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하이 공공조계 경찰국의 ‘넘버 3’, 홍두아삼(紅頭阿三)

1916년에 출판된 메리 게임웰(Mary L. N. Gamewell)의, 『중국으로의 문호: 상하이의 이모저모』(The gateway to China: pictures of Shanghai)의 두 번째 장 “도시 공공부문”(Civic Features)에는 이런 흥미로운 대목이 나온다.

이제 도시는 230명의 영국인 경찰관과 450명의 시크 인도인, 그리고 1,000명이 넘는 중국인에 의해 잘 지켜지고 있다. 시크인들의 멋진 붉은 색 터번은 어디서나 눈에 잘 띈다. 이 사내들은 거칠지만 매우 효율적인 평화의 수호자들이다. 중국인은 그들을 두려워한다. 유난히 키가 큰 시크인이 있는데, 그의 영국인 상관은 그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한다. “그는 내가 부재중일 때에도 내가 현장에 있는 것처럼 지시를 수행할 것으로 기대하는 단 한 명이지요.” 이 사람의 임무 중 하나는 직무에 태만한 중국인 경찰관을 벌주는 것인데, 여름에는 반 시간 겨울에는 한 시간 동안 혹독한 신체단련을 시킨다. …… 이러한 벌이 중국인들에게 특히 거부감을 주는 것은 그것이 시크인에 의해 주어지기 때문이다. 영국인 상관이 그렇게 했다면 그만큼 속상하진 않을 터다.

무슨 영문인가. 위 글이 쓰인 당시 공공조계 내 중국인 경찰관 수의 거의 반에 달하는 450명의 시크인 경찰관이 있었다는 것도 놀랍고, 이들에게 부여된 역할에도 눈길이 간다.

1842년, 아편전쟁의 결과 난징조약이 맺어지고 그에 따라 그전까지 유일한 대외 항구였던 광저우를 포함해 다섯 개의 항구가 ‘자유무역’을 위해 개항되었다. 상하이도 그 가운데 하나였다. 명청대 중국에서 그다지 크지 않은 포구였던 상하이는 개항 후 약 20년 만에 광저우의 물동량을 제치게 되고 20세기에 접어들면서는 동아시아, 나아가 세계적으로도 손꼽히는 무역항이 된다. 남북으로 뻗은 대륙 해안선의 중간에 위치하며 내륙 깊숙이 진입할 수 있는 창장(長江) 하구의 요충지로 강남 지역의 풍부한 인적, 물적, 문화적 자원과 연결되어 있다는 점이 배경으로 작용했다.

상하이의 번영은 중국 내외 각지로부터 사람들을 불러들였다. 더러는 한몫 잡으려는 큰 꿈을 안고, 더러는 쫓기듯이, 그리고 다수는 아마도 그 중간 어디쯤 있었을 것이다. 영국인, 프랑스인들이야 조계의 주인으로 들어와 있었으니 외국인들 가운데에는 다수요 우월한 지위를 점했고, 일본인도 일찍부터 들어와 있었다. 일제강점 이후로 상하이는 우리 독립지사들의 주 활동 무대 가운데 하나였으니 적지 않은 조선인들이 있었는데, 그 전부터도 조선인들의 왕래가 있던 터였다. 잘 알려진 대로 1894년, 갑신정변의 주역 김옥균은 10년여의 일본 망명 생활을 정리하고 옮겨온 상하이의 한 호텔방에서 홍종우에게 암살당했다.

와이탄의 우람한 석조 건물과 같은 가시적인 흔적을 남기지 못했기에 ‘소수자’ 외래인에 대한 기억은 희미해져 버렸지만, 영국인과 프랑스인, 미국인이나 일본인 말고도 참으로 다양한 출신들이 상하이에 들어와 있었고 그들의 역할도 각양각색이었다. 유럽의 정세가 불안해지면서 입지가 좁아진 유대인들 가운데 상하이로 온 이들이 꽤 있었다. 혁명 후 적지 않은 러시아의 귀족과 부호들이 상하이 프랑스 조계지를 자신들의 방탕한 생활을 이어갈 장소로 택하기도 했다.

그런데, 앞에서 소개한 글의 저자가 특별히 “눈에 잘 띈다”고 한 시크인들은 어떤 연유로 상하이까지 오게 된 것일까. 기실, 터번을 쓴 모습 때문이겠지만, 과거 상하이를 시각적으로 보여주는 옛 화보나 사진 가운데에서도 유독 ‘눈에 띄는’ 외래인이 바로 인도에서 건너온 시크 인도인 경찰관들이다.

시크인 기마 경찰관. (출처: C. E. Darwent, Shanghai – A handbook for travellers and residents, Shanghai, Hongkong, Singapore & Yokohama: Kelly and Walsh, Limited, 1911?, 29쪽)
상하이의 시크인 경찰관과 우편배달 소년. (출처: 󰡔追憶―近代上海圖史󰡕, 上海古籍出版社, 24쪽)
상하이의 시크인 공동체 기념촬영. 상하이에 건너온 시크인들 중에는 대금업자, 상인, 기업인들도 있었지만 단일 직종으로는 경찰관이 다수를 차지했다. 시크인은 계급 없는 평등 사회를 지향했지만 같은 색 터번을 두르고 제목을 입은 시크인 경관들이 모두 뒤 열에 서있는 것으로 보아 이들은 공동체 내에서 다소 아랫자리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출처: Panjab Digital Library / www.panjabdigilib.org)

시크인은 15세기 인도 북부 펀잡 지방에서 태동한 시크교를 믿는 사람들이다. 시크교는 이슬람의 신비주의 등 다양한 종교적 영향 하에 힌두교를 개혁하고자 일어난 운동에서 비롯되었다. 이들은 힌두교의 다신관과 계급제에 반대하면서 자신들만의 공동체를 건설했는데, 원인 중의 원인이 되는 유일한 존재에 대한 묵상과 평등주의적 나눔의 실천을 강조한다. 힌두교와 이슬람교 정권들의 탄압 속에 자신들의 종교와 생활양식을 지켜오면서 시크인은 강인한 전사들로 성장했는데, 영국 식민주의자들에 대해서도 극렬히 저항했다. 그런데, 영국에 투항한 뒤 이들은 영국 식민당국의 주요 협력자가 된다. 영국 식민주의자들은 이들과 다수인 힌두교도 인도인 간의 갈등을 식민지 통치에 이용했다. 특히 1857년에 동인도 회사 인도인 용병인 세포이의 반란이 일어나 인도 전역으로 확대되었을 때 영국은 시크교도들의 힘을 빌어 진압하기도 했다. 영국 식민당국은 이러한 내력을 갖는 시크인들을 아프리카 등지의 식민지로 보내 활용했으며 상하이의 조계의 치안 유지에도 투입했던 것이다.

1845년에 상하이의 행정장관과 영국 영사 간에 최초로 토지 이용에 관한 규정이 정해지면서 서양인들이 조계 내 치안을 위해 경찰관을 고용할 수 있다는 점을 명기했다. 이들을 중국인들은 ‘순포’라고 불렀는데 최초에는 야간 순찰과 시각을 알리는 일을 담당한 십 수 명에 불과했다. 1854년, 공공조계 자치위원회에서는 정식 경찰조직을 두는 것을 결의했고 홍콩에서 책임자를 데리고 왔다. 이후 프랑스 조계에도 경찰조직이 성립되었다. 초기에는 서양인과 중국인으로 이루어진 조직이었는데, 이후 영국과 프랑스 조계 당국은 본국이 지배하고 있던 식민지 출신을 영입하여 일선의 업무를 담당케 했다. 이 가운데 영국령 인도에서 건너온 시크교도의 수가 많았다.

시크인 순포는 조계 내에서 그야말로 ‘눈에 띄는’ 존재들이었다. 이들은 서양 지배자들의 대리인으로 서양인 간부들과 중국인 하급 순경들 사이의 지위를 차지했고 영국인들이 직접 나서기 곤란한 경우의 온갖 궂은일과 악역을 도맡았다. 서양인들 못지않은 큰 체구와 머리에 두른 붉은 터번 그리고 짙은 눈썹과 부리부리한 눈의 이들은 중국인들에게는 다소간 호기심과 공포의 대상이었으며 ‘홍두아삼(紅頭阿三)’이라 불렸다. ‘홍두’란 이들이 쓴 붉은 색 터번을 가리킨다.

‘아삼(아싼)’은 시크인 순포의 대칭(핫산?)으로 쓰였다고 알려져 있다. 원래는 ‘셋째’란 뜻으로, 조계 치안권력 서열상 서양인이 첫째, 중국인이 둘째, 너희 인도인은 셋째란 경멸적 의미로 중의적으로 사용된 듯하다. 하지만 기실 이들은 ‘아삼’이 아니라 ‘아이’였다.

이들의 모습은 1884년부터 15년 동안 발간된 대중적 매체인 󰡔점석재화보󰡕에도 보인다. 시크인 경관의 모습이 처음 등장하는 것은 1885년 초의 화보다. 이후로 상해 조계에서 벌어진 정돈되어야 할 모종의 상황을 묘사한 󰡔점석재화보󰡕 화면에 ‘붉은 터번의 핫산’은 거의 어김없이 등장한다. 총 23폭의 화면에 등장하는 인도인 경관은 종종 몽둥이를 치켜든 모습으로 묘사되는데, 서양인이나 중국인 경찰관의 경우에도 종종 몽둥이를 휘두르는 모습으로 그려지고 있으므로 그 자체로 특별할 것은 없다. 하지만 그들의 체구가 유달리 크게 묘사되고 있음으로 해서 몽둥이를 치켜든 동작은 시각적으로 훨씬 더 위협적으로 느껴진다. 이들이 서양인보다도 더 크게 느껴진 것은 아마도 머리 하나 만큼 크게 말아 올린 그들의 터번 때문이었을 것이다. 말 위에 올라타 있을 때는 더 말할 나위 없을 터다.

과연 화보의 작자들이 인도인을 그들 자체로 부정적인 타자로 인식했는지, 인도인들을 통해 조계 당국의 실제 지배자들을 비판하고자 했는지는 단언하기 어렵다. 어떻든 거듭 제시되는 인도인 순포의 거대한 체구는 결국 조계 당국의 실제 폭압적 지배자를 은폐하거나 적어도 모호하게 만들고 있다.

<점석재화보>에는 시크인 경관이 중국인에게서 금품을 빼앗는 장면이 몇 차례 묘사되었다. 수많은 화면에서 도덕적 타락의 상징처럼 보여주던 불교 승려와의 대조 속에 시크인 경관의 악행은 더욱 도드라진다. 이들의 눈매는 종종 야차의 그것처럼 묘사된다.(출처: 「인도인 순포의 강도질(印捕行劫)」, <점석재화보> 제160호, 1888년 8월)
<점석재화보>에서 중국인과 시크인 경관 사이의 가장 극단적 대립은 「조계의 난동(大鬧洋場)」에 보인다. 조계 당국의 영업세 인상에 항의하는 인력거꾼의 시위를 진압하는데 시크인 경관이 칼을 휘두르며 선봉에 서 있다. 󰡔점석재화보󰡕에 전쟁 장면을 제외하고는 중국인과 외국인이 이처럼 적대적으로 대치하고 있는 장면이 묘사된 화면은 없다. 화면 왼쪽으로 자신들의 상관인 영국인들을 향해 달려가는 시크인의 모습이 눈에 띤다. 이들의 폭압적 진압의 뒤에 버티고 있는 제국주의의 존재를 고발하는 것일까.(출처: 「조계의 난동(大鬧洋場)」, <점석재화보>, 제480호, 1897년 4월)
중국인들이 시크인 경관을 두려워하고 미워하긴 한 모양이다. 그들의 횡포도 뉴스거리였지만 그들에 대한 중국인의 ‘복수’도 당연히 뉴스거리였다. 시크인 경관들은 은퇴 후 민간업체의 경비책임자로 곧잘 고용되었는데, 화보는 천복다원(天福茶園)에 고용된 ‘인도인 순포’가 시비 끝에 수염이 뽑힌 사건을 전하고 있다. 하지만 그림에도 그렇게 묘사하고 있듯이 이 ‘인도인 순포’는 퇴직하고 다원에 고용된 노인이다. 젊은 ‘아삼’은 ‘아이’가 이렇게 건드릴 수는 없는 존재였을 것이다.

[후기] 상하이 어디선가 짙은 피부색에 체모가 많고 부리부리한 눈매를 하고서 어울리지 않게 상하이 토박이말을 하는 사람을 만난다면, 혹시…? 하고 생각해 볼 수 있지 않을까요. 실례를 무릅쓰고 “당신 할아버지가 ‘홍두아삼’ 아니었소?” 하고 물어볼 수도 있겠지요. 시크인들은 대단히 성욕이 강하다는 속설도 있다고 하니 말입니다. 상하이 조계의 ‘홍두아삼’은 중국의 근대가, 동아시아의 근대, 비유럽의 근대가, 아니 근대 자체가 이미 글로벌화된 세계 속에서의 복잡한 주고받기의 과정이자 산물이라는 것을 잘 보여줍니다.

댓글 남기기