펑즈카이豊子愷-그리운 리숙동선생님懷李叔同先生

그리운 리숙동선생님

지금으로부터 29년 전, 내가 17살 때, 항주(杭州)의 절강(浙江) 성립(省立) 제일사범학교에서 리숙동(李叔同) 선생님을 처음 만났는데, 바로 훗날의 홍일법사(弘一法師)이다.

그 때 나는 예과 학생이었고, 리선생님은 우리 음악 교사였다. 우리는 리선생님의 음악 수업을 들을 때, 어떤 특별한 느낌이 있었다. 엄숙함이었다. 예비종이 울려서, 음악 교실로 걸어가 문을 밀고 들어서던 우리는 우선 깜짝 놀랐다. 리선생님이 벌써 교단에 단정히 앉아 있었기 때문이다. 선생님들은 늘 우리보다 늦게 온다고 생각하면서, 되는대로 노래도 하고, 소리도 지르고, 웃기도 하고, 욕도 하면서 문을 밀고 들어서던 학우들로서는 더욱이 놀라움이 작지 않았다. 학우들의 노래 소리, 외침 소리, 웃는 소리, 욕하는 소리가 문간을 경계로 갑자기 소멸되었다. 이어서 고개를 숙이고, 얼굴을 붉히고, 자기 자리에 가서 단정히 앉았다. 자기 자리에 앉아서 살그머니 고개 들어 보니, 리선생님은 높디 높은 깡마른 상반신에 정결한 검은 천 저고리를 입고, 넓고 넓어 말도 달릴 수 있을 것 같은 앞이마, 가늘고 긴 봉황눈, 바르게 솟은 콧마루 등이 교탁 위로 드러나 위엄있는 표정을 만들고 있었다. 납작하고 평평하고 넓은 입술 양 끝에는 항상 깊은 보조개가 있어, 온화하고 사랑스런 표정을 드러냈다. “온화하고 엄격하다”(溫而厲) 세 글자로 그 모습을 묘사하면 대체로 거의 맞을 듯 싶다. 교탁 위에는 출석부․강의록 그리고 필기장․분필이 놓여 있었다. 피아노 덮개를 벗기고, 피아노 뚜껑을 열고, 악보를 펼치면, 피아노 머리맡에는 또 시계가 하나 놓여 있어, 반짝반짝 금빛이 우리 눈까지 곧장 쏘아졌다. 칠판(위 아래 두 짝 이동식으로 된 것)에는 그 수업 시간에 쓸 내용이 이미 또박또박 쓰여 있었다(두 짝을 모두 써서, 윗짝이 아래짝을 덮어, 아래짝을 쓸 때 윗짝을 밀어낸다). 그렇게 배치된 교단에 리선생님이 단정히 앉아 있었다. 앉아 있다 수업 시작종이 울리면(나중에 우리는 리선생님의 이런 성격을 알고 음악 수업 때는 반드시 일찍 갔다. 그래서 수업 시작 종이 울릴 때는 학우들이 이미 모두 와 있었다), 선생님은 일어나서 몸을 깊이 숙여 인사하고, 곧 수업을 시작했다. 이렇게 수업을 하니, 공기가 아주 엄숙했다.

李叔同

음악 수업할 때 노래를 부르지 않고 다른 책을 본 학우가 있었고, 음악 수업할 때 바닥에 침을 뱉은 학우가 있었다. 리선생님에게는 안 보인다고 생각했는데, 사실 선생님은 다 알고 있었다. 그러나 선생님은 즉각 혼내지 않고, 수업이 끝난 뒤에 아주 가볍고 엄숙한 목소리로 “아무개 아무개는 좀 있다 나가”라고 정중하게 말했다. 그래서 그 아무개 아무개 학우는 서 있는 수밖에 없었다. 다른 학우들이 모두 나간 뒤에 선생님은 또 가볍고 엄숙한 목소리로 그 아무개 아무개 학우에게 “다음부턴 수업할 때 다른 책을 보면 안돼”, “다음부턴 바닥에 침을 뱉으면 안돼”라고 따뜻하게 말했다. 말을 하고 나서 선생님은 살짝 몸을 굽혀 “나가 봐라”라는 뜻을 표시했고, 나가는 사람은 모두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또 한 번은 음악 수업이 끝나고 마지막에 나가던 학우가 무심코 문을 당겼는데 너무 세게 부딪쳐서 아주 큰 소리가 났다. 그 학우가 몇십 걸음 걸어갔을 무렵 리선생님이 문을 나서, 얼굴 가득 따뜻한 표정을 지으며 그 학우더러 돌아오라고 했다. 그 학우가 다가오자 리선생님은 또 교실로 들어오라고 했다. 교실에 들어가자 이선생님은 아주 가볍고 엄숙하면서 화기애애한 목소리로 “다음부터 교실 나갈 때는 문을 살며시 닫아야 한다”라면서 그에게 몸을 숙여 인사하고, 문 밖까지 배웅하고 나서 스스로 가볍게 문을 닫으셨다.

가장 잊을 수 없는 건 언젠가 피아노 수업을 할 때였다. 우리는 사범학교 학생이라 모두가 피아노 치는 걸 배워야 했는데, 학교 전체에 풍금 50․60대와 피아노 두 대가 있었다. 풍금은 학생들 연습용으로 매 교실마다 두 대씩 놓아두었고, 피아노 한 대는 노래 부르는 교실에 놓아두고, 한 대는 피아노 치는 교실에 놓아두었다. 피아노 수업을 할 때면 십수명이 한 조가 되어 피아노 곁에 둘러서서 리선생님의 시범 연주를 보았다. 한번은 한창 시범 연주를 하고 있는데 한 학우가 방귀를 뀌었다. 소리는 나지 않았지만 냄새가 지독했다. 피아노와 리선생님과 십수명 학우가 전부 암모니아 가스 속에 잠겼다. 학우들 대부분은 코를 틀어막거나 질색해하는 소리를 냈다. 리선생님은 눈썹을 한 번 찌푸리더니 그대로 피아노를 쳤다(나는 선생님이 필시 숨을 멈추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피아노를 어느 정도 치자 암모니아 가스는 다 흩어지고, 선생님 눈썹은 비로소 펴졌다. 수업 시간이 다 지나 수업 끝나는 종이 울렸다. 리선생님은 일어나 수업 끝의 표시로 몸을 숙여 인사했다. 수업은 끝나고 학우들은 아직 문을 나서기 전인데, 리선생님은 또 정중하게 “모두 잠깐만요, 아직 할 말이 있어요”라고 선고했다. 모두 엄숙하게 다시 그 자리에 섰다. 리선생님은 또 아주 가볍고 엄숙하면서 화기애애한 목소리로 말했다. “앞으로 방귀를 뀌려면 문 밖으로 나가야지, 실내에서 뀌면 안돼요”, 이어서 이제는 나가도 된다는 표시로 또 몸을 숙였다. 학우들은 모두 웃음을 꾹 참았다가, 문을 나서자마자 모두 재빨리 저 멀리까지 달려가서 한바탕 크게 웃었다.


리선생님은 그런 식으로 우리에게 음악을 가르쳤다. 이로 인해 우리는 다른 과목 수업을 할 때보다 음악 수업을 할 때가 훨씬 엄숙함을 느끼는 동시에 다른 교사보다 음악 교사 리숙동 선생님을 훨씬 존경했다. 그때 학교에서 첫손꼽는 중요한 과목은 이른바 “영․국․수” 즉 영어․국어․수학이었다. 다른 학교에서는 이 세 과목 교사가 가장 권위가 있었다. 그런데 우리의 그 사범학교에서는 음악 교사가 가장 권위가 있었다. 그가 바로 리숙동 선생님이기 때문이었다.

리숙동 선생님은 어떻게 그런 권위가 있을 수 있었을까? 학문이 뛰어났기 때문만도 아니고, 선생님의 음악이 좋았기 때문만도 아니고, 중요한 건 아무래도 태도가 성실했기 때문이다. 이선생님의 일생의 최대의 특징은 “성실”이었다. 선생님은 어떤 일을 하지 않으면 그만이지만, 하려고 했다 하면 철저하게 해야만 했었다.

선생님은 부유한 집 출신으로, 부친은 천진(天津)에서 유명한 은행가였다. 다섯 번째 부인 소생이었다. 선생님이 태어났을 때 부친의 나이는 이미 72세였다. 태어나자마자 부친이 돌아가시고, 또한 가정의 변란을 만나, 청년 시절 생모를 모시고 남쪽 상해(上海)로 이주했다. 상해 남양공학(南洋公學)에서 공부하고 모친을 모실 때, 선생님은 풍류 공자였다. 당시 상해 문단에 그 유명한 호학회(滬學會)가 있었는데, 리선생님은 호학회의 글 공모에 응모하여, 몇 번 1등을 했다. 이로부터 상해의 명사들이 선생님을 귀중하게 여기게 되면서, 교유가 나날이 넓어졌고, 결국 당시 상해에서 “재자(才子)”로 이름을 날렸다. 그래서 나중에 모친이 세상을 떠나서 일본으로 유학을 가면서 “금루곡(金縷曲)” 한 수를 지었다.

“산발한 머리로 미친 듯 다닌다. 광대한 중원의 해 저물 녘, 까마귀 울음에 부서지는 시든 버들. 부서진 산하를 누가 수습할까? 언제나처럼 쓸쓸히 불어오는 서풍, 집 떠난 나그네 더욱 비쩍 말라간다. 떠나자니 강물 보며 한숨만 자꾸 푹푹, 그립다고 말하자니 더욱 뼈에 사무친다. 술보다 진하게 시름시름 밀려오는 근심, 복받치는 감정 오송강 물결에 끊임없이 철렁철렁, 해마다 버들개지처럼 흩날리고 부평처럼 떠다니는 신세가 서러워, 차마 고개 돌리지 못한다. 스물에 세상을 놀라게 한 글을 썼다는데, 결국 이제 와선 무슨 헛된 글이나마 남겼는가! 갑판 아래 청룡의 미친 듯한 포효 들리고, 기나긴 밤 서풍에 잠 못 이루며, 모든 생을 생각하면 애틋하고 쓰라리다! 조국, 홀로 등지고 떠날 수 있을까?”

이 사(詞)를 통해서, 당시 선생님은 가슴에 호기가 가득하고 애국의 열정이 뜨겁게 타올랐음을 알 수 있다. 선생님은 출가할 때 과거의 사진을 남김없이 내게 보냈는데, 사진 중에서 나는 당시 상해에서의 선생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비단 사발모자와 그 정중앙에 달린 네모 백옥, 굽은 깃 조끼, 꽃무늬 주단 도포, 뒤로 늘어뜨린 두툼한 변발, 그 아래로 주단 허리띠와 각반, 바닥이 두툼한 신발, 이런 차림새에 고개를 높이 든 그 모습에서, 준수한 기풍이 미목(眉目) 사이로 흘러 나왔다. 정말 당시 상해에서 으뜸가는 풍류 공자였다. 이는 모든 것에 성실한 선생님의 그 특성이 최초로 드러난 것이다. 일단 풍류 공자가 되겠다고 뜻을 세우면 철저하게 풍류 공자가 되었던 것이다.

나중에 선생님은 일본에 가서 메이지 유신의 문화를 보더니 서양 문명을 목마르게 흠모하게 되었다. 선생님은 즉각 풍류공자의 티를 버리고 유학생으로 변신하였다. 도쿄(東京) 미술학교에 들어가고, 동시에 음악학교에도 들어갔다. 이 학교들은 모두 서양을 모방하여, 가르치는 것이 모두 서양화와 서양음악이었다. 리선생님은 남양공학에 있을 때 영어를 잘 했고, 일본에 가서는 서양 문학서를 많이 샀다.

선생님은 출가할 때 잔결있는 원본 “세익스피어전집”을 내게 주시면서 “내가 예전에 꼼꼼히 읽었던 책인데, 책면에 이것저것 필기도 많이 하고, 온전하지도 않지만, 그래도 기념은 될 만 하지”라고 말씀하셨다. 이를 통해 선생님이 일본에 있을 때 서양 예술을 전면적으로 연구하고, 회화․음악․문학․희극을 모두 연구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나중에 선생님은 일본에서 봄버들극단[春柳劇社]을 창설하여, 유학생 중 뜻을 같이 하는 자를 불러 모아, 당시 유명했던 비극 “춘희”(뒤마 원작)를 공연했다. 선생님 자신이 허리를 가늘게 졸라매고 춘희로 분장하여 분칠을 하고 등장했다. 그 사진을 선생님이 출가할 때 역시 내게 주셨는데, 줄곧 내가 보관하다 항일전생 때 전쟁에 불타버렸다. 난 아직도 그 사진을 기억한다. 말아올린 머리카락, 하얀 상의, 바닥에 끌리는 하얀 긴치마, 한 줌 만큼 잘록해진 허리, 들어올려 머리 뒤를 받치고 있는 두 손, 오른쪽으로 비스듬한 머리, 바짝 찡그린 눈썹, 비스듬히 바라보는 눈빛, 바로 춘희가 박복한 운명에 스스로 괴로워하는 표정이었다. 연극 사진이 그밖에 많이 있었는데, 일일이 다 기록할 수 없다. 그 봄버들극단은 나중에 중국으로 옮겨왔고, 리선생님은 손을 떼고 다른 사람들이 운영하게 되었는데, 이게 바로 중국 최초의 “화극(話劇)” 극단이었다. 리선생님은 일본에 있을 때 철두철미한 유학생이었음을 이로부터 알 수 있다. 나는 당시 선생님 사진을 볼 수 있었다. 높은 모자, 딱딱한 깃, 딱딱한 소매, 연미복, 스틱, 뾰족한 구두, 게다가 큰 키, 높은 코, 콧마루에 걸쳐 있는 다리 없는 안경, 마치 완전히 서양 사람같았다. 이는 모든 것에 성실한 선생님의 그 특성이 두번째로 드러난 것이다. 어느 것을 배우면 완전히 그대로 똑같이 해야 했다. 일단 유학생이 되려고 했던 한, 철저하게 유학생이 되었던 것이다.

귀국한 뒤 선생님은 상해 태평양신문사[太平洋報社]에서 편집을 맡아보았다. 얼마 되지 않아 남경 고등사범학교의 초청을 받아 가서 그림과 음악을 가르쳤다. 나중에 또 항주 사범학교의 초빙에 응하여 두 학교 과목을 동시에 맡아서, 매달 중 반은 남경에 있고, 반은 항주에 있었다. 두 학교에서는 모두 조교를 뽑아, 선생님이 부재시에 조교가 대신 수업을 했다. 나는 바로 항주 사범학교의 학생이었다. 그때 리선생님은 이미 유학생에서 “교사”로 변하여 있었다. 이번에는 정말로 철저하게 변했다. 멋있는 양복을 입지 않고, 거친 회색 도포, 검은 저고리, 헝겊바닥 신발로 바꿔 입고 신었다. 금테 안경 또한 검은 철테 안경으로 바꿨다. 선생님은 수양이 아주 깊은 미술가여서, 의표를 아주 따졌다. 비록 포의지만 몸에 아주 잘 맞았고, 항상 정결했다. 선생님이 포의를 입으면 궁상이 전혀 없었고, 따로 어떤 소박한 아름다움 같은 것이 있었다. 독자들도 상상할 수 있으리라. 춘희로 분장할 정도로 선생님 몸집은 아주 호리호리했다. 포의를 입어도 여전히 미남자였다. “옅고 짙은 화장 무엇이든 잘 어울려” 이 시구는 원래 (중국의 전설적인 미인) 서시를 묘사한 것인데, 이 말로 우리 리선생님의 의표를 형용한다 해도 아주 잘 맞아떨어졌다. 지금 사람들이 “생활의 예술화”를 요란하게 떠드는데, 알고 보면 대부분 무슨 이상하고 신기한 걸 갖다 맞추는 것일 뿐 예술이 아니다. 그런데 리선생님의 복장이야말로 정말로 생활의 예술화에 걸맞았다. 선생님이 어느 시대의 복장을 하건 그 시대의 사상과 생활이 드러났다. 각 시대의 사상과 생활이 판연히 다름에 따라 각 시대의 복장 역시 판연히 달랐다. 포의를 입고 헝겊신발을 신은 리선생님, 양복 시대의 리선생님, 굽은 깃 조끼 시대의 리선생님, 셋은 전혀 다른 세 사람 같았다. 이는 모든 것에 성실한 선생님의 그 특성이 세번째로 드러난 것이다.

내가 2학년 때, 리선생님이 그림을 가르쳤다. 선생님은 우리에게 석고 모형 목탄 사생을 가르쳤다. 학우들은 그동안 남이 그린 걸 보고 그리는 것에 습관이 되어서, 처음에는 어떻게 손을 대야 할지 몰랐다. 그럴 듯하게 그리는 사람이 40여명 중 하나도 없었다. 나중에는 선생님이 시범으로 그리는 것을 보여주었다. 다 그린 시범 그림을 칠판에 걸고, 학우들은 모두 칠판을 보면서 그대로 그렸다. 나와 소수 학우만이 선생님의 방법대로 석고 모형을 직접 보면서 사생했다. 나는 그때부터 사생에 흥미가 생기기 시작했다. 교본의 그림은 원래 다른 사람이 실물을 보고 사생한 것임을 나는 그때가 되어서야 훤히 깨달았다. 그렇다면 우리도 마땅히 직접 실물을 보면서 사생에 들어가야지, 남이 그린 것을 그대로 따라서 그릴 필요 있겠는가? 그래서 내 그림이 진보하기 시작했다. 그 후 리선생님은 나와 접근하는 기회가 더욱 많아졌다. 내가 자주 선생님을 찾아가 그림을 가르쳐달라고 했고, 일본어도 가르쳐달라고 했기 때문이다. 그 후 리선생님의 생활은 내가 제법 상세하게 알고 있다. 선생님은 원래 성리학 관련 서적을 자주 읽었는데, 언젠가 갑자기 도교를 믿더니, 책상에는 늘 도장(道藏)이 놓여 있었다. 그때 나는 아직 철부지 청년이어서, 종교까지 논하지는 못했다. 리선생님은 그림과 관련된 것 이외에는 도(道)와 관련된 말은 내게 결코 하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마치 누군가 멀리 떠나려고 하는 것처럼, 선생님 생활이 날로 점점 정리되어 간다는 걸 발견했다. 선생님은 쓰지 않는 물건을 종종 내게 주었다. 선생님의 친구 일본 화가 대야융덕(大野隆德)․하합신장(河合新藏)․삼택극기(三宅克己) 등이 서호(西湖)에 사생하러 갈 때, 선생님은 나를 데리고 가 그들에게 한 차례 식사 접대를 하고, 이후에는 그 일본인들을 내게 넘겨, 나더러 그들을 안내하게 했다(나는 당시 이미 일상 생활 일본어 회화가 가능했다). 선생님 자신은 방문을 닫아걸고 도학을 연구했다. 어느날 선생님은 대자산(大慈山)으로 단식하러 들어가기로 결정했는데, 나는 수업이 있어서 모시고 가지 못하고 학교 직원 문옥(聞玉)이 모시고 갔다. 며칠 뒤 나는 선생님을 뵈러 갔다. 침대 위에 누워 있는 선생님을 보니, 얼굴은 비쩍 말랐는데 정신만은 멀쩡하여, 평상시와 거의 차이 없이 내게 말을 하셨다. 도합 17일 동안 단식을 하고, 문옥이 부축하고 사진을 하나 찍고, 사진 상단에 문옥 글씨로 “리식옹(李息翁) 선생 단식 이후 모습, 시자(侍子) 문옥 쓰다”라고 글을 넣었다. 그 사진을 나중에 엽서로 만들어 친구들에게 나눠주었다. 초상 아래쪽에 활자로 “모년월일, 대자산에 들어가 17일 동안 단식하여, 심신이 정화되고, 환희가 강해지다 — 흔흔도인(欣欣道人) 적다”라고 새겨넣었다. 그때 리선생님은 이미 “교사”에서 “도인”으로 변해 있었다. 도를 배우면서 17일 동안 단식을 한 것도 역시 선생님이 모든 일에 “성실”함을 말해주는 것이었다.

그러나 선생님이 도를 배운 기간은 아주 짧았다. 단식 이후, 오래 되지 않아 선생님은 불도를 배웠다. 선생님이 불도를 배우는 것은 마일부(馬一浮) 선생님의 가르침을 받은 것이라고 선생님 스스로 내게 말씀하셨다. 출가하기 며칠 전에 선생님은 나와 함께 서호 옥천(玉泉)에 가서 정중화(程中和)란 분을 만났다. 그 정선생은 원래 군인이었는데, 그 당시에는 퇴역하여 옥천에서 살면서, 마침 출가하여 스님이 되려고 하였다. 리선생님은 그와 아주 오랫동안 얘기했다. 그 후 얼마 되지 않아, 나는 대야융덕(大野隆德)을 모시고 옥천에 가서 투숙하던 도중 한 스님이 앉아 있는 것을 보았는데, 바로 그 정선생이었다. 나는 “정선생”이라고 부르려고 하다가, 뭔가 어울리지 않음을 느꼈다. 내가 돌아가 리선생님에게 말하니, 리선생님도 머지 않아 역시 출가하여 스님이 되어 홍산(弘傘)의 사제가 되려고 한다고 말씀하셨다. 나는 깜짝 놀라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몰랐다. 며칠 지나, 선생님은 과연 출가하기 위해 사직을 했다. 출가하기 전날 저녁, 선생님은 나와 학우 섭천서(葉天瑞)․리증용(李增庸) 세 사람더러 선생님 방으로 오라고 해서, 방에 있는 물건들을 우리 세 사람에게 주었다. 다음날, 우리 세 사람은 선생님을 호포(虎跑)까지 전송했다. 우리가 돌아와 선생님의 “유산”을 나누어 가지고, 다시 선생님을 만나러 갔을 때, 선생님은 이미 머리를 박박 밀고, 승려옷을 입고, 수척한 모습으로 의엿한 법사가 되어 있었다.

나는 그때부터 선생님을 “법사”라고 고쳐 부르기로 했다. 법사의 승랍은 24년이다. 그 24년 동안 나는 이리저리 정신없이 동분서주했는데, 법사는 시종일관이었고, 수행 공부 또한 갈수록 깊어졌다. 처음에는 정토종을 수련했고, 나중에는 또 율종을 수련했다. 율종은 계율을 중시한다. 일거일동에 모두 규율이 있어서, 엄숙하고 성실하기 짝이 없다. 이는 불문 중에서 가장 수련하기 어려운 종파이다. 수백년 동안 전통이 단절되었다가 홍일법사에 이르러 비로소 부흥하였으니, 그래서 불문에서는 법사를 “남산(南山) 율종을 중흥시킨 제11대 조사”라고 일컫는다. 법사의 생활은 매우 성실했다. 한가지 예를 들면, 한번은 내가 화선지 한 권을 홍일법사에게 부치면서 불호(佛號)를 써달라고 부탁했다. 화선지가 좀 많았던지, 법사는 편지를 보내 남은 화선지를 어떻게 하면 좋을지 내게 물었다. 또 한 번은, 내가 회송용 우표를 보냈는데, 몇 장 더 보냈다. 법사는 더 보낸 몇 장을 내게 부쳐 반환했다. 그후 나는 종이나 우표를 부칠 때는 남은 것은 법사에게 드린다고 반드시 먼저 선언을 했다. 한번은 법사가 우리 집에 와서, 나는 법사에게 등나무 의자를 권했다. 법사는 등나무 의자를 가볍게 흔든 뒤에 천천히 앉았다. 처음에 나는 감히 이유를 묻지 못했다. 나중에 법사가 매번 그렇게 하는 것을 보고, 나는 이유를 물어보았다. 법사의 대답은 이랬다. “이 의자 속에, 두 등나무 사이에, 아마 작은 벌레가 숨어 있을 거야. 갑자기 앉으면 그것들이 깔려 죽을 거야. 그래서 그것들이 피하여 달아나게 하려고 먼저 좀 흔들고 천천히 앉는 거지.” 독자들은 아마 웃음이 나올 것이다. 하지만 이게 바로 그가 너무나 성실하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다.

지금까지 말했듯이, 홍일법사는 처음에는 풍류공자에서 유학생으로, 그 다음에는 교사로, 세번째로는 도인으로, 네번째로는 스님으로 변했다. 매번 변할 때마다 정말 그 사람이 되었다. 마치 전통 연극에서 규방 여인 역이면 규방 여인 역, 서생 역이면 서생 역, 노신 역이면 노신 역, 모든 배역을 기가 막히게 소화해내는 만능 배우 같았다 …… 모두 “성실” 때문이다.

이제 홍일법사는 복건(福建) 천주(泉州)에서 입적했다. 귀주(貴州) 준의(遵義)로 흉보가 전해졌을 무렵, 나는 마침 중경(重慶)으로 옮기려고 행장을 꾸리던 중이었다. 중경에 도착하면 법사의 초상 100폭을 그려 각지에 나누어 보내 소식을 전하고 비석에 새기고 공양하도록 하고 싶었다. 초상 그리는 건 이제 발원대로 끝마쳤다. 이 세상에서 리선생님과 나의 사제의 인연은 이미 끝났지만, 그분이 남기신 가르침 — 성실 — 은 영원히 내 마음 속에 새겨져 있다.

1943년 4월, 홍일법사 입적 167일 뒤, 사천(四川) 오통교(五通橋) 객사에서

《연연당수필(緣緣堂隨筆)》에서 선록, 1957년 11월, 북경, 인민문학출판사
《풍자개대표작(豊子愷代表作)》, 1998년 1월 초판, 북경, 화하출판사(華夏出版社)

by 팔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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