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화작품 “개국대전” 수난사

그때 그곳, 1949년 10월 1일 천안문 성루 위, 중화인민공화국 개국선포식에 참석 후 사라진 사람들…

조지 오엘의 『1984』에 보면 ‘unperson’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소설 속 이른바 ‘Newspeak’라 불리는 신조어 가운데 하나지요. 숙청되고 처형되는 데 그치지 않고 지상에 존재했던 자취가 남김없이 지워져버린 자를 가리킵니다. 실제 역사 속에서 가장 유명한 사례는 스탈린 시대의 니콜라이 예조프인데, 대숙청을 실질적으로 지휘했었지만 그 뒤로 자신이 숙청 대상이 되어 처형당했지요. 이후, 스탈린의 최측근이었던 시절 함께 찍은 사진들에서 그의 모습은 모조리 사라져 버렸다고 합니다. (이런 책이 있네요. David King, The Commissar Vanishes: The Falsification of Photographs and Art in Stalin’s Russia, New York: Metropolitan Books, 1997)

중국에서 ‘개국대전(開國大典)’이라고 하면 통상 1949년 10월 1일 오후 세 시에 이루어진 중화인민공화국 건국선포식과 그에 이은 기념행사를 가리킵니다. 그리고 건국선포의 장면을 그린 둥시원(董希文, 1914-1973)의 유화작품 제목이기도 한데요. 중국 현대사의 대표적인 ‘unperson’들을 여기서 만나게 됩니다

1952년, 중국혁명박물관(현 중국국가박물관)은 중앙미술학원에 ‘개국대전’을 기념하는 대형 유화작품의 제작을 의뢰합니다. 중앙미술학원 측은 이를 당시 38세였던 젊은 화가 둥시원에게 맡기지요. 둥시원은 그 전에 그린 몇 점의 역사기록화를 통해 주목받고 있던 터였습니다. 국가적 사업을 위탁받은 둥시원은 기록 사진과 영상을 세심히 검토하고 행사장이었던 천안문 성루(城樓)와 광장을 여러 차례 답사하고 실측해 가면서 수없이 밑그림을 그렸다고 합니다. 그렇게 해서 완성된 것이 폭 405센티 높이 230센티의 거작인 <개국대전>입니다.

1953년 원본. 화면 중앙에는 건국을 선포하는 마오쩌둥(毛澤東) 중앙인민정부 주석이 그려져 있다. 제1열에 그려진 인물들은 6명의 중앙인민정부 부주석으로, 좌로부터 주더(朱德), 류사오치(劉少奇), 쑹칭링(宋慶齡), 리지선(李濟深), 장란(張瀾), 가오강(高崗)이다. 주더 뒤로는 저우언라이(周恩來) 정무원 총리, 저우언라이 뒤로는 린보취(林伯渠) 중앙인민정부 비서장이 그려져 있고, 쑹칭링 뒤로는 선쥔루(沈鈞儒) 최고인민법원장, 리지선 뒤로는 궈모뤄(郭沫若) 정무원 문화교육위원회 주임이 그려져 있다.

준비 기간이 길었던 데 비하면 구도와 색채 등에 대한 기본 방향이 정해지고 난 뒤 작품 자체는 두 달 여 만에 완성되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1953년에 완성된 이 작품은 마오쩌둥, 저우언라이 등 지도자들의 극찬을 받았습니다. 선배, 동료 미술가들도 단상의 주요 인사들과 광장의 인민 군중을 화면에 함께 집어넣은 구도, 그리고 전통 민간화를 계승한 색채감 등을 높이 평가했습니다. 마오쩌둥의 오른편으로 광장 쪽의 확 트인 공간을 표현하기 위해 기둥을 모두 생략해 버린 데 대해 ‘건축대사(建築大師)’ 량쓰청(梁思成)은 건축학적으로 보면 말도 안 되는 상황이지만 회화로 치면 절묘하기 그지없다고 찬탄했다고 합니다. 앞 시대에 그려진 기록화들의 풍격을 계승하고 완성했으며 이후 선전화의 풍격을 선도한 점에서 회화사적 의미를 갖는 그림이라고 하지요.

그런데, 여기서 따지려고 하는 것은 이 그림의 미적 가치는 아닙니다. 이 그림이 실제의 건국선포식 행사장을 얼마나 정확히 잘 재현했느냐, 혹은 왜 어떻게 나름대로 새롭게 구성했느냐를 따지려는 것도 아니구요. 이 그림이 세상에 나온 뒤 중국의 정치적 파란과 함께 겪었던 수난의 여정을 소개하려는 것입니다. 물론 이와 같은 수난은 이 그림이 당초 특정한 목적을 위해 무엇인가를 강조하고 무엇인가를 배제하며 그려진, 즉 정치적인 목적을 가지고 구성된 것이었다는 점과 깊은 연관이 있겠습니다.

‘개국대전’ 행사 사진을 보면 그림에 묘사된 것과는 달리 고위 인사들이 마오쩌둥을 더 가까이서 에워싸고 있었고 서 있는 위치도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첫 번째 수난은 완성되어 세상에 알려진지 얼마 되지 않아 찾아옵니다. 이 작품은 1953년 9월 27일에 『인민일보』에 게재되었고 인민미술출판사에서도 여러 크기로 복제해 다량으로 배포했습니다. 그런데 불과 2년 후, 둥시원은 온 세상 인민들이 어지간하면 다 봤을 이 그림을 고쳐 그리라는(!) 명령을 받게 됩니다. 바로 이 그림이 세상에 나온 그 해 말부터 세상을 떠들썩하게 하게 했던 ‘가오-라오 반당 연맹 사건’(高饒反黨聯盟事件) 때문이었습니다. <개국대전> 화면 상 제1열의 맨 오른쪽에 그려졌던 가오강(高崗)은 건국 당시 국가 부주석의 한 명이었고 사건 당시에도 최고위 당직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습니다. 이 사람이 역시 고위직에 있던 라오수스(饒漱石)와 결탁해 당권을 장악하려고 한 ‘음모’가 발각되었습니다. 조사과정에서 가오강은 자살을 했는데, 사후인 1954년에 당원자격까지 박탈당합니다. 둥시원이 그림을 고쳐 그리라고 명령 받은 게 바로 이듬해인 1955년입니다. 둥시원은 여러 차례 다른 화면에 연습을 한 뒤에 가오강을 지우고 그가 서 있던 자리의 상단은 푸른 하늘을 이어 그리고 아래쪽에는 꽃을 그려 넣습니다.

1955년, 가오강이 사라진 <건국대전>

다음 수난은 1970년에 닥칩니다. 문화대혁명이 시작되면서 당시 중앙인민정부의 주석이었던 류사오치(劉少奇)는 주자파(走資派)의 수괴로 몰리게 되었고 갖은 수모를 겪다가 1969년 11월 병사했는데, 건국을 기념해 그려진 이 그림에서 그를 지우라고 한 것입니다. 문혁 초기부터 반동적인 ‘학술권위’로 지목되어 고초를 겪던 둥시원은 암에 걸려 투병하고 있었습니다. 역시 미술에 종사하던 큰 아들이 대신 작업을 하겠다고 나섰지만 둥시원은 자신이 꼭 해야 한다고 하면서 부축을 받아가며 작업을 했다고 하지요. 그런데 가오강을 지울 때만큼 간단치 않았습니다. 여러 인물들 한 가운데 서 있던 류사오치를 쉽게 지워 없앨 수는 없었기 때문이지요. 둥시원은 고심 끝에 류사오치와 얼굴형이 비슷한 인물로, 원래는 주더와 저우언라이 사이에 얼굴의 사분 일 정도만 살짝 그려져 있던 당 원로 둥비우(董必武)를 류사오치 대신해 그려 넣습니다. 당시 둥시원은 언젠가 류사오치를 다시 그려 넣을 수 있길 희망하며 지인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전합니다. “예술을 하는 사람은 자기 작품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하지, 천년이라도 책임을 져야 해.”

1970년, 류사이오치 대신 둥비우를 그려 넣었다.

그런데 이것으로 끝이 아니었습니다. 1972년에 ‘중앙문혁소조’는 하방 되어 있던 중앙미술원 소속 교원 몇 명을 베이징으로 불러올려 주요 혁명기록화 작품을 시대상황에 맞춰 ‘쇄신’토록 합니다. 이미 두 차례 고쳐 그린 <개국대전>에 대해서도 그런 요구가 들어왔습니다. 구체적으로는 옌안(延安) 시절 마오쩌둥과 장칭(江靑)의 결합에 반대했으며 장칭의 정치 참여를 철저히 차단토록 했던 당 원로로 1960년에 이미 세상을 떠난 린보취를 지워버리란 요구가 있었다고 합니다. 화면 맨 왼쪽 저우언라이 뒤로 보이는 사람입니다. 둥시원은 병이 깊어져 또 다시 작업을 감당할 수 없는 상황이어서 상부는 그의 제자 진상이(靳尚誼)에게 작업을 명합니다. 당초 둥시원의 그림에서 린보취를 없애라고 했지만 진상이는 차마 스승의 그림에 손을 댈 수 없었다고 합니다. 이전에 고쳐 그려진 부분과 새롭게 요구받은 부분을 다 수용해 원본 크기로 복제해 그린다는 절충안을 내놓고 동료 자오이(趙域)와 각각 인물과 배경을 분담해 그림을 복제합니다. 이 와중에 둥시원은 1973년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림의 원모를 자신의 손으로 회복시켜 놓고 싶다는 희망을 이루지 못한 채로요. 린보취의 얼굴을 무명의 얼굴로 대체한 복제본은 1974년에 완성되었지만 공개되지는 않았습니다.

오른쪽 그림은 1974년, 린보취가 무명인으로 대체된 ‘복제본’ 부분.

1976년에 문혁이 종결되고 류사오치도 복권되면서 중국혁명박물관 측은 상부의 동의를 얻어 <개국대전>의 원모를 회복하기로 했습니다. 유족들은 원화에 다른 이가 다시 또 손을 대는 것을 바라지 않았습니다. 결국 진상이가 그린 복제본에 원본에서 지워버렸던 세 사람을 다시 그려넣기로 했습니다. 공무로 바빴던 진상이는 후배 화가들인 옌전둬(閻振鐸)와 예우린(葉武林)에게 작업을 맡깁니다.

자, 이렇게 사 반 세기의 곡절 끝에 원래 모습을 되찾았다고는 하지만, 결국 ‘제 모습’을 찾은 것은 복제본이었구요, 그나마 그것을 제 모습을 찾았다고 할 수 있는 건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 뒤로 한 동안 중국혁명박물관에 내걸려 있던 <개국대전>은 바로 이 ‘원모를 회복한 복제본’이었습니다. 중국혁명박물관이 중국국가박물관으로 개편되고 2011년에 신관이 개관하면서 ‘손상된 원본’이 복제본과 함께 전시되기에 이릅니다. 이 그림이 겪은 파란의 역정도 역시 신중국 역사의 일부분임을 천명하면서 말이지요. 언젠가 중국국가박물관을 가보시면 홀 북쪽(바라보면서 왼편)에 걸린 것이 류사오치와 가오강이 없는 ‘원본’이고 홀 남쪽(오른편)에 걸린 것이 ‘원모’를 회복한 ‘복제본’입니다.

[에필로그]

얼마 전, 동료 김모 교수가 1976년 말에 발간된 『광둥화보(廣東畫報)』의 마오쩌둥 추모특집호의 한 면을 보여주며 뭐 이상한 것 없냐고 하더군요. 다름 아닌 사람들이 사진에서 지워진 흔적이었습니다. 사실 흔적도 아니고 너무 표가 나는 것이었어요. 1976년 9월 18일 베이징 천안문 광장에서 거행된 추도대회를 보도한 기사와 사진인데요, 표시해 놓은 것처럼 네 사람의 이름이 대회에 참석한 고위급 인사 명단에서 사라졌고, 사진 상에서도 언뜻 봐도 네 명의 자리가 빈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네 명인데다가 한 사람 이름이 두 글자인 것을 봐서 장칭(江靑)을 포함한 4인방이라고 봐도 무리가 없을 것 같습니다. 아마도 추도대회 당시 보도된 사진과 기사에는 온전히 실려 있었을 텐데요, 그 사이 4인방이 십년동란의 수괴들로 지목되어 그해 10월 6일 체포되고 나서 발간된 이 화보에는 이렇게 지워버린 모양입니다. 추도대회 당시 신문에 실린 사진과 대조할 수 있으면 정확히 알 수 있을 겁니다. 추모인사들이 서 있는 곳은 개국대전에서처럼 천안문 성루 위가 아니라 그 앞에 마련된 단상 위입니다만, 아무튼 천안문에 잘못 올라갔다간 흔적도 없이 사라질지 모르니 조심할 일입니다.

『광둥화보』 1976년 제5, 6기 합본호. 제10면,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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