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也)하다와 야(野)하다

也字辨說

천자문 이야기를 하나 할까 합니다.

참 이해할 수 없는 구절이 천자문 마지막 4 글자였더랬습니다. 이끼 焉, 이끼 哉, 온 乎, 이끼 也 이끼가 뭔지, 온이 뭔지? 바위의 이끼를 우리 고장에서는 그냥 청태라고 합니다. 이끼가 청태인지도 나중에 알았지만요^^ 명색이 한자와 중문학을 전공하면서도 대학원 졸업할 때까지 학생들을 가르치는 최근까지도 그냥 수수께끼처럼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물론 온이 의문문에 붙는 말이라든가 이끼가 잇기의 변형이라는 것 정도는 짐작해고 있었지만 말이죠… 얼마전 한자 공부를 하는 도중 상형문자 해설을 보다가 평생토록 갖고 있던 의문이 정말 恍然大悟하는 깨달음으로 다가왔습니다. 참선의 궁극적인 경지가 어떤지는 모르지만 한동안 깨달음의 희열이 도통의 경지처럼 온몸을 감쌌습니다. 그것은 바로 也자가 여성의 성기를 본뜬 글자라는 사실 때문이었습니다. 제목처럼 무슨 야한 이야기를 하려나 기대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건 순전히 학문과 관련된 이야기니까요^.^ 우선 떠오른 생각은 也자가 地자로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地자도 여러 가지 설명 방법이 있는 줄 알지만,(隊+土 등) 땅+여성의 성기보다 더 명확한 이미지가 있을까요?! 땅은 만물의 어머니이며 만물을 탄생시키고 기르는 거대한 자궁이지요 여성의 성기는 가장 낮고도 가장 깊은 이념으로 땅이 되는 거지요 대구 팔공산 가장 동쪽 산봉우리에 갓바위라는 부처님이 있습니다. 산꼭대기에 거대하게 조성된 통일신라시대 약사여래불이랍니다. 갓바위를 오르며 약사여래불이라는 염불만 지성스럽게 해도 세 가지 소원은 들어준다는 전설이 있습니다. 특히 이 바위 부처님은 동쪽 경주를 바라보고 있어서 경주, 울산, 부산, 영천, 포항 등지의 사람들에게 더욱 많은 발복을 내려준다죠 아마^^

나는 그 바위 부처님의 지역주의 때문에 아직까지 거의 염불조차 해본 적이 없지만요 (그래서 발복하고는 거의 담쌓음) 그런데 놀라운 일은 그 부처님 앞에서 치성을 들이는 사람이 거의 할머니, 어머니, 누나, 여동생, 딸 들이라는 사실입니다. 역사의 아니 역사까지 들먹일 필요도 없이 지금 현실의 수많은 악행은 다 아시다시피 대부분 남자들이 저지르는 일이죠? 물론 목전에 청개구리 궁전에서 왼갖 유체이탈 화법을 구사하는 마녀도 있기는 하군요. 하지만 오늘도 우리 할머니, 어머니, 누나, 딸들은 그 가파른 산꼭대기까지 올라가서 바위 덩어리에다 대고 정말로 정성을 들여서 죄지은 남편이나 아들이나 아버지 대신 삼백배 삼천배를 올립니다. 땅의 낮고 넓고 깊은 마음씨가 아니라면 어떻게 가능한 일이겠습니까? 地자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也자가 만들어내는 은은한 염불소리가 들리지 않습니까? 대지의 교향악이 들려오지 않습니까? 한문 문장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어떤 문장이든지 막론하고 모두 也자가 보입니다. 여성의 성기가 보입니다. 그 낮고 깊은 구멍이 보입니다. 대체로 한 의미 단위의 맨 마지막 끝에 붙어 있는 그 也자를 우리는 모더니스틱한 어감으로 ‘어조사’ 也라고 합니다. 이제 더 이상 ‘이끼’ 也라고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가장 낮고 깊은 구멍인 이상 ‘어조사’ 也라고 하기 보다는 ‘이끼’ 也 아니 ‘잇기’ 也라고 해야 합니다. 그래야 실사와 허사의 기능을 포괄하는 또는 천지 음양의 원리를 함장하는 ‘也’ 자의 본래 의미를 빠짐없이 나타낼 수 있습니다. 也자가 ‘이끼’ 즉 ‘잇기’라는 訓을 가지고 있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럽고도 당연한 이치입니다. ‘잇기’는 서로 떨어진 사물을 하나로 이어주는 행위입니다. 也자는 한문 문장의 한 구절 끝에 붙어서 단순히 그 구절을 종료시키는 기능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 문장이 也자에 의해 한 구절로 끝나버린다면 장편의 아름다운 진술이 어떻게 가능하겠습니까? 也자는 낮고 깊은 구멍으로 앞의 구절과 뒤의 구절을 이어줍니다. 문장을 짓는 행위를 ‘글짓기’라고 합니다. 인류를 짓는 행위를 ‘짝짓기’라고 합니다. 그것은 모두 ‘잇기’라는 生生不息’하는 행위로 이루어집니다. 也자가 어조사가 아니라 ‘잇기’가 되고 그것이 한 구절의 머리나 허리가 아니라 한 구절의 맨 끝에 야(也)하게 붙어 있는 것은 여성 성기의 신성한 기능을 그대로 발현한 것이 아닙니까^^

오늘도 ‘글짓기’를 하셨습니까?

오늘도 그 야(也)한 행위를 하셨습니까?

오늘도 그 야(也)한 글들을 읽으십니까?

야(野)하다는 야(也)하다가 되어야 살림의 철학이 되는 것은 아닌지…

하지만 野도 也도 모두 드넓은 대지인 것을……. ^^

by 청청재

댓글 남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