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대瀛台

‘영대瀛台’ (《圖畵日報》 제3호)

영대(瀛台)는 베이징 황성(皇城)의 서쪽 구역, 즉 서원(西苑)의 ‘남해’ 가운데 자리한 작은 섬이다. 또한 그 섬에 있는 누대 가운데 하나의 이름이기도 하다. 물로 둘러싸였고 아름다운 정자와 누각 들이 들어서 있어 바다 가운데의 선도(仙島)와 같다는 의미로 그렇게 불렀다. 명나라 초, 자금성과 그 주위를 에워싼 황성이 조성되면서부터 여기에도 건축이 이루어졌으며, 청대에 들어와서도 순치, 강희년간에 대대적 개축과 보수가 이루어졌다. 이곳은 주로 황실 사람들이 중해와 남해의 수려한 풍광을 즐기는 곳이었지만 때로는 황제가 정무를 보거나 비빈이 거주하는 곳으로 쓰이기도 했다. 건륭제는 황자 시절 〈영대기(瀛台記)〉를 썼는데, 초기 문장을 모은 《낙선당집(樂善堂集)》에 수록되어 있다.

《圖畫日報》 제3호 1면, ‘大陸之景物’(3) 瀛台’ / 宣統1년 7월 3일 / 1909년 8월 18일

서원으로 들면 큰 연못이 있는데 전하길 ‘태액(太液)’이라 한다. 연못 동쪽 가를 따라 남쪽으로 내려가다 서쪽으로 틀어 나무다리를 건너면 깊고 넓은 다섯 간 건물이 나오는데 근정전(勤政殿)이라 한다. 근정전에서 더 남으로 내려가면 돌 제방이 수십 보는 됨직한데 계단을 밟아 오르면 누각의 문이 북쪽을 향해 나있고 편액에는 ‘영대문(瀛台門)’이라 적혀 있다. 안으로는 다섯 간 전각이 있는데 ‘향의전(香扆殿)’이다. 향의전 남으로는 비각으로 둘러 연결되어 있는데, 전에서 각에 이르는 길이 마치 평지를 밟는 것 같다. 그렇지만 홀연 계단을 밞고 내려오고 나서야 비로소 위아래 층으로 되어 있음을 알게 된다. 누각 앞으로는 정자가 있는데 물에 맞닿아 있으며 ‘영훈(迎薰)’이라 부른다. 정자의 동서로는 기이하게 생긴 암석과 수목이 병풍처럼 빽빽이 들어서 있다. 정자로부터 동쪽으로 가다보면 암석 동굴을 지나는데, 기이한 봉우리와 뾰족이 솟은 벽이 촘촘히 늘어서 있어 천연 산림의 운치를 갖고 있다. 영대는 북쪽으로만 제방과 연결되어 있고 삼면이 모두 태액에 닿아 있다. 그래서 아래쪽에서 올려다보면 궁실과 전각이 산림 가운데 엇섞여 있는 것이 마치 그림에서 묘사하는 바다 한 가운데 봉래산과 같다. ‘영대’라 부르는 것도 그런 의미 아닐는지. (入西苑門有巨池,相傳曰太液. 循東岸南行, 折而西, 過木橋, 邃宇五間, 爲勤政殿. 自勤政殿南行, 石堤可數十步, 階而升, 有樓門向北, 匾曰瀛台門. 內有殿五間, 爲香扆殿. 殿南飛閣環拱, 自殿至閣, 如履平地. 忽緣梯而降, 方知爲上下樓. 樓前有亭, 臨水, 曰迎薰. 亭東西奇石木, 森列如屏, 自亭東行, 過石洞, 奇峰峭壁, 翏轕蓊蔚, 有天然山林之致, 蓋瀛台惟北通一堤, 其三面皆臨太液, 故自下視之, 宮室殿宇, 雜於山林之間, 如圖畫所謂海中蓬萊者. 名曰瀛台, 豈其意乎?)

1898년 8월초, 보수파의 정변으로 변법유신이 실패하고 주도자인 캉유웨이와 량치차오는 해외로 망명했으며, 탄쓰퉁 등은 혹독한 고문 끝에 처형당했고, 이들을 지지하며 친정을 추진하던 광서제는 변란 직후 이곳 영대에 유폐되었다. 아마도 선경(仙境)의 이미지에다가 병약한 젊은 황제가 갇혀 지냈던 비운의 장소에 대한 안타까움이 겹쳐 이곳에 대해 서양인들을 비롯한 청말민국초 궁 밖 사람들은 큰 관심을 둔 모양이다. 《도화일보》 ‘세계의 경물’이 보여주는 세 번째 장소로 이곳이 선정된 배경이 아닐까싶다. 1900년, 팔국연합군이 황성 내 여기저기에 막사를 설치해 사용하면서 영대를 포함해 황성 안의 여러 건축물과 명소들의 모습은 한 동안 스케치와 사진을 통해 외부에 비교적 잘 알려지게 되었다. 하지만 오늘날에 와서는 중국을 이끄는 당정 지도자들이 거주하고 집무하는 중남해 구역의 일부로 들어가 있어 특별한 경우에나 보도를 통해 접하게 되는, 여전히 베일에 싸인 특별한 장소다.

《도화일보》 제3호에 소개된 영대의 풍경은 영대의 배치도와 오래된 사진들을 놓고 따져봤을 때 섬 북쪽의 중해와 남해 사이의 뭍 쪽에서 바라본 것 같다. 화면 전경에 제방과 영대를 연결하는 다리 난간이 보이고 뒤로는 다리 남쪽의 인요문(仁曜門)과 상란각(翔鸞閣)의 일부가 보인다.

민정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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