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쉰의 축자역

루쉰이 소설가라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지만요^^ 루쉰이 유수한 번역가라는 사실은 그다지 많이 알려져 있지 않죠. 루쉰은 평생토록 <외침(吶喊)>, <방황(彷徨)>, <새로 펴낸 옛날 이야기(故事新編)>라는 세 권의 단편소설집만을 출판한 것에 비하면 그가 번역한 책은 평론까지 합칠 경우 근 30권에 달하죠.

쥘 베른, 예로센코, 반 에덴, 무엘렌, 판텔레프, 고리끼 등의 동화, 동구권의 다양한 피압박 민족의 단편소설이 중심을 이루고 있는 [역외소설집(域外小說集)], 廚川白村, 鶴見祐輔, 武者小路實篤, 板垣鷹穗, 片上伸 등 일본 작가의 소설, 평론, 희곡, 아르치바세프, 루나찰스키, 플레하노프, 야코브레프, 파제예프, 체홉, 이딘, 고골리 등 러시아 작가의 소설 및 평론, 그리고 그외 등등….. 앞의 작가들은 영미권이 좀 부족하긴 하지만, 그외에는 이름만 들어보아도 각국의 문단 또는 세계의 문단에서 다들 뜨르르한 명성을 날렸던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죠.  그런데 흥미로운 일은 루쉰이 평생토록 번역에 종사하면서 축자역(逐字譯)을 고집했다는 사실과, 일본어를 제외한 다른 외국어는 그다지 능통하지 못하여(영어와 독일어는 꽤 했다 하지만 글쎄……), 일본어로 번역된 서구 작품을 다시 중국어로 옮기는 이중번역(重譯)에 집착했다는 사실인데요, 이것은 옌푸(嚴復)가 주장한 신(信), 달(達), 아(雅)의 원칙에 비추어 본다면, 극단적으로 신(信)을 중시한 번역관이라고 할 수 있죠.

당시 미국에서 유학하고 돌아와 베비트의 신인문주의를 중국에 도입하고자 노력하던 우파의 대표적 논객 량스츄(梁實秋)의 눈에는 루쉰의 이러한 번역 활동이 정말 시시껄렁하고 허접한 수준으로 비칠 수 밖에 없었는데요, 1929년에 벌어진 루쉰과 량스츄의 논쟁은 급기야 서로간에 “상가집 개새끼” “소새끼”라는 욕이 오고가는 그런 수준 이하의 욕잔치로 끝나고 말았죠…..

좀 벗어난 이야기지만 아이러니칼하게도 루쉰의 손자인 저우링페이(周令飛)가 1980년대 일본에서 유학도중 묘령의 타이완 아가씨와 불같은 사랑을 나누었는데, 급기야는 사랑을 따라 타이완으로 망명 비슷한 걸 하게 되었죠.(지금은 대륙에 있음) 당시 타이완은 난리가 났죠, 말하자면 김정일의 아들이 남한으로 망명했다고 생각해보시죠. 그런데 저우링페이가 타이베이 공항에 내렸을 때, 제일 먼저 달려와 맞이해준 사람이 바로 루쉰과 침 튀기며 쌍말을 주고받은 바로 그 량스츄 영감님이었다는군요. 말하자면 미운 정이 든 셈인데, 이후에도 량스츄는 저우링페이의 타이완 생활에 꽤 많은 도움을 주었다는군요.

본 가지로 돌아갈까요, 그럼 루쉰은 왜 량스츄의 눈에 “말도 안되는 어거지 번역(硬譯)”으로 비친 축자역을 고집했을까가 문제죠. 루쉰은 당시부터 지금까지 세계 어느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유창한 필력의 소지자인데도 말이죠. 왜 그랬을까?

루쉰은 그 의혹에 대해 이렇게 대답했죠…….

“나는 지금도 좀 매끈하지 못한 부분이 있다 하더라도 정확하게 원문을 번역할 것을 주장한다…… 그러한 번역서는 새로운 내용을 들여올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새로운 표현법까지 들여올 수 있다. 중국의 글과 말은 그 방식이 너무 정밀하지 못하다…….. 법이 정밀하지 못하다는 것은 사고가 정밀하지 못함을 증명하는 것이다. 환언하자면 두뇌가 다소 멍청하다는 것이다…….. 이 병을 치료하기 위해서는 고통스럽더라도 계속해서 고생을 좀 하는 수밖에 없다……. 좀 이상한 구법들을 받아들여서 나중에는 자기 것으로 만들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루쉰과 량스츄의 정치적 입장이 다르다는 것은 논외로 치더라도, 이 문장에서 드러나는 루쉰의 지향점은 량스츄의 그것과 너무도 분명한 대조를 이루고 있는 셈이죠. 말하자면 루쉰의 번역이 지향하는 점은 그의 일관된 ‘입인(立人)’ 사상과 마찬가지로, 중국인들의 흐리멍텅하고 분별력없는 사고방식과 생활태도를 바꾸기 위한 것이라는 거죠. 문법도 없이 대충대충 애매모호하게 써나가는 중국의 문장이야 말로 중국인들의 멍청한(昏) 사고방식의 근원이며, 이를 고쳐나가기 위해서는 중국의 문장에는 없는 생경하고 새로운 외국어법과 표현법을 들여와야 한다고 주장한 셈이죠. 한 가지 사상을 자신의 생활 모든 부문에까지 스며들게 하고, 또 그것을 스스로 실천하고 있다는 점에서 루쉰의 루쉰다움이 이 번역관에도 여과 없이 드러나고 있다고 할 수 있죠.

루쉰의 축자역, 가공할만 한 핵폭탄의 뇌관인 셈인데요!! 우리도 루쉰과 같은 혁명적 사고방식(정치 혁명이 아닌 근본적인 혁명)을 모든 생활에 적용해서 살 수 있다면 어색한 축자역을 고집해도 괜찮을 것 같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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