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금성 정대광명전 正大光明殿

자금성 정대광명전 正大光明殿 (《圖畫日報》 제8호)

유라시아 대륙 북방의 여타 유목 계통 민족들이 대개 그랬듯 만주족 역시 우두머리 지위를 적장자(嫡長子)가 우선적으로 세습케 하지 않았습니다. 입관(入關) 후 청은 많은 면에서 선행 왕조인 명의 제도를 따랐지만 황위의 장자 세습은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여전히 각 세력을 대표하는 이들이 모여 이를테면 대(大) 칸에 해당하는 자리에 앉을 이를 합의에 의해 선출했지요. 그 가운데 물론 대청황제의 발언권이 절대적이긴 했지만 청 초엽까지만 해도 형식적으로 부족체의 회의를 중시했습니다. 이러한 황위 계승 방식은 여러 황자들 가운데 가장 능력 있고 명망 있는 이를 세울 수 있었고 황자라면 누구나 황위 계승이 가능했다는 점에서 다들 향락에 빠지지 않고 글공부와 무예 연마를 열심히 하도록 했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측면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과한 경쟁을 유발했고 황자들 간의 혈투의 가능성이 상존했지요. 그 폐단에 주목한 강희제는 미리 장자를 후계자로 세워 훈련시키고자 했지만 반발이 적지 않았습니다. 재위 기간 동안 강희제는 몇 차례 황세자의 책봉과 폐위를 반복했습니다. 그런 가운데 강희제의 넷째 아들로 여러 형과 아우의 견제를 이겨내고 군사력을 이용해 황위에 오른 옹정제는 장자 세습은 아니되 만주 제도가 유발하는 형제간 과한 경쟁과 질시를 막기 위해 묘안을 냅니다. 미리 후계자를 정해 놓지만 미리 공표하지 않고 황제 사후에야 알 수 있도록 한 것입니다. 널리 알려진 것과 같이 황위를 계승할 아들의 이름을 두 군데 적어 하나는 황제가 신변에 두고 하나는 자금성 후삼궁(‘태화전’ 포스팅 참조) 가운데 황제의 일상적 집무 공간으로 많이 쓰인 건청궁(乾淸宮)의 편액 뒤에 잘 모셔두었다는 것이지요. 이 건청궁 편액에 쓰인 글귀가 바로 황제의 말과 행실은 누구보다도 바르고 떳떳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 ‘正大光明’으로 자금성 여러 건물의 편액 가운데 가장 유명합니다. 건청궁의 별칭으로 ‘正大光明殿’이 쓰이는 것도 당연 이 편액의 글귀 때문입니다. 이와 같은 비공개 지명 방식인 ‘밀건(密建)’에 따라 건륭(乾隆), 가경(嘉慶), 도광(道光), 함풍(咸豐) 네 황제가 황위를 이어갔고 그 뒤로는 무효화 되었습니다.

  앞선 ‘태화전’ 포스팅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1909년에 민간에서 황제의 전각과 보좌를 직접 보고 그대로 그렸을 가능성은 ‘영’이라고 해도 좋을 것입니다. 역시 1900년 팔국연합군의 베이징 점령 당시 서구나 일본의 사진사가 찍은 사진이 유포되어 모본으로 쓰였을 것이라고 봐야 하겠습니다. 왕조의 황혼에 직면해 황제의 자리가 이렇게 상하이의 한 대중화보에 그림으로 실리게 된 내력을 짐작해서일까, 텅 빈 보좌는 한때 막강했던 대청의 권력을 웅변한다는 느낌을 주기보다는 오늘날 범상한 유람객의 렌즈에 숱하게 포착된 장면을 백 여 년 전에 선취했구나 하는 생각을 갖게 합니다.

민정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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