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파(京派)’ 또는 ‘해파(海派)’

중국의 정치적 수도는 베이징이고, 경제적 수도는 상하이다. 근대 이후 두 도시는 남과 북을 대표하는 도시로 서로 상대방을 의식하며 경쟁해왔다. 한 나라의 수도로서 정치적으로 보수적인 색채가 강한 베이징에 비해 상하이는 상대적으로 전통적인 권위에 대한 저항 의식이 강한 도시다.

그래서였을까? 대약진운동의 실패로 궁지에 몰렸던 마오쩌둥이 1965년 9월에서 10월에 걸쳐 열렸던 당 중앙공작회의 석상에 참석한 뒤 “베이징에서는 나의 의견이 실현될 수 없다고 느껴진다”는 발언을 남기고 베이징을 떠나 향했던 곳 역시 상하이였다. 당시 마오쩌둥에게 반기를 들었던 세력들은 베이징을 기반으로 하고 있던 일군의 당 간부들이었다. 마오쩌둥은 이들에 대항할 수 있는 세력으로 군부를 장악하고 있던 린뱌오와 상하이 시 당 위원회밖에 없다고 판단해 상하이로 향했던 것이다.

사실 베이징과 상하이의 대립 관계는 그리 오래된 것은 아니다. 정식으로 국가의 수도가 되었던 원나라 이전 요과 금 같은 북방 유목민족 출신 왕조의 배도(陪都) 역할을 했던 시기까지 합친다면 약 800년의 역사를 갖고 있는 베이징에 비해 상하이는 근대 이후 서구 열강의 개항 요구에 맞춰 본격적으로 개발이 되었기에 상대적으로 그 역사가 짧다. 그럼에도 상하이의 발전 속도는 중국 역사상 그 어떤 도시보다도 빨랐고, 그 규모 또한 엄청났다. 아편전쟁 직후인 1843년 11월 7일 상하이가 정식으로 개항한 뒤 20년 만인 1860년대에 상하이의 대외무역액은 그 이전에 중국 최대의 개항장이던 광저우를 추월했고, 그 이후 현재까지 상하이는 중국의 경제를 대표하는 도시가 되었던 것이다.

그렇게 빠른 속도로 발전한 상하이였기에 다른 도시, 그 중에서도 수도였던 베이징 사람들의 반감을 샀던 것일까? 사실 한 나라의 수도인 베이징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자부심은 다른 도시 사람들이 상상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들 눈에 비친 상하이는 벼락부자가 깜냥을 모르고 설쳐대는 천박하기 이를 데 없는 신흥 도시였는지도 모른다.

당시 베이징의 문예계를 대표하는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선충원(沈從文)은 1933년 10월 18일 톈진(天津)에서 펴내는 『대공보(大公報)』 문예면에 「대학자의 태도」라는 글을 실었다. 여기에서 선충원은 “최근의 문인들은 명사의 풍모를 몸에 걸치고 물장수의 태도로 문학을 갖고 논다”고 비난하면서, 특히 “이들 문인들은 상하이에서 어슬렁어슬렁하고, 어슬렁거리는 것도 모자라 매주 4~5번은 반드시 잡담회라는 것을 연다”는 말로 상하이 문인들을 조롱하는 동시에 이들을 ‘해파’라 불렀다. 이에 대해 상하이 문인들을 대표해 두헝(頭形)이 「문인은 상하이에 있다」라는 글을 써 해파 문학을 변호했다. 이후로 베이징과 상하이 문인들은 서로 설전을 벌였다.그 자세한 것을 여기서 일일이 늘어놓을 수는 없지만, 이것을 통해 베이징과 상하이에는 서로 다른 문화가 존재했고, 각기 다른 문화적 가치관과 성향, 그리고 전통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중국 역사에서 남북의 차이는 그 역사가 오래되었다. 물론 이것은 중국의 영토가 그만큼 광대하기 때문인데, 역대로 많은 문사들이 그 차이에 대해 언급했다.

“북방의 땅은 기후가 건조하고, 물은 지하 깊숙한 데 있다. 여기서 생계를 영위하는 인민은 실질적인 것을 추구하는 경우가 많다. 남방의 땅은 형세가 크고 막막하니, 그 곁에 사는 인민들은 허무를 좋아하는 경우가 많다. 현실적인 인민이 문장을 쓰면 기술하고 논리를 펴는 형식이 되고, 허무를 좋아하는 인민이 문장을 쓰면 자신의 뜻을 펴고 서정적인 문체가 된다.”(류스페이(劉師培), 「남북문화부동론(南北文化不同論)」 )

“중국의 큰 강은 모두 서쪽에서 동쪽으로 흐른다. 이들에 의해 중국 대륙은 남북으로 구분되는데, 다른 풍속과 문화, 예술 전통을 만들었다.”(량치차오(梁啓超), 「중국 지리 대세론(中國地理大勢論)」(1902), )

“가뭄과 부족한 물, 그리고 이민족의 침입은 화북(華北)을 재난이 끊이지 않는 지역으로 만들었다. 매번 재난을 당한 인간은 자연도태된 것이다. 약자는 점점 사라져가고, 살아남은 자는 모두 고난을 견뎌 낸 자들이었다. 도태 과정에서 최대의 피해자는 여성이었다. 재해가 일어나면 여성들은 제일 먼저 팔려갔다. 이 때문에 북방은 좋은 어머니가 될 만한 여성을 잃어버렸다. 또 자질이 좋은 사람들은 남방이나 동북 지역으로 가버렸다. 그래서 남방과 동북 3성은 비교적 선진적인 지역이 되었다. 수없이 집단 대이동을 해야 했던 객가(客家) 사람들은 특히 이러한 좋은 품성을 갖추었다. 결국 화북에 남은 북방 사람들은 날로 우둔해졌고, 예쁜 여성도 거의 보이지 않게 되어버렸다.”(판광단(潘光旦), 󰡔자연도태와 중화 민족성(自然淘汰與中華民族性)󰡕)

“북방의 중국인은 단순하고 소박한 생각을 하며, 고생스런 생활에 익숙해 있다. 키가 크고 건장하며, 성격은 열정적이다. 유머 감각이 있으며 대파를 먹고 우스갯소리를 잘한다. 이들은 자연의 아들이다. 여러모로 몽골인에 더 가깝고, 상하이나 저쟝 일대의 사람들과 비교할 때 훨씬 보수적이다. 이들은 자기 종족의 활력을 잃지 않았다. 이들은 중국에서 대대로 지방을 할거하는 왕국을 만들어 냈다. 이들은 중국의 전쟁소설과 모험소설의 주인공으로 등장하곤 한다. 동남 변방과 창쟝 이남에서는 전혀 다른 사람들을 보게 된다. 이들은 편안하고 한가한 데 익숙해 있다. 수양에 힘쓰고 처세에 능하다. 두뇌가 발달했으나 신체는 퇴화했다. 시와 노래를 즐기고 쾌적하게 지내고자 한다. 음악을 사랑하며 편안한 것을 좋아한다. 남자들은 성격이 원만하지만 몸이 부실하고, 여자들은 날씬하지만 신경쇠약증이 있다. 이들은 제비집 수프와 연잎 밥을 먹는다. 이들은 영리한 장사꾼이며 뛰어난 문학가들이다. 그러나 전쟁터에서는 겁쟁이가 되어, 주먹이 날아오면 머리에 닿기도 전에 땅바닥에 엎드려 울 준비가 항상 되어 있다. 이들은 진(晉)대 말년에 자기 책과 그림들을 끼고 강을 건너 남쪽으로 간 교양 있는 대가문의 후손들이다. 당시에 중국의 북방은 야만종족의 침범을 받고 있었다.”(린위탕(林語堂), My Country and My People)

결국 ‘경파’와 ‘해파’의 논쟁은 이런 역사적 배경 하에 이루어진 것이라 할 수 있다. 한 가지 특징적인 것은 베이징의 경우 한 나라의 수도였기에 이곳에는 다른 곳에 없는 특유한 엘리트 문화가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그렇기에 여기서 말하는 ‘경파’는 이들 엘리트 지식인의 문화를 가리키고, 서민들은 그들 나름의 별도의 문화를 갖고 있는데, 그것을 ‘경미(京味)’라 부른다. 이에 비해 상하이는 이런 엘리트와 서민 문화의 구분이 없다. 곧 상하이에는 ‘해파’밖에 없는 것이다. 곧 상하이 사람들의 문화는 사회 계층이 다르고 직업이 다르다 하더라도 결국 상하이라는 하나의 대도시에 살고 있는 시민 문화를 가리킨다.

일반적으로 ‘경파’의 문화는 ‘귀족적’이고 ‘고상하며’, ‘엄숙하고’, ‘전통적이고’, ‘아카데미즘적이고’, ‘정치 색이 짙은’ 반면에, ‘해파’의 문화는 ‘세속적이고’, ‘대중적이며’, ‘오락적이고’, ‘공리주의적’인 동시에 ‘상업화’되었고, ‘모던하며’, ‘식민지 적’이라는 특징을 갖고 있다는 게 중론이다. 이런 역사, 문화적 배경을 갖고 있는 베이징과 상하이는 여전히 서로 경쟁의식을 갖고 있으며, 은연중에 상대방을 깔보는 태도를 취하고 있다.

by 와호장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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