨 소리냐? 전혀 그렇지 않다. 너희를 무시하는 게 결코 아니다. 내가 별볼일없는 선생이라는 뜻이니라. 사실 굳이 정리할 것이 있는지조차 모르겠다. 아무것도 아닌 것에 ‘논어’라는 말만 붙여 천리마 꼬리에 붙어 천리를 가려는 파리처럼 득을 보려는 수작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면 <팔보논어>는 선생님께서 <논어>를 해석하신 것인가요?”
“그렇게 오해할 우려가 있는데, 아니다. <논어>를 해석한 책은 행성비라는 출판사에서 <처음 읽는 논어>라는 이름으로 낸 바 있다. 비록 <논어> 전체를 해석한 것은 아니지만, 중요한 것은 거의 들어갔으니, 어디 가서 <논어> 읽었다고 행세하기에 모자라지는 않다. <팔보논어>는 <논어> 형식을 빌어 나의 생활과 생각을 정리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짝퉁 <논어>인 셈이다.”
“그런데 이렇게 이름을 붙여도 되나요?”
“중국문학사라는 수업 시간에 이 대목을 얘기할 때 네가 엄청 졸았던 모양이구나. 예로부터 유명한 작품이 세상에 나오면 그걸 본뜬 아류가 등장했었다. 가방, 복장 등에만 짝퉁이 있는 게 아니다. 세상 무엇이든 명품이 나오면 짝퉁도 나오는 법이다. 고상한 말로는 ‘패러디’라고도 한다고 하더만, 하여튼 짝퉁은 막을 수가 없다.”
“선생님, 그런 걸 표절이라고 하지 않나요?”
“그런 말 나올 줄 알았다. 표절이라는 말만 들어도 머리가 아프다. 표절이란 것에 대해서는 따로 말할 기회가 있으면 말하겠고… 일단 패러디는 표절이 아니다.”
“알기 쉽게 설명해주세요.”
“표절은 도둑질이다. 도둑질은 어떻게 하느냐? 몰래 한다. 아무도 모르게 한다. 남의 것을 자기 것으로 둔갑시키는 것이다. 패러디는 대놓고 가져오는 것이다. 나는 이것을 갖다 쓴다고 누구나 눈치채게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패러디 대상은 일단 아주 유명해야 한다. 누가 봐도 알아챌 수 있을 만큼 유명해야 한다. 토크인지 개그인지 프로그램에서 누구 말투를 흉내내서 웃기는 개인기라는 것이 있지 않더냐? 누구나 다 아는 유명한 사람 말투를 흉내내다 보니, 너무 비슷해도 웃기고 안 비슷해도 웃기지 않더냐! 그게 바로 패러디의 효능이다.”
“근데 말이 너무 길어지는 것 같아요.”
“글쎄 말이다. 빨리 잘라야겠다.”
“얼마나 쓰려고 하시나요?”
“글쎄… 정해진 건 없고, 작정한 건 있다. 번호를 붙여서 305편까지만 쓸까 한다.”
“짝퉁이 너무 심한 거 아닌가요? 이건 또 <시경>을 본뜬 거잖아요?”
“그래 그게 어때서? <시경>에 시 305편이 수록되었다만, 305라는 숫자가 무슨 특별한 의미가 있다고 보느냐?”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나는 특별한 의미 없이 숫자 305를 빌려 쓰려 한다. 305라는 숫자는 의미를 부여하려면 부여할 수도 있고, 아니면 그냥 선별한 후의 숫자라고 본다. 그래, 휴일 빼고 어쩌고 한다면 1년 중의 날수이다. 나도 그런 의미이다. 이날 저날 빼고 하루 하나 쓰다 보면 1년에 305편 쯤 되지 않겠나 싶어서이다.”
“이쯤 되면 선생님 호가 왜 팔보인지 귀띔해주시면 안될까요?”
“나는 팔자걸음이 너무 심하다. 때로는 멀리서 내가 걸어오는 것을 보고 혹시 다리가 아픈 거냐고 묻는 사람이 있을 정도다. 그래서 나는 팔자걸음이 나의 아이콘이 될 수 있겠다 싶어서 자호를 팔보(八步)로 정하게 되었다. 유명 작가 염상섭이 늘 술을 마시고 비틀비틀 걷는다고 하여 자호를 횡보(橫步)라고 했다지 않더냐? 거기서도 힌트를 얻었다.”
“선생님은 주로 남 따라하기 스타일이시군요. 자기 나름대로의 창작을 하셔야죠.”
“안희야! 나는 창작할 재능은 타고나지 않았단다. 그저 이미 나온 좋은 것을 잘 익히고 정리하여 전해주는 것만 할 뿐이다. 그래서 공자도 ‘술이부작(述而不作)’이라고 했다고 나는 본다.”
“하여튼 앞으로 어떤 말씀을 하실지 기대 반 걱정 반입니다.”
“기대도 걱정도 칭찬도 비난도… 있을 수 있겠으나 내게는 상관없다. 새가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끼르륵 우는 것일 뿐이라고 봐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